39-11.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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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데사의 전쟁은 지루하게 진행된다.
탕! 타탕!
타타탕! 탕탕!
“깜짝이야! 또 어디서 쏘는 거지?”
“요새 반대편 망루인 모양입니다!”
“설마 공격을 시작했나?”
야로스 발렌켄드는 잠시 벗어 놓았던 투구를 쓰고는 고개를 슬쩍 내밀어 적이 도사리고 있는 요새 방향을 바라본다.
검은 연기가 오르고 있는 눈 앞의 작은 성채, 델케트 요새에는 백여 명의 비르케제 파 병사가 농성중이라고 한다.
검은 연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거나 해서 나는 건 아니다. 성벽이 무너졌다거나, 포격으로 불이 붙은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요새 안쪽에서 밥을 해 먹으려고 불을 피웠겠지 뭐. 공격이 지지부진한 상태였으니까.
본래 연방 소유의 요새였으나, 비르케제를 지지하며 갑자기 습격해온 민병대가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수비대는 맞서 싸우는 대신 도망쳤다.
아군 적군이 애매한 상황에서 교전을 포기한 수비대장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상황은 골치가 아파져 버렸다.
지금 야로스가 이끄는 부대는 주테르베이크 지역 출신의 민병대 3개 중대 500여 명이다.
요새를 지키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에 비하면 약 다섯 배. 충분히 해 볼 만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문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공격에 필요한 공성병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 못해 성벽을 타고 오를 사다리조차 없다.
뭐 어떻게든 재료를 모아서 만들면 대충 흉내라도 낼 수는 있겠지만···.
‘부대의 화약을 모아서 성문 앞에서 터뜨리면 어떨까요?’
주테르베이크의 목재상을 운영한다던 중대장이 이따위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원.
깔때기 모양으로 화력을 한 방향으로 모아주는 페타드라도 있지 않으면, 튼튼한 나무로 짜서 쇠로 보강한 성문은 어지간한 폭약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을릴 정도겠지. 아니, 그을린 자국이라도 내려면 화약을 어지간히 모아서 터뜨려야 한다.
지금 벼락치기로 소집 된 이소브론 대공의 군대는 여러모로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불과 3년 전 까지 엘랑키아와 전쟁을 했었고 거기 참전했던 용사들도 많을 텐데 어째 모든 지식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공성병기가 없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공성병기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화약만 해도 지금 각자가 지참한 화약을 다 쓰고 나면 언제 보충을 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뭐,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조만간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긴 할 테니 거기서 돈 주고 구하면 되긴 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화약을 걷어서 성문 앞에서 터뜨리는 것은 자살 행위다. 오히려 아군의 전투력이나 떨어뜨리는 꼴이지.
포대가 지원 올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오기로 한 날짜가 이미 지났는데도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휘부에서도 그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말만 하고. 아니 그러면 공격 날짜도 좀 기다려 주든가 원.
결국 야로스가 택한 것은 삽질이다.
요새로 비스듬한 각도에서부터 둥글게 파기 시작하는 참호선은 ‘향후 이어질 요새 공격에’ 분명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아직 완전히 추워지지 않은 덕분에 아직은 땅을 팔 만 했다. 조금만 더 추웠어도 힘들었겠지.
하지만 삽질로 시간 끄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후에는 계획한 만큼 참호선이 완성 될 것이다. 그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공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야로스는 침착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만약 여기 슈토르히 연대가 있었다면, 콘도티에레가 지휘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애석하게도 공성전에 나선 기억이 별로 없다. 전국토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고 작은 요새로 뒤덮인 나우데사에서 싸울 때도 야전 위주로 싸웠었으니.
인구가 많지 않고 군사 귀족 계층이 취약한 나우데사에서는 ‘야전은 용병이, 농성전은 민병대가’ 맡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냥 나우데사 출신의 정규군과 민병대 끼리만 싸워서는 엘랑키아 기사의 돌격을 잠시도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보니 요새 공격에 나선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몇 년 전이더라. 주디칼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용주가 무슨 요청을 했었는지, 슈토르히 연대는 요새 포위전에 참전했었다. 당시 최하급 부사관이었던 야로스는 영문도 모르고 참전했었고.
슈토르히 연대가 받은 명령은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이쪽에서 보기에 요새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포위망을 만들고 혹시 성 밖에 적이 있다면 격퇴하는 것으로 기억한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중간 중간 매복한 적군이 있었지만, 사거리가 되기도 전에 저 멀리서 허공에 총을 쏘고는 도망쳤다.
주디칼리에서 벌어지는 도시국가 사이의 소규모 전쟁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승패는 배치와 병력 기동 단계에서 결판이 나고, 전술적 열세에 몰린 쪽이 끝까지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는 소문이 돌았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앞세워 공격군의 힘을 빼고, 적의 주력군은 후방에서 차곡차곡 힘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적대 도시가 불과 얼마 전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건설한 요새는 그냥 보기에도 공격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능선을 따라 건설된 성벽은, 마치 성벽의 연장이라도 되는 듯 가파른 산자락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이 제한되었으며 그나마 평지로 이어진 곳은 최소 두 방향 이상의 망루에서 저격당하게 되어있었다.
야로스야 요새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혹시라도 공격명령이 내려올까 바짝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공격이 시작되면 어디로 뛰어야 할까. 저 성벽 아래에서 비비적 대다가는 분명 총 맞아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에 비하면야··· 이 손바닥만한 요새는 요새라고 하기도 뭣 한 수준이다. 그냥 조금 높은 담벽을 둘렀을 분이라고나 할지.
하지만 이 볼품없는 돌벽이라 해도, 제대로 된 공성포가 아닌 포탄은 충분히 막아 줄 것이다. 보병 돌격으로 억지로 빼앗으려고 해도 상당한 피가 흐르겠지.
아무튼 당시 그 두려웠던 요새에 대한 공격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콘도티에레는 꽤 여러차례 말을 타고 요새가 보이는 능선 아래쪽을 돌아 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중대장들이 놀라서 혹시라도 요새에서 노리면 큰일이니 후방으로 물러나라고 호들갑 떨었던 게 생각난다. 시야 좋은 높은 곳에서 저격하면 위험하다고 말이다.
그 후에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요새를 크게 우회해서 반포위하는 데 성공한 슈토르히 연대는 마침내 ‘공격’을 개시한다.
야노스가 걱정했던 것처럼 무작정 성벽을 향해 돌격하고 비탈을 기어 오르는 무식한 방법은 아니었다.
요새 후방으로 통하는 조용한 오솔길을 발견했으니, 여기를 통해 후방을 장악하는 계획이었다.
일단 요새를 완전히 봉쇄하고 말려 죽이든, 구원오는 적의 원군을 영격하든 하겠다는 것이 사령부의 계획이었다는데··· 얼마 후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후방에서 갑자기 포성이 들렸던 것이다.
적 포병에 후방을 잡혔나 싶어서 기겁을 하던 와중, 포탄은 정확하게 요새의 외벽을 때렸다.
잘못 쐈다기에는 포격은 꾸준히 계속 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요새 외벽에 명중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포격은 거의 이틀 동안이나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장교들이 저 포격은 아군의 포격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고.
대부분은 낮 동안이었지만, 밤에도 가끔 찢어지는 포성이 숙영중인 슈토르히를 깨우곤 했다. 특히 해가 뜰 무렵이면 특히 극성이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기묘한 일이 일어났는데···.
야로스는 부하 여섯 명과 함께 요새를 살피라는 명령을 받고 숲을 헤치고 요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요새 위에 통 수비병이 안 보이는 것이다. 충동적으로 얕은 해자를 건너 성벽에 등을 기댔는데도 맞은 편 총안에서 총탄이 날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는 했다지만 전혀 소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적의 정찰을 찾는 눈치도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요새가 조용했던 것이다.
일단 병사 둘을 보고하러 보내고, 나머지 네 명의 부하와 함께 성벽의 모서리 진 부분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몸 사리는 걸 생각하면 완전 미쳤었구나 싶지만.
들키면 뒤지는 거지 뭐! 따위를 생각하며 맨손으로 성벽을 기어 올랐다. 모서리 진 곳이라 두 면을 붙잡고 오를 수 있어서 무장했음에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무도 없는 성벽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야로스와 네 명의 부하, 모두 다섯 명의 슈토르히는 성벽 길을 통해 안쪽으로 진입했다.
구름다리를 건널 때 내려다 보이던, 평지에 촘촘하게 건설된 공격군의 포위망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쨌든, 기가 막히게도 다음 번에 야로스가 문을 연 방에는 일곱명의 수비병들이 막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고함을 지르며 움직이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몽땅 포로로 잡은 이후에야, 막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던 늙은 남자가 성의 수비대장이며, 나머지 여섯 명이 수비군 장교의 전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정확히 야로스가 기어 올라온 성벽으로 크레시미르 중대장이 이끄는 돌격대가 들이닥쳤다.
전투는 없었다. 수비대장과 장교들이 몽땅 사로잡힌 시점에서 조직적인 저항 따위는 불가능했고, 수비군은 어느 누구도 죽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수비군의 숫자가 50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지키는데 최소 200명은 필요하고 많게는 500명 이상도 수용할 수 있는 요새는 거의 텅 빈 상태였다.
그건 일종의 사고였다.
전쟁을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포의 일부를 철거하고 ‘포병과 함께’ 수도 방위를 위해 이동시켰다.
다음으로 야전 사령관은 ‘포대가 줄어든 만큼 인력이 남을 테니’ 또 다시 병력을 차출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소수의 인원만으로 요새를 지키느라 수비군은 빠르게 지쳐갔다.
야로스가 감시병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었던 것은 행운과 감시병의 태만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매일 새벽만 되면 포탄이 떨어지는데다, 적의 주공에서 전혀 반대편인 모서리에 가기를 다들 꺼려했던 것이다.
마침 병력도 부족하겠다 결국 붙박이 감시병을 두는 대신 순찰조를 배치하는 안일한 선택을 했고, 야로스가 성벽에 오른 자리는 막 순찰조가 지나간 자리였다.
‘포격이 계속 떨어지는데 적이 성벽을 오를 거라 누가 생각하겠소!’
포로로 잡힌 수비대장은 억울한지 그렇게 털어놓았다.
누가 오르긴, 내가 올랐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다. 뒤통수에 포탄 떨어질 거란 생각도 못했으니.
그렇게 고명한 드워프 건축가가 설계했다던 난공불락의 요새는 겨우 다섯 명의 보병에게 침입을 허락하며 함락당하고 말았다.
‘아 우리가 공들여 준비한 공격인데! 이틀만 기다렸으면 우리 거였는 데 전공을 새치기 당했구만, 아무튼 축하한다!’
정찰 중 충동적으로 성벽을 오른 야로스에게 선봉의 전공을 빼앗긴 크레시미르 선임 중대장은 기분좋게 등짝을 때리며 축하해주었다.
콘도티에레 역시 병력이 적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무모했다면서도 크게 포상을 주었었다.
그때가 야로스에게는 인생의 황금기였을까.
그 일로 진급도 했고, 이후로도 여러차례 전공을 세워서 비슷한 시기 입대한 동료들 중 처음으로 장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젊어서 너무 노력한 탓일까, 그러다 극심한 허탈감에 빠져서 편한 직장을 찾아 슈토르히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편한 직장이랍시고 찾은 덕에 지금 찬 바람 맞으며 땅이나 파는 신세가 됐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사흘 동안 요새를 끊임없이 때린 포격 말이다. 그게 대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야로스의 천운은 결국 그것 덕분이었다. 그게 적병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성벽에 오르자마자 벌집이 되었겠지. 애초에 올라갈 틈도 찾지 못했겠지만.
콘도티에레를 비롯해서 슈토르히 선임 중대장 중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법도 했지만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고, 지금은 아예 탈퇴했으니.
탕! 타다당! 탕!
팍! 파팍! 팍!
삽을 푸석푸석한 흙 속에 박아 넣는데 갑자기 참호 주변에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망상하는 사이 성벽을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는 참호선이 성벽 위의 적에게 노림 당할 만큼 가까워졌던 것이다.
“엇, 시팔! 적습이다!”
“불, 불이 꺼졌어! 누구 불좀 줘!”
“각자 반격해!”
“내 총! 내 총 누가 가져갔어?”
“쏴라! 쏴버려!”
타타타탕! 타탕!
전투는 대혼란이었다.
아니, 개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