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0. 고요함
한참을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는 이모, 세델레네의 얼굴을 라오리스는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녀는 키가 작아 종종 어린아이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작은 두개골 속에서 약동하는 지식과 통찰, 그리고 사고력은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그 사고력이 유독 특정 분야에 치우쳐 활용되곤 하는 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아직은 말할 수 없네요.”
“어, 어째서입니까 대모님?”
언제나 다소 과할 정도로 거침없이 의견을 제시하고는 했던 세델레네이다. 이렇듯 망설이는 모습에 모두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 아이의 재능과 성장을 확인하기는 했어요. 어느 쪽도 특출났었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녀의 가끔 보랏빛으로 빛나는 차분한 검은 눈은 진지할 때 강한 호소력을 발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떤 자인지 저희가 알 수는 없겠습니까? 적합한 인물인지는 나중에 살펴도 될 테니···.”
“...재능이 있는 인간은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성장이 도중에 멈추고 가치없는 쓰레기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그건··· 그렇지요 확실히.”
“인간은, 안타깝지만 수명이 너무 짧아요. 한 순간이라도 성장이 어긋나거나 재능이 빛을 잃으면 시간을 들여 만회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회의 초반부의 무관심, 그리고 방금까지의 다소 애정어린 적극성에 이어, 이번에는 마치 칼날과 같은 차가움이 서린 목소리였다.
성에 차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애정을 거두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
“그래서 확인하러 가고 싶어요. 제대로 개화하였는지.”
“말씀하신 재능있는 인간을 말씀입니까?”
“그래요.”
“그··· 그러하면 이곳 아렌슈바이크로 부를 수는 없겠습니까? 분명 그 자도 기뻐할 것입니다.”
장로들의 제안에, 세델레네는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젓는다.
“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러 가야 해요. 엘랑키아로.”
“에, 엘랑키아라니··· 곤란합니다 대모님. 오랫동안 떠나계셨어서 밀린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휴우···.”
뜻이 좌절당하자, 세델레네는 한숨을 내쉬며 울상을 짓는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거나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라오리스는 실망하는 이모님의 얼굴을 보며,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그렇게나 높이 평가하나 궁금해진다.
그러고보니, 안뜰에서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는 편이 아닌 이모님이 함박웃음을 짓는 것을 보았다.
“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요.”
“그러시지요.”
장로들은 ‘대모’ 세델레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불안해 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녀를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녀가 가진 혈통, 재능, 영향력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훌륭한 통치자로 명망 높았던 선대 선제후, 즉 라오리스의 어머니의 친동생이며 불세출의 명 전략가였다.
이를 바탕으로 비젤키르헨 일족이 그룬발트 심장부에서 가장 강대하고 부유한 가문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영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는 더욱 제멋대로여서, 친언니인 선제후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선대 선제후, 그녀의 언니이자 라오리스의 어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운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쇠약해져 죽어가는 언니에게, 선제후의 위를 라오리스가 받는 대신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 약속한 것이다.
그 후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은 여전히 장로단의 골칫거리였으나, 조카인 라오리스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즉시 달려오게 되었다.
···장로이자 추앙받는 대모로서의 역할은 마지못해 시늉만 하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반대로 6년이나 떠나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최근 비젤키르헨과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리라.
전란이 일어났다면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앞서 고향으로 달려왔을 테니 말이다.
장로단 회의는 이후로도 한참 더 이어졌고, 세델레네는 다시 흥미를 잃고 생각에 빠졌는지 허공만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모님, 어차피 겨울 동안은 엘랑키아까지의 먼 여행을 하시기에 적합한 시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건 맞는 말이구나.”
다른 장로들이 돌아간 후, 라오리스는 풀이 죽은 이모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갔다.
“가문의 대모로서 하실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겨울 동안 그간 쌓인 일을 마무리 하시면, 눈이 목으면 곧바로 출발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오오, 정말인것이냐? 나의 조카야.”
“물론입니다 이모님.”
세델레네는 기분이 풀렸는지 다시 웃음을 되찾는다. 손을 뻗어 사랑하는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키가 작은 것이 컴플렉스인 라오리스지만, 세델레네는 키가 더 작기에 슬쩍 허리를 숙여 친애하는 이모님의 칭찬을 받아들인다.
“다 컸구나, 내 언니만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구나.”
“그런데 이모님, 전에 말씀하신 제자··· 라는 이는 누구입니까? 오늘 회의에서 언급하신 자와 같은 사람입니까?”
“흐음··· 궁금한 것이냐?”
“제가 알아도 된다면 말입니다만.”
“후후, 내 귀여운 조카가 몰라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느냐. 그 아이는 내가 가르쳤던···.”
라오리스가 알기로, 이모인 세델레네는 누군가에게 쉽게 가르침을 베푸는 성격은 아니다. 심지어 ‘귀여운 조카’인 자신에게조차도 말이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인간 귀족의 궁정에 초빙되어 가기도 하고, 누군가를 가르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렇다면 비젤키르헨에 우호적인 그룬발트의 쟁쟁한 귀족들 중 하나라는 말일까?
하지만 이모님은 그 자가 엘랑키아에 있다고 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가르칠 가치가 있었던 몇 안되는 아이들 중, 가장 똑똑하고 성실했던 제자이니라.”
“제자··· 군요.”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제자라고 명시한다라. 안뜰에서의 대화에서는 못 느꼈었지만,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시큰하게 아파오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가르침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으니까.
물론 선제후가 뛰어난 군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비젤키르헨에는 세델레네 이모를 포함해 훌륭한 군인이 몇 명이나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었지만, 최근 엘랑키아에 다녀온 주디칼리의 군수 상인이 소식을 전해주었느니라.”
세델레네의 다소 중구난방인 설명에 따르자면, 그 상인은 주디칼리를 기반으로 엘랑키아나 그룬발트는 물론, 전 대륙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큰 손이라고 한다.
최근 대규모 거래가 이루어져 엘랑키아 남부를 방문했다가 ‘철면 은행’의 지점장이 관심을 가진다는 소문이 있는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아하하, 그런데 자기도 대화를 나누어 보고는 심취했다지 않느냐. 그 아이는 꿈을 가진 이들을 빠져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꿈을 가진 이들이 빠져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흐음, 그게말이다,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 나에 대해 긍정하면서 그 이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이해는 잘 가지 않지만 이모님이 그렇다니 그렇겠거니 라고 생각한다.
“그대 역시도 소식을 듣지 않았느냐? 엘랑키아 남부에, 그 손바닥만한 지방이 엘랑키아 국왕에 이어서 주신교 법황의 군대까지 격퇴시켰다고 말이다.”
“아, 예, 저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이가 내 제자이니라. 과거에 영특했던 아이가 지금은 어디까지 갔는지가 무척 궁금하구나.그래서 꼭 보러 가고 싶어졌다.”
이모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안뜰에서와 같은 함박웃음, 아니 이번에는 조금 꿈꾸는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옥좌에 앉으려면 그룬발트 출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또한 귀족이 아니라면 다른 가문들의 반발이 심해서 후보자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지···.”
다른 가문 뿐 아니라, 당장 장로단이 난리가 날 것이다. 또한 통치받아야 할 대상인 인간 신민들도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겠지.
“걱정 말거라, 조카야. 그 아이는 분명 그룬발트의 귀족 혈통이니라.”
“그, 그랬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엘랑키아에···.”
“흠···.”
세델레네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비 언어적 표현을 캐치하는데 능숙한 라오리스지만 이모님의 표정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정보가 확실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라면 친애하는 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부로 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그 아이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였느니라.”
“아, 그랬군요···.”
“뭐, 간혹 인간은 비참한 상황에서 재능이 무르익어가기도 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그 아이의 재능은 참으로 아름다웠느니라.”
“그 자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이모님의 시선을 끌었던 건가요?”
“흐음···.”
자신도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라는 듯, 세델레네는 다시 생각에 빠져든다. 앞서의 침묵보다도 좀 더 긴 시간을 고민한 뒤, 말을 이어간다.
“전쟁을 정말 즐겁게 하는 아이였느니라.”
“즈, 즐겁게···.”
라오리스는 갑자기 목 뒤가 섬뜩해짐을 느꼈다. 방금까지 항상 자신에게 솔직한 친족과의 푸근한 대화를 하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세델레네 이모님은 종종 전쟁광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흉한 일인 전쟁을 그 자체로 즐긴다는 것이다.
물론 라오리스는 그런 비판이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델레네는 단 한번도 ‘즐기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가 참전하는 경우는 ‘남이 일으킨’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전술과 전략을 논의하고, 적의 의도를 간파하며 전투를 지휘해 승리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즐겁고 빛나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맞아 돌아갈 때의 즐거움에 가까웠지, 아군과 적군의 유혈을 즐기는 모습은 절대로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만··· 비젤키르헨 내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세델레네가 ‘각별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전쟁을 정말 즐겁게 하는 자’는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아하하, 정말 기대가 되는구나 조카야.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느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이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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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추운 계절이다.
굳이 겨울에 전쟁하려는 놈들은 미친 놈들이다.
전에 모셨던 슈토르히의 콘도티에레가 그렇게 말했었고, 야로스 발렌켄드 역시 거기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일 해주고 남의 돈 받는 입장이 누구나 그렇듯, 전쟁을 언제 할지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한겨울 나우데사의 구릉지대에서 몰아치는 삭풍을 온 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지금 저보고 병력을 지휘해 공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이 한 겨울에?”
“그렇네, 야로스 경. 마사이드 경이 귀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 의회에서 귀관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으면 대공 전하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었을 거라면서.”
야로스는 기가 막혔다. 마사이드는 의회 앞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젊은 호위대장이다.
그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이소브론 대공의 군을 이끄는 대공의 조카, 오란덴 샤도 비존테 남작이 갑자기 야로스를 불러 선봉대를 맡겼다.
어째서인지 그는 야로스가 고참 용병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호위대에 입대하고 싶어서 이력을 너무 자세하게 밝힌 게 문제였던가.
“귀공의 커리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니겠나? 가서 영광을 손에 넣으시게.”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만···.”
하늘에 맹세코, 야로스가 엘랑키아로 소집령이 내린 슈토르히를 그만둔 이유는 ‘안락하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였다.
굳이 이소브론 대공의 호위대에 들어간 이유? 이 나라에서 가장 높고 세력이 큰 인물의 호위대가 되면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빌어먹게도 목숨을 걸고 영광을 찾아야 할 판이다.
목숨은 더 어렸을 때 충분히 많이 걸었었다. 지금은 그저 호위대의 주황색 망토와 황금색 흉갑을 걸치고 안전한 대공궁 주변에서 거드럭거리고 싶을 뿐이었다.
영 인연이 없었던 여자들도 좀 만나보고.
“주테르베이크의 3개 중대를 맡기겠네.”
“알겠습니다··· 오란덴 남작님.”
그런데 갑자기 혈기만 왕성한 민병대를 이끌고 비르케제 공작파의 요새를 향해 돌격해야 하게 생겼다.
그것도 맨 선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