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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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선제후는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12개의 명문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모두가 고대 아란 제국에서 이어지는 고대 일족, 엘프 혈통의 가문이며 황제 선출의 특권 외에도 막대한 규모의 영지를 가진 대영주 가문이기도 하다.
그룬발트의 선제후는 역사의 흐릿하게 지워진 부분을 통해 추측하자면, 과거에는 12개보다 좀 더 많았던 것 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12개이며, 여기서 더 늘어날 수는 없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 이유는 선제후들의 거점 도시를 방문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가령, 비젤키르헨 가문의 거점인 아렌슈바이크의 경우가 그렇다.
고대 아란 제국의 총독부가 있었다는 고대 도시 아렌슈바이크는 모두 3층에 걸쳐 이루어진 구조로, 각 층은 장대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다.
성벽의 기단부는 아란 제국의 석공들이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축성기술자들이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견고하고도 안정적이라고 한다.
세 개의 큰 문은 하루 종일 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도시 내외에 모두 일곱 곳이 있는 시장에서는 대륙 전역에서 찾아온 진귀한 물건들을 찾아볼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권위적이리만치 장대한 성벽의 모습도, 골목 골목 넘쳐나는 풍요로움과 안전함도 첫 방문자의 눈길을 끌지는 못한다.
장님이 아닌 한, 아렌슈바이크를 방문한 사람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광경. 아니, 도시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도 ‘보일 수 밖에 없는’ 광경.
바로 도시 가운데에서 하늘을 찌를 듯 까마득하게 솟아있는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이다.
도시의 최상층부 자체가 이 세계수의 밑둥을 둘러싼 기단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이가 2백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가 도시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초현실적인 광경이다.
평소 신앙심을 거의 가지지 않는 냉담자이거나 물질주의자라 해도, 도시 위로 가지를 뻗고 거대한 청록색 이파리를 드리운 모습을 보면 절로 경의가 생길 정도였으니.
그룬발트에는 이런 세계수가 모두 12그루 있으며, 이들은 과거에 주디칼리 북부에 있었다는 세계수의 묘목이라고 한다.
한 눈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는 세계수 본목은 아란 제국이 멸망할 때 함께 불타서 사라졌다고 한다.
즉, 지금 존재하는 선제후 가문들은 세계수의 묘목을 옮겨 심고 가꾼 옛 아란 귀족들의 후예라는 것이다.
가문의 역사가 아란 제국 시절로 소급된다는 문서 증거만 있어도 어지간한 명문으로 취급받을 정도이다.
그런데 숨기지도 못할 거대한 ‘증거’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으니, 12선제후의 권위와 정통성 역시 하늘을 찌르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12세계수 묘목과 이를 지키고 가꾸어온 12선제후 가문은 그룬발트에서 절대적 존재이며, 때로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직접 권위를 부여한 것 이외의 신앙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주신교단조차도 그룬발트에 만연한 세계수 신앙은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이니 말이다.
세계수는 주신이 지상에 내린 기적의 흔적이라 인정하며, 사도와 동등한 성스러운 위치를 부여해 이를 신앙의 매개로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태이다.
아무튼 드넓은 제국 영토 전역에 우뚝 솟아있는 12그루의 거대한 세계수, 그리고 이를 가꾸고 지탱하는 선제후들의 존재는 다른 어디에도 없는 그룬발트만의 특징이다.
중앙 집권이 되기는 커녕 26년째 황제조차 선출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의 제국으로서 통일성을 가지는 것은 이런 물질적인 상징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이런 신성한 나무의 절벽처럼 보이는 거대한 둥치 바로 아래.
아렌슈바이크에서 가장 높은 회의장에서 비젤키르헨의 선제후 라오리스는 장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폴름스와 카젤하겐이 손을 잡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카젤하겐은 지난 선제후 회의에서 빨리 황제가 선출되어야 함을 부르짖었던 가문이며, 폴름스는 그런 카젤하겐의 모습을 비웃으며 조롱했던 가문이다.
그런 두 선제후 가문이 손을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목적이 일치했다는 것이리라.
이번에 그 목적이란 무엇일까.
“굳이 정보를 더 모을 필요도 없이, 카젤하겐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우데사에 영향력을 넓히려는 폴름스를 지원하겠다는 것.”
폴름스의 세력권은 제국의 북서쪽이다. 당연히 엘랑키아 왕국 및 나우데사 연방의 국경과 마주하고 있다.
카젤하겐이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밝혔다는 것은 선제후 가문들 사이에 만연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중요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의미이리라.
한편으로는 폴름스를 지원해주되, 나중에 몰랐다는 식으로 배신 당하는 일은 피하려는 것도 있겠지.
현재 카젤하겐은 선제후 회의에서 여섯 가문을 규합했다. 한 가문, 폴름스만 추가된다면 그들이 지지하는 디오보르크 공작이 황제가 되리라.
물론 그러려면 나우데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우선적으로 얻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우데사에 개입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엘랑키아 왕국을 견제하는 것이 되니, 카젤하겐 가문의 목적도 간접적으로 이루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엘랑키아 국왕의 심기를 건드려 또 다른 분쟁의 실마리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어쩌면 폴름스의 선제후는···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요.”
라오리스는 회의에서 보았던 폴름스의 선제후··· ‘회색 마녀’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의 광기어린 미소를 떠올린다.
지난 엘랑키아와의 국경 분쟁에서는 그룬발트가 패했고,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그룬발트는 내전 중이었고, 적극적으로 분쟁에 개입할 능력이 부족했으니까.
빼앗긴 영토 자체는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질 좋은 철광이 나는 광산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룬발트 내부로 흐르는 하상 운송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지역을 차지한 엘랑키아로서는 향후 쉽게 그룬발트 내륙으로 진공할 수 있고, 반대로 그룬발트는 공격은 커녕 전선이 넓어 방어조차 힘겨울 수 있는 위치이다.
세 강의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엘랑키아의 요새는 마치 그룬발트의 목덜미를 겨누는 비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라오리스 자신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그 주변 지역을 세력권에 두고 있는 폴름스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겠지.
게다가 그 자존심 강한 ‘회색 마녀’라면 더더욱. 실질적인 지역의 가치 이상으로 분노했을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엘랑키아와 전쟁을 하면 이길 수는 있냐는 것이다.
젊은 엘랑키아 국왕이 왕궁에서 사용하는 초의 개수를 줄여가며 모은 돈으로 양성한 왕실군은 정말 강력했다.
그에 비해 선제후는 물론, 지방에 할거한 세력들로 힘이 나뉜 그룬발트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카젤하겐과 다른 다섯 가문이 폴름스를 도울 수도 있지만, 그건 나우데사를 통한 간접 지원이지, 결코 직접적인 전쟁에 대한 지원은 아니다.
그러니 힘이 부족한 폴름스로서도 당장 전쟁을 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카젤하겐 외에도, 다른 가문들은 자금은 보내지 않더라도 외교적 방법을 통해 나우데사를 지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외교라니 어떤 노력인가요?”
“북쪽의 섬나라, 알디온 왕국과 서쪽의 엘랑드르 대공국을 침묵시키려는 모양입니다.”
“허어···.”
나우데사는 소국인데다가, 일곱 도시의 연립체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그룬발트가 나우데사의 내전에 개입해 엘랑키아 세력을 몰아내려 할 때, 다른 두 나라의 세력을 관망하게 할 수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최근 엘랑키아의 세력이 위험하게 강해진 것을 생각하면, 두 나라가 침묵할 가능성은 높았다.
역시 비젤키르헨의 장로들은 훌륭한 인물들이다. 모두가 사려 깊고 현실적이며 분석적이다.
이들이 지도자인 덕에, 최근 백여년 간 비젤키르헨의 세력은 꾸준히 상승일로였고.
실로 고맙고 존경할만한 인물들이다.
다만, 이들은 너무도 현실적인 탓에 디오보르크 공작의 황제 즉위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기도 했다. 그의 즉위가 가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인간 황제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라오리스는 이 점이 너무도 답답하고 아쉬웠다.
차라리 장로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제대로 된 전략이나 의견 없이, 무조건 전통 따위나 타 가문에 대한 견제만 외치며 반대한다면 한 번 싸워보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장로들의 주장은 틀린 게 없었다.
시선을 ‘비젤키르헨 가문’ 하나만으로 돌린다면 말이지만.
황제가 없고, 권력이 분산되는 와중에 위대하고도 위대한 신성 그룬발트 제국은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대모님께서는 어떤 의견이십니까?”
그러고보니, 오늘의 장로 회의에는 평소보다 인원이 한 명 더 많았다.
선제후 라오리스의 어머니의 여동생, 즉 이모인 세델레네였다.
그녀는 오늘, 선제후 회의 다음날 안뜰에서 더럽혔던 하늘비단 복장을 입고는 무심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었던 옷이 지금은 완벽한 순백으로 빛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모습이 장식을 위해 주의깊게 배치한 인형처럼 아름답기는 했으나, 회의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초점을 엘랑키아에 둔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두도록 해요. 기세가 오른 엘랑키아와, 나우데사 내부의 친 엘랑키아 세력이 견제가 필요하기는 하겠지요.”
허나 ‘장식용 인형’의 입에서는 막힘 없이 의견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초점을 우리 비젤키르헨에 둔다면···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겠지요. 나름의 세력 규합을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오오, 그렇게 풀이되는군요.”
“대모님의 고견 잘 들었습니다.”
장로들이 다소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이유는 세델레네의 의견이 정말 대단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선대 선제후의 친동생, 그리고 ‘원래는 선제후가 되었어야 하는 인물’이 가지는 권위는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의 능력이···.
“대모님, 그럼 혹시 디오보르크 공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라고 보십니까?”
“디오보르크··· 흐음···.”
지금까지 누가 질문하건 시선 방향조차 바꾸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살짝 인상을 쓰며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디 보병 연대장이나, 3개 연대로 이루어진 측익 부대 지휘관이면 몰라도 황실군을 이끌 만한 인물은 아니네요.”
“역시! 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틀림없겠군요.”
장로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기뻐한다. 평소 행태야 어떻든, 그들은 모두 세델레네를 가문의 대모로서 존중하고 있었다.
한편 그 모습을 보던 라오리스는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결론은 같지만, 세델레네가 디오보르크 공작을 평가한 ‘기준’은 다른 장로들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일족의 엘프들 중, 세델레네와 누구보다도 많이 대화를 나눠본 라오리스는 안다. 그녀가 생각하는 황제는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황제가 친정군을 이끈다면 분명 그 규모는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세델레네 이모가 보기에는 디오보르크 공작은 그 역할을 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연대장 감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대모님, 최근까지 그룬발트 전역을 유람하신 것으로 아는데, 혹시 황제 후보로 적합하다 생각하셨던 귀족이 있습니까?”
엇··· 저런 질문을 하면 이야기가 꼬일 텐데.
이걸 막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순간 라오리스는 난감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존경하고 또한 진심으로 친애하는 이모님이 생각하는 적합한 황제 후보가 궁금해지기도 했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흐으음···.”
이모님이 다시 고민하는 듯 턱에 손을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