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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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나 총을 다루며 거대한 대열의 일부가 되고, 동료와 자신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평범한 보병’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지도자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몇 주 정도 훈련 기간을 통해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고, 부대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정도.
그 후로는 전장과 병영 생활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으며 완전해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건강한 청년 수백 수천 명을 한 장소에 소집해 훈련하고 무장시켰다고 이들이 전력이 되질 않는다.
당연히 이들을 조직하고 지휘할 장교가 필요하다.
일반 보병이 이런 정도이니, 전방에서 다른 병사들을 이끌며 부대의 기간을 이루는 전방 장교와 부사관들은 더더욱 양성하기 어렵다.
다만 지금까지 그런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던 것은, 병력을 모집하고 싸웠던 장소가 블랑독이었던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는 트랑카벨 영지군과 이를 조직한 나는 큰 혜택을 받았다고도 하겠다.
부모와 집안으로부터 기초적인 사회 교육을 받고, 군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소양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귀족과 자유민 청년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이들이 중대장을 비롯한 연대의 중추를 담당했고 훌륭하게 수행했다.
영지군 창설 초기만 해도 외부에서 믿을만한 베테랑 용병들을 고용해 간부 역할을 맡기곤 했다.
하지만 이후 폭발적으로 팽창한 영지군의 장교들은 거의 모두가 블랑독 내부에서 충원되었다.
당연히 같은 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장교와 병사가 전쟁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인 경우가 가지는 장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창설된 트랑카벨 정규 연대들은 아주 훌륭하게 작동했으며, 1200명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정원에도 불구하고 더 큰 규모의 연대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고향의 청년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영지군의 장교들은 훌륭했다. 정말로 훌륭했다.
생뢰르반에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중대장 사상률이 80퍼센트에 이르렀으면서도 기어코 부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 기껏해야 군 경력이 1년 남짓인 젊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싸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장교와 병사들을 기르고 사지로 내보내는 입장이지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수치를 확인하게 되면 고마우면서도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신생 군대를 뒤에서 받쳐주는 군수와 행정 장교들 역시, 교육받은 귀족 자제나 향사 계급에서 충원할 수 있었다.
트랑카벨 가문이 대규모 상단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계산에 밝고 똑똑한 이들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몇 개 연대나 되는 대군이 굶주리지 않고, 총알이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방대한 군수 시스템이 이들, 군대 살림꾼의 손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훌륭한 인재 풀에도 불구하고 바로 충원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바로 전황을 읽고 돌발적인 전술 상황에 대처할 작전 참모, 더 나아가 야전 지휘관이다. 이건 단기간에 가르친다고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고민하며, 다른 국가나 집단에서 이 역할을 하는 장교를 어떻게 충원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마치 사관학교처럼 현대적인 ‘교육’을 통한 전술전략가의 양성을 하는 기관에는 ‘자이트리츠 전쟁관’이 있다.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인 루트비히나, 드 레뮤즈의 참모인 아인멜츠가 어려서부터 공부한 그 전쟁관이다.
다만 여기는 외부에서 학생을 모으는 진정한 의미의 학교가 아니라, 오로지 자이트리츠 가문과 그 방계 일족 중 소질이 보이는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키우는 특수한 기관이다.
루트비히는 본가 소속이고 아인멜츠는 원래는 방계 출신이나, 재능을 보여 자이트리츠라는 본가의 이름을 받았다던가.
여기서는 전장에서 사용되는 각종 무기 사용법은 물론, 맨손 격투술부터 전략적 식견까지 열 살도 되기 전인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배운다고 한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통상적인 봉건 군대나 일부 용병단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식은 ‘전통’에 맡기는 것이다.
전통이란 그 집단이 쌓아온 시간을 다르게 이름이다.
국가단위에서 가지는 군사귀족제도에서 수용하는 방대한 후보군에,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며 경험자가 양성되는 군의 전통에 의존해 인재를 수급한다.
이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수백 명이 초급 장교로 경험을 쌓기 시작하면 거기서 경험적이든 확률적이든 장군감이 나온다는 말이지.
이런 ‘전통’이 더욱 오래, 세대를 거쳐가며 쌓이게 되면 신기할정도로 조직이 알아서 돌아가며, 때가 되면 인재를 수급하게 된다.
우연히 빛나는 인재가 연달아 등장하면 그 조직의 황금기가 오는 것이고, 반대로 인재 수급이 늦어지면 조직이 몰락하는 것이고 그렇겠지.
보통은 국가단위에서 돌아가는 형태지만, 놀랍게도 일부 전통있는 용병단 역시 같은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유명한 그로이엔펠트라거나···.
이런 두 방법 모두 ‘시간’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트랑카벨 영지군 역시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쌓아온 시간과 경험이 알아서 인재를 수급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창군 2년째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 얄팍한 전통 치고는 눈물이 날 정도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서 고마울 정도겠지.
재능있는 이를 소년 시절부터 철저하게 키우는 것도, 초급 장교들이 자연스럽게 경험을 쌓아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이거 참, 어느 조직이나 재능있는 자를 필요로 하지만 그 재능을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다.
으음, 이세계 온 김에 상태창 치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를 바라보면 머리 위에 능력치가 수치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럼 너는 전투에 재능이 있으니 일선으로, 너는 숫자에 재능이 있으니 후방으로··· 흠흠, 너무 깊은 생각은 간혹 백해무익한 망상에 빠지게 만든다.
몇몇 상비군이나 용병 연대에서 활용하는 직위를 금화로 사는 방식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직위에는 가격이 매겨지고, 공석이 된 자리는 해당 금액을 지불한 하급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어쩐지 매관매직이 생각나서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현대적인 평가 시스템이 없는 한 나름 합리적인 방식이다.
평가 시스템이란 결국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에게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기 전에 한 번 추려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축적된 재산이 한다는 것이, 금전진급제도이다.
집안이 좋고 부유한 가문의 자식이 부모의 돈으로 삽시간에 벼락출세하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인을 위한 기초교육과정도 없고, 고등교육은 귀족조차도 선택된 한 줌이 아니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결국 큰 돈을 낼 수 있는 좋은 집안 자식이 괜찮은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가문의 배경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모아 진급하는 구성원이 생긴다면 이건 철저하게 재능의 영역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군복무를 하며 많은 돈을 모았다는 것은 복무 기간이 길었다, 계속 승리했다, 전공도 많이 세웠다, 참을성과 책임감이 있다··· 가 만족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돈을 내고 부대의 일원이 된 경우, 그 돈은 부대의 운영비가 되기 때문에 일동의 공동 출자자와 같은 입장이 된다.
부대가 크게 패하거나, 심지어 전멸이라도 하면 자신의 투자금이 공중분해되는 것이니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음, 역시 부대 운영비로 들어간다는 점이 통상적인 뇌물을 통한 매관매직과는 확실히 좀 다르긴 하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논의되었던 금권정치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잃을 게 많은 인간일수록 공동체에 더 많은 기여를 한다는 논리였지.
상관에 ‘뇌물’을 바치고 관리가 되어 본전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일개 보병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좀 더 합리성이 보인다.
차라리 어디서 뭐 하던 놈인지도 모르지만, 상관이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낙하산으로 떨어져 내린 인간에게 지휘받는 것 보다는 낫지 않나? 라는 것이지.
그리고 엄격한 신분제가 있는 세상에서 어찌됐건 돈을 모아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시스템에 의한 진급 기대 없이 평생 일개 보병으로 구르는 조직 보다는 낫다 이거지.
···뭐 이런 여러가지 ‘의외의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전진급제는 포기했다.
우선은 트랑카벨 영지군은 이미 잘 돌아가고 있는 조직이다. 장기적으로 모순이 누적되고 언젠가 고름 터지듯 터질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건강하단 말이다.
나름 합리적인 인재 선발과, 일개 보병으로 시작해 소대장, 중대장으로 진급하는 케이스가 이미 있는데 이런 조직을 돈으로 묶고 싶지는 않았다.
참고로 이는 블랑독 특유의 분할상속제라는 ‘전통’에 기인한 바가 없지 않았다.
처음부터 권리가 주어진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토론과 협력을 통해 힘이 실린 지도자를 따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그럴까.
아직 이정도 규모에서는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말이지.
게다가 내가 필요한 것은 전장을 조율하고 적의 전술을 살필 작전 참모 인재인데, 이건 돈 많은 사람 뽑아서 될 일이 아니기도 하고.
‘보병 한 명은 군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스승님이 해주셨던 말이 기억난다. 맥락이 통할 듯 말 듯 한 문장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참 특이하게 배운 케이스이구나···. 언제였던가, 이 세계로 넘어오고 처음으로 배신을 당했을 때 였던가.
스승님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훌륭한 지도자이자 교사였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처럼 사람을 참을성 있게 키울 여건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배웠던 방식은,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데 아주 훌륭한 가이드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내가 이해를 한 만큼 남들도 이해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올 겨울부터 시작될 장교 교육 과정이 정리되었다.
최소 반 년은 진득하게 해야 할 내용이지만··· 시간이 없으니 겨울 동안 속성으로 끝내려 한다.
뭐 트랑카벨 영지군의 창설 자체가 벼락치기로 속성으로 이루어졌고, 교육 대상자 거의 전원이 실전 경험자들이니까···.
1기와 2기,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중대장 및 연대 참모이상 진급자와 진급예정자를 대상으로 한다.
다만 문제가 좀 있는데···. 바로 교관 선정에 대한 건이다.
정교관은 두 명,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인 모리츠와 루트비히이다.
모리츠는 사실상 슈토르히를 맡아서 운영하다시피한 수완가이고 최근에는 참모이자 부관으로서 아실을 보좌해왔으니 적임이다.
따라서 부대 기동과 병참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루트비히는 그 유명한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수료자이기도 하고, 녀석이 이끄는 슈토르히의 신출귀몰함은 나도 놀랄 정도니까···.
전술전략 전반과 기병전술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보조 교관 역시 세 명··· 이지만.
포술과 축성을 가르칠 첼레스티나.
공세와 보병전술을 가르칠 크레시미르.
···마지막 한 명은 바로 나다. 진행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이 나오면 그 부분을 땜빵하기로 했다.
교관들은 대단히 훌륭하다. 초반은 이론교육으로 시작하여, 후반은 몇 개의 전투를 선정하여 샅샅이 분석하는 커리큘럼도 내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고.
문제는 교관들이 죄다 슈토르히 출신들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게··· 슈토르히 출신이 영지군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봐 일부러 조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사실상 아실이 이끄는 군의 참모장 역할을 하는 모리츠도 실질 직위는 아실의 부관이다.
나 역시도 대리 사령관이기는 하지만 명목상 지휘체계는 아실 중심으로 모두가 인식하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래서야 원.
이름을 슈토르히 군사학교로 바꿔야 할 판이 되어버렸네.
하아··· 그런데 정말 교관을 구할 수 없었다. 미리부터 준비했으면 주디칼리에서 초빙해올 분들이 몇 있었겠지만.
트랑카벨 가문의 아쥬흐와 아실 남매에게 서면이지만 상담을 청하기도 했는데 이 속도 좋은 두 사람은 훌륭한 생각이다, 이의없다는 답장만 보내왔다.
마지막으로 아롱드 영감님이게 ‘트랑카벨 가문 측에서도 교관을 추가하는 게 어떻겠냐’고 전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가뜩이나 빠듯한 교육 기간인데, 구색을 갖추기 위해 낭비하는 것은 ‘가문의 주인’으로서 허락할 수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으음, 역시 크게 성공한 상인다운 합리적인 대답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리 된 이상 다른 말 안 나오도록 철저하게 해 보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