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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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베른 수도회의 수도사, 빌리발트 보겐 폰 탈리부르크는 추워지는 날씨에 망토를 여몄다.
얼마 전 카르카냑의 시장에서 새로 산 두꺼운 모직 망토는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수천 명이나 되는 그룬발트의 단성파 신자들을 이끌고 블랑독에 도착한 이후, 빌리발트는 며칠동안 형제들과 번갈아가며 쪽잠을 잘 정도로 바짝 긴장했다.
다소 돈이 될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블랑독은 그들에게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땅이다.
반대로 블랑독의 주민들에게도 단성파 신자들은 굳이 받아 줄 이유가 없는 낯선 이들이다.
하물며 최근까지도 전쟁을 치렀던 지방이라고 한다. 승리한 쪽은 블랑독의 영주들이라고 한다.
허나 그건 영주들의 승리이지, 전쟁터가 된 땅의 주민들의 형편은 말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외부인들을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축낼 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서 힘 없는 개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비참해지는지 많이 본 경험이 있으니까.
전란이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배경이 된 지역 뿐만이 아니다. 가혹한 경험을 한 인간들의 마음 또한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블랑독 병사들의 안내와 호위를 받으며 엘랑키아 남부 지방을 반쯤 가로지를 때만 해도 자신의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었다.
원래 블랑독 지방이 황량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역에 인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가끔 만나는 마을도 버려진 것이 분명했다.
도적이라도 나올 것 같아 호위병들과 별개로 피난민들끼리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섰을 정도니까.
그러다 작은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넥시라는 이름의 성채 도시는 한창 외벽 수리와 증축 와중인 것 처럼 보였다.
‘어? 피난민이라니 어디서? 어이구, 어디? 그루운발트으? 아이고오··· 멀리서도 오셨네! 어이구, 애들까지 데리고 여길 온겁니까! 아고고 고생 많았네!’
다행히도 아넥시의 성주로 보이는 초로의 남자는 기분 좋게 피난민들을 맞이해주었다.
마을에서는 커다란 솥을 빌려주고 국거리 푸성귀와 땔감을 나누어줘서, 단성파 신도들은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아넥시는 주신교단에 이단으로 찍혀 두 번이나 공격당한 적 있고, 두 차례에 걸친 포위 공격을 모두 이겨낸 장소라고 한다.
아마도 이단으로 찍힌 이들로서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일지, 어찌되었든 빌리발트는 오랜만에 인간의 따뜻함을 느꼈다.
경계하고 불안해 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어이구 우리도 남은 거 좀 나눠 준 거지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 나중에 자리 잡으면 그때나 받읍시다. 강 건널 때 조심하고! 분명히 성녀님께서 자비롭게 맞이해 주실 거요!’
보답으로 가지고 있던 금화 중 일부를 내밀자 성주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래도 보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자, 그제서야 아주 일부만을 받았을 뿐이다.
‘그보다 일 하고 싶어하는 청년이 있으면 성벽 공사장에서 일을 해 보는 게 어떻겠소? 여긴 사람이 부족해서, 아마 꽤 괜찮게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요. 생각 있으면 내 소개해드리리다.’
그렇게 일부 청년들은 아넥시에 남기로 했다. 겨울까지 일을 하다가 공사가 마무리 되면 합류할 예정이다. 그들이 벌어들인 돈은 분명 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여기 아넥시는 성녀님이 언제나 지켜주시는 도시요! 성을 공격하던 법황청 군대 5만 명이 성녀님이 보내주신 기병대에 삽시간에 쓸려 나갔지 뭐요!’
블랑독에서 이어졌던 이단토벌 전쟁에 대해서는 약간은 들은 바가 있었다.
법황청이 공인하지 않은 성인 추대는 교단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표적 이단 행위 중 하나이다.
자신들도 이단으로 탄압받고 있건만 수도사인 이상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은인이나 다름 없는 이들에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나저나 당연히 ‘성녀’는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존재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다소 놀랐다.
그 후 빌리발트는 신도들을 이끌고 이동을 계속해서 로데브 강이라는 강을 건넌 이후,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로데브 강 이남 지역은 너무도 평화로웠고 또한 풍요로웠다.
길 주변 농가들 사이에 전란의 긴장감은 전혀 없었고, 갑작스러운 신도들의 출현에 놀라기는 했으나 이어서 보인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걱정했던 배척이나 적대 행위는 전혀 없었다.
그 후로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병사들은 돌아가고 피곤한 얼굴이지만 항상 예의바르고 친절한 카르카냑의 서기관이 안내를 맡았다.
‘아 그게··· 그룬발트에서까지 사람들이 오실 줄은 몰랐지만 재작년에 로데브 강 북쪽에서 온 피난민들을 챙기기 위한 규정을 만들어 놓았거든요.’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아 괜찮냐는 질문에 서류 업무가 지겨웠는데 차라리 잘 됐다며 웃던 서기관은 이렇게 설명했다.
‘처분하실 물건이 있으시다면 잠시 카르카냑으로 가시죠. 전당포 거리가 있습니다.’
이 때 빌리발트는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감을 다시 챙겼다.
지금 가지고 있는 보물들은 자신이 가문에서 챙겨온 것도 있지만, 부유하건 가난하건 피난길에 나선 단성파 신도들이 모아준 것이다.
절대로 허투르게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감안은 하고 있었다. 전쟁 중인 지역에서 귀금속의 가치는 급락한다.
당장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 아닌 데다가,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언제 약탈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불합리한 취급을 받을 각오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현금으로 바꿔두지 않으면 당장 신도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담당 서기관에게도 어느정도는 뇌물을 주어야 하겠지. 최소한 이 사람이라도 아군으로 만들어 두어야 장기적으로 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건 조금 더 쳐주셔야 하지 않나요? 거참, 우리 집도 델레망드에서 보석상을 한다구요. 거길 가라고요? 아니 지금 델레망드를 어떻게 다녀옵니까? 이 분들 그룬발트에서 힘들게 온 사람들인데 좀 더 챙겨주면 복 받지 않겠습니까?’
뇌물을 줘야 할 상대라 생각했던 서기관은 자기 일 처럼 열을 올리며 전당포 직원과 대신 흥정해 주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좀 더 많은 현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본 카르카냑의 거리는··· 상상 이상으로 번화해 있었다.
끊임없이 상품을 실어 나르는 인부와 수레들이 길을 오갔고, 신나게 사방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로데브 강을 건넌 이후로 만난 모든 사람이 친절했다.
이런 친절함은, 본인이 안전함을 보장받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장 수도사로서 전란이 벌어진 지방을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그를 안내하며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해주던 서기관이 당황했다.
자신도 힘이 있었다면.
힘으로 단성파 신도들을 지키고 주변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고생고생하며 낯선 엘랑키아 남부로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비록 허술한 천막과 판자집이기는 했지만 당장은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캠프에 도착했고, 건강한 남녀들이 선발되어 일을 하러 떠났다.
심지어 강제 노역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할 예정이다.
“돌아오셨습니까, 빌리발트 형제!”
지금은 ‘조베른 수도회 엘랑키아 남부 지회’가 된 오두막에 도착하자 다른 형제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수도사라고 주어지는 음식만 먹으며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기하고 있던 형제들은 시장이 내다 팔 통을 만들고 있었는지 마당에 나무토막과 공구들이 널려있었다.
빌리발트는 능숙하게 말에서 내리고 말의 비쩍 마른 목을 쓰다듬어준다. 말이 기분 좋은지 투레질을 한다.
카르카냑에서는 대부분의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살 수 있었지만, 유독 승마용이건 작업용이건 말은 구하기 힘들어었다.
그래서 둘 다에 적합하지 않은 늙은 암말을 사는 수 밖에 없었다. 수중에 돈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후 정착에 사용할 비용이라 헛되게 쓸 수는 없었으니.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농장을 몇 개 사고, 그 주변에 황무지를 좀 봐 두었네. 거기를 싸게 사서 개간한다면 단성파 거주지를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아, 그거 다행이네요. 오랜만에 다시 쟁기를 잡아야 하겠군요.”
빙긋 웃으면서 맨 팔을 보이는 젊은 수도사 형제의 팔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이 붙어있다.
“그리고 모병소도 찾아가 보았는데··· 지금은 모집을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네.”
“저런··· 우리가 외국인, 그룬발트 출신이라서 그런 겁니까?”
“아니, 지금은 신규 모집을 하지 않는 모양이네.”
전투에 익숙한 무장 수도사들은 트랑카벨 영지군에 입대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남부까지 오는 동안 호위해주었던 장교가 자신도 북부 출신이라며, 정착에 필요한 몇가지 조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아 정착비용에 보탤 수도 있고, 빠르게 이방인이라는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가 될 터였으니까.
어쩐지 신념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검을 잡는 용병이 되는 것 같았지만, 크게 보면 단성파 주민들을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마음의 위안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신규 모병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한다. 군대를 더 뽑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전 시기의 그룬발트를 생각해보면··· 어딜 가든 영주들은 사람을 뽑고 있었다.
“그룬발트 소식은 별다른 게 없습니까?”
“상인들 사이에서 알아보았네만, 아직 특별한 소 식은 없나보더군.”
“차라리 소식 없는 게 다행입니다. 뭐 소식 들려올 게 또 선제후 나으리들 자기네끼리 전쟁하는 거 말고 있습니까!”
“하하, 뭐 그렇지. 대신 나우데사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군.”
“나우데사에서요? 누가 쳐들어 갔답니까? 엘랑키아?”
“아닐세. 자기네끼리 내전이 벌어진 모양이야.”
“어휴··· 그 작은 나라에서 좀 사이좋게 살 것이지. 그룬발트가 조용하니 이웃 나라가 난리군요.”
나우데사 출신이 들으면 기분 나쁠 법한 이야기를 악의 없이 나눈다.
“오늘 일과가 아직 안 끝났나? 그럼 돕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형제.”
머물 땅을 찾았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충실함을 느끼는 빌리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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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바빴던 올해도 끝나간다. 대체로 온난하고 건조하여 살기 좋은 편인 엘랑키아 남부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그룬발트나 주디칼리 북부의 칼바람을 생각하면 귀여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겨울은 전쟁을 하기에는 좋지 않은 계절이다. 아니, 겨울에 전쟁하겠다고 드는 놈들은 대체로 미친 놈들이다.
아니 날씨 좋은 봄, 풍요로운 가을에도 하기 힘든 게 전쟁인데 그 모든 악조건을 안고 굳이 겨울에 전쟁을 한다? 그건 제정신이 아니지 완전.
물론 그 악조건을 극복하고 영웅적인 활약을 해 서사시의 주인공이 된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서사시에 남지 못한 무수히 많은 실패자가 있다는 생각을 우선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필 이런 계절에 전쟁을 시작한 나우데사의 군인들에게는 동정심이 든다. 거기는 북쪽이라 블랑독보다 훨씬 추울 텐데 말이다.
“각 연대 숙영 준비 완료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전부?”
“예, 전부입니다.”
“그래, 고마워.”
물론 전쟁을 쉬는 기간이라고 해도 지휘부는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왜냐하면 전쟁을 못하게 막는 요소, 특히 추위와 물자 부족, 폭설 따위의 문제에 미리 대처하는 것만 해도 전쟁 수준의 본격적인 준비를 필요로 하니까.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 훈련은 무조건 하루 4시간 이내, 방한 장비 없이는 주둔지 벗어나면 안 돼.”
“옛, 콘도티에레!”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 겨울은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다. 내년을 위해 내실을 갖출 때라고나 할까.
얼마 전, 병력 감축을 위해 제대 희망자를 받았고, 600명 정도가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만큼의 신병들이 재배치되었기에 눈에 띄는 규모의 감소는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각 연대의 규모를 줄이며 조금씩 감축해야겠지만···.
이번 겨울은 장기적으로 블랑독을 지킬 인재들을 양성할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쌓인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들, 모리츠와 첼레스티나가 보낸 보고서를 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