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71화 (371/556)

39-4.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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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선제후 회의가 또다시 성과 없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비젤키르헨의 선제후 라오리스는 어두운 얼굴로 안뜰로 나왔다.

“...혹시 남아 계신 선제후가 있던가?”

“아니요, 모두 간밤에 떠나셨습니다.”

“숙소에 사용한 흔적은 있던가?”

“그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방에 들어가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군··· 알았다.”

집사의 보고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집사 쪽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고개를 조아린다.

선제후 회의는 자정에 끝난다. 이번 회의장이었던 도시 아렌슈바이크의 주인, 비젤키르헨 가문은 손님들을 위해 호화로운 방을 준비했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것 처럼, 11명의 손님들은 아무도 숙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분명 선제후 11명과 그 수행원을 위해 준비한 호화로운 식사 역시 그대로 버려지게 되겠지.

예상은 한 바였다. 지금까지 대부분 그러했으니까.

선제후 가문들은 서로를 극단적으로 불신한다.

평소에는 수시로 대놓고 전쟁을 벌이는 판인데, 아무리 고대의 관례라 할지라도 좁은 공간에 모아놓고 서로 믿으라고 해도 무리였다.

다만 ‘대부분’ 그러했을 뿐이지 ‘전부’는 아니었다.

올해 초에 있었던 회의에서, 라오리스는 선제후들 중 유일하게 주인이 준비한 숙소를 이용했고 다음 날 아침 식사에 참가했다.

고대의 일족들로 이루어진 선제후 가문 사이의 극단적인 불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번 비젤키르헨이 준비한 회의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 헛수고였던 모양이다.

대신 난리가 난 것은 다름아닌 비젤키르헨 가문 내부의 장로단이다. 혈족의 주인이자 선제후로서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우호적인 가문이 주최자라고 해명해도 의미는 없었다. 벽과 천장에 암살자를 숨기거나 식사에 독을 타는 건 주최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너무도 답답했고, 자신의 생각을 외치고 싶었다. 이대로는 그룬발트는 무너진다, 나쁜 전통이라면 고쳐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허나 장로단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아무리 가문의 주인이자 선제후의 인장을 가진 라오리스라 해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전날 카젤하겐의 선제후와 나눈 대화를 다시 기억한다. 아마도 그는 라오리스 자신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능하면 흉금을 터놓고 선제후 대 선제후, 고대 일족의 일원으로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래서 간절하게 오늘 아침까지 남아주었으면 했지만···.

슬프게도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다.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자신을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뜻을 함께하지 않는 여섯 선제후 중 하나일 뿐이다.

진심으로, 자신도 비젤키르헨의 두루마리를 카젤하겐의 두루마리 옆에 놓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다. 그게 장로단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허어···.”

무력감에 한숨이 나온다. 말이 선제후,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최고위직’이지 실상은 장로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선거로 황제를 선출한다.

형태도 그렇지만 의도를 따져 보아도 참으로 멋진 일이다.

아란 제국의 적통을 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그룬발트 제국은 문명 세계를 남쪽의 그림자 종족과 북쪽의 빙벽인들로부터 지키는 선도자여야 했다.

때문에 그룬발트의 황제는 그저 혈통을 잘 타고 난 애송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그룬발트의 황제는 뛰어난 행정가에 탁월한 조직가이며 유능한 전략가여야 한다.

그게 제국의 절대권력자, 황제를 선거로 뽑게 된 이유라고 알고 있다. 고대의 일족 사이에 내려오는 고대 문서의 내용이므로 진실이리라.

허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2 선제후 가문은 각자의 야심을 채우고 라이벌을 경쟁하기 위해 선거권을 사용할 뿐이었다.

‘뛰어나고 탁월하고 유능한’ 황제 따위를 고려한 적은 없었다.

유일한 투표 기준은 ‘가문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아, 유일한 기준은 아니겠다. ‘라이벌 가문에 견제가 되느냐 마느냐’는 한층 더 역겨운 기준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게 무려 26년이나 그룬발트의 제위가 결정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차라리··· 차라리 순진한 인간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처럼, 수명이 긴 고대의 일족들이 심사숙고하느라 인간 기준으로는 너무 긴 시간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추악하고도 추악한, 오래 사는 만큼 머리 속에 탐욕만을 쌓아 올리는 고대 종족 사이의 권력 경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장로단의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두루마리를 제출해볼까.

아무리 장로단의 권위가 강하다 해도, 이미 결정된 황제를 갈아치울 만한 힘은 당연히 없으리라.

가장 오래된 서약에 의해 보호받은 ‘신성한’ 황제의 권위에 비하면 일개 선제후 가문의 권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그게 두려워서,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인간을 황제 자리에 올리면 그 후에는 절대로 손이 닿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행위는 심한 후폭풍을 불러 오겠지. 선제후인 라오리스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래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른 고대의 일족들과 장로단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자신이 비젤키르헨의 선제후가 된 지는 이제 5년도 채 되지 않았지 않은가.

또한 선제후 가문 사이의 격렬한 대립이 안정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어제 회의에서의 대화에서도 나왔지만 결코 적지 않은 고대의 일족과 인간들이 서로를 죽고 죽였다. 그 원한이 아직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여섯 가문이 뜻을 합쳤다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어쩌면 다음 회의에서는··· 혹은 그 다음 회의에서는···. 황제가 정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 자신도 우유부단한 고대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으음?”

고민을 하며 안뜰을 거닐던 라오리스의 눈에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고대 아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고도로 발달한 조경술을 배운 정원사들이 꾸민 안뜰이다. 꽃 하나 돌 하나 이유 없이 배치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조화를 무너뜨리는 광경, 이리저리 짓밟힌 풀밭과 어지럽혀진 연못가의 돌덩이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하늘하늘한 하얀 옷의 누군가.

“아니··· 돌아오셨습니까?”

“음? 어··· 라오리스인가?”

눈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작은 체구의 여자 엘프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곧게 뻗은 비율 좋은 몸은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지게 한다. 다만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흙투성이이다.

잘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달빛을 담아 직조한다는 전설이 있는 하늘비단으로 된 것으로, 가문 내부의 공적인 업무가 있을 때만 입는 귀한 것이다.

그런데 손과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분명 아무데나 걸터 앉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밤하늘을 담은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 라오리스가 아는 한, 이 조합이 어울리는 이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세델레네 장로님··· 인사드립니다.”

“라오리스, 내 귀여운 조카야. 선제후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었지. 오랜만이구나. 얼마나 지났더냐? 5년?”

“제 기억이 맞다면 장로님께서는 6년만에 비젤키르헨으로 돌아오셨습니다.”

“6년이나··· 어느새 그렇게 되었구나.”

진귀한 복장과 맨손을 더럽히고 아침부터 안뜰에서 뒹굴고 있던 말괄량이 같은 외모와는 달리, 세델레네라 불린 여자 엘프는 진중한 말투로 대답한다.

“라오리스··· 그대도 키가 좀처럼 자라지 않는구나! 이걸 어쩐다. 나와 언니도 같은 고민을 했었지. 다음 대를 위해서는 키가 큰 반려를 구하도록 하거라.”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이모와 조카 사이라고는 해도 남이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망설임도 없이 찔러 버린다.

키에 대한 컴플렉스는 진짜였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조금은 화가 났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모이자 가문의 장로인 그녀가 이런 사람이란 것은 원래 잘 알고 있었기에 화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께서는 키는 부모가 아니라 하늘에 달린 것이라 말씀하시고는 하였습니다. 그보다 장로님께서는 이런 이른 시간에 안뜰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장로단에서 귀찮게 하기에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어느새 이 시간이 되었구나. 이걸 보거라.”

세델레네는 흙투성이 손을 뻗어, 자신이 흙투성이가 된 원인을 가리킨다.

“이건···.”

연못 근처 고운 흙바닥 위에, 여러개의 선이 그어져 있고 뜯겨진 꽃과 풀, 그리고 연못가를 장식하던 하얀 돌이 여러개 놓여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장로님?”

“바론블라테의 회전을 복기한 장면이니라! 지금 막, 카톨로스 공작이 직접 이끄는 예봉이 자파와트의 밀집 대형을 돌파하는 국면이 아니더냐!”

“으음, 그게··· 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장로단의 가혹한 요구도, 동료 선제후들의 무례한 행동도 이해하였듯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선제후 라오리스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안타깝구나 조카야. 네 어머니는 종종 그대의 지성을 높게 평가하는 말을 하곤 했지만, 나는 혈육의 정에 이끌려 언니의 판단력이 흐려진 결과라 생각하곤 하였느니라.”

“하핫, 그건 정말 옳으신 말씀이군요, 이모님.”

“그래 거기 앉아보거라. 바론플라테의 회전을 알려주겠다.”

하늘비단 치마를 대충 걷어 올리더니,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며 흙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다.

의상 담당자들의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기에, 라오리스는 반대편에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는다. 더러워진 옷을 더 늘릴 수는 없었으니까.

“보거라 조카야. 이쪽이 카톨로스 공작의 진영이며, 이쪽이 이교도 자파와트의 진영이다. 자파와트는 어울리지도 않게 철제 방벽을 전투에 도입해서···.”

“죄송합니다, 장로님. 바론플라테 전투는 언제 있었던 전투입니까? 아무리 기억을 찾아봐도 낯선 지명이라서···.”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올해 초에 있었던 전투이니.”

“아···.”

당연히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유쾌함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는가.

어쨌거나, 눈 앞의 세델레네 이모님은 자신을 솔직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장로였으니까.

“여기가 자파와트의 우익이다. 선두 보병들은 키가 어찌나 크던지···.”

벌써 백 년 이상 지난 과거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때도 이모는 자신에게 어느 전장의 이야기를 알려줬었다.

그때의 전장은 잠시 후 일가가 식사를 해야 할 탁자 위였으며, 기병과 보병은 각종 식기들이 담당했다.

“카톨로스 공작은 신통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부하들의 신뢰를 받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느니라. 그게 아니었다면 이 때의 공세는···.”

당연히 모처럼 정돈된 식탁이 엉망이 되어 혼났었지만 좋았던 기억 중 하나이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와 대화를 하는 게 얼마만이었던가.

상대의 손짓과 말버릇 하나까지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를 하는 게 얼마만이었던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며, 세델레네의 말과 손짓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이니라. 별볼일 없는 변경의 싸움이지만, 보병 전술을 공부하는 이라면 한 번쯤 복기해 두어야 마땅한 싸움이라 하겠으니.”

“잘 들었습니다, 장로님. 이제 아렌슈바이크에 돌아오셨으니 가문의 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아니, 바로 떠날 생각인데.”

아아,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본래 다음 선제후가 되어야 했으나, 이런 사람이기에 자신이 선제후가 되어야만 했다.

“이, 이번에는 어디로 가십니까? 장로단에서는 분명···.”

“이번에는 서쪽, 엘랑키아로 가야만 하느니라.”

“엘랑키아 왕국 말씀이십니까?

“나의 제자가 드디어 꽃을 피웠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모의 얼굴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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