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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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대륙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 아란 제국의 적통이라는 자부심 또한 가지고 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제국을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름 아닌 그룬발트의 군주가 가진 황제위는 아란 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잇는다.
그룬발트의 황제위를 뽑는 12개의 선제후 가문은 전부 옛 아란 제국의 귀족 계급이었던 엘프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다가 단순히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대륙 중앙부 비옥한 대평원의 절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역사와 정통성, 넓고 비옥한 영토와 인구까지 가지고 있지만···.
그룬발트가 대륙의 다른 나라들, 엘랑키아나 라솔, 알디온과 같은 나라를 누를 정도로 최강이냐··· 라고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12선제후 가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정통성과 혈연을 따라 왕위가 이어지는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그룬발트의 제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혹은 딸이 대를 이어 제위를 세습한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룬발트의 황제는 12선제후 가문이 투표를 통해 선택한다.
12선제후의 과반, 즉 7가문 이상이 황위 계승에 찬성 표를 던지면 그 인물이 다음 황제가 된다.
임기는 따로 없으며, 황제가 사망하면 선제후들은 다시 다음 황제를 선출하게 된다.
하지만 선제후들의 의견이 합치하지 않아 어느 후보자도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당연히 누구도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최고 통치자인 황제가 없는 그룬발트 제국은 그 힘을 결집시키기 어려워진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제후들은 경쟁자를 설득하거나, 혹은 쓰러뜨리려 하고 이는 어쩔 수 없이 국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하지만 선제후들은 인간에 비교하자면 영생에 가까울 정도로 긴 수명을 가진 이종족, 엘프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좀처럼 의견이 모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에 대해서 선제후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째서 제위를 계속 공석인 채로 방치하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수명이 긴 엘프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의논을 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즉,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수명의 절반이 흘러 버렸다··· 와 같은 추측이다.
다음으로 일단 황제가 선정되면, 12선제후 역시 황제의 신하로서 명령을 들어야 하기에 일부러 뽑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는 의견도 있었다.
‘고귀한 고대 종족’인 엘프가 ‘황제라고 해 봐야 인간 나부랭이’의 명령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게 황제를 고른다는 것이고.
혹자는, 단순히 12선제후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다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끊임없이 벌어지는 선제후들 간의 내전이다.
그룬발트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제후들은 끊임 없이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적대하며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왔다.
여기에 황제가 되고자 하는 후보자들이 경쟁자들과 주고 받는 경쟁과 음모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대국이라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것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대국인 그룬발트가 타국을 압도하지 못하는 이유였으며, 국가 내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아무튼, 이미 26년 째 황제위는 공석이었다.
선제가 승하한 직후, 유력한 차기 황제로 거론되던 4명의 후보자들 중 벌써 2명은 사망했다. 한 명은 전사, 한 명은 자연사였다.
거의 인간의 한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만큼 황위가 공석이었기에, 이제 어떤 이들은 ‘앞으로는 황제가 없는 그룬발트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걱정에 잠긴 이들이 그룬발트의 미래를 고민하던 때···.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아렌슈바이크에서는 또 한 번의 선제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제위가 공석이 된 후, 벌써 아홉 번째 회의였다.
아렌슈바이크 영주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회의실.
고대 아란 제국의 전통에 따라 만들어진 이 회의실은 타국의 통상적인 회의실 구조와 달리, 계단식으로 앉을 자리가 마련된 반원형의 방에 불과했다.
방 안의 유일한 가구는 한 가운데 놓인 탁자 뿐이다.
“카젤하겐 가문은 쥬링겐의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하겠소.”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엄해 보이는 검은 옷을 걸친 남자 엘프가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놓는다.
고풍스럽게 비단 끈으로 묶이고 밀랍으로 봉인 된 두루마리였다.
카젤하겐 가문의 두루마리가 놓인 탁자의 보라색 공단 위에는, 모두 다섯 개의 두루마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두루마리는 각 선제후 가문이 가진 권리와 정통성을 의미한다.
즉 인간 후보자에게 가문의 두루마리를 바친다는 것은 그를 황제로서 지지하며, 그가 ‘살아있는 한’ 황제와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식이었다.
허나 아직 두루마리의 숫자는 여섯 개.
12선제후 중 딱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가 정해지려면 최저 일곱 선제후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이 여섯 선제후의 지지는 아무 의미도 없다.
황제가 정해지면, 모두가 지지해야만 한다.
황제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지지할 수 없다.
그것이 신성 그룬발트 제국 황제 선거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정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란 제국이 붕괴하고 혼란기에 옛 엘프 가문들이 새로운 제국을 세울 때는 이미 정해진 규칙이었다.
어쩌면, 처음 이 까다로운 규칙이 정해질 때는 ‘다시는 우리들의 제국을 잃지 않겠다’라는 굳은 의지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황제 선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규칙에 다름 아니다.
“...이미 여섯 가문이 뜻을 모았소.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하는 가문은 더 없소?”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두루마리들이 놓인 탁자 옆에 서서 좌중을 살펴본다.
자신처럼 두루마리를 제출해 지지를 표시한 다섯 명의 선제후 외의 여섯 명.
한 명씩 눈을 마주친다.
반응은 제각각이다.
무표정하게 그저 마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비젤키르헨의 선제후.
캥기는 것이 있는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는 테인로프의 선제후.
분노로 불타는 눈으로 마주보는, 이런 자리만 아니라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의 룬베크의 선제후.
이 상황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다소 광기 어린 웃음을 지어 가늘어진 눈으로 도발하듯 노려보는 폴름스의 선제후.
한참을 기다려보지만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나서지 않는다.
“...좋소. 그래, 한 번 터놓고 이야기라도 해 봅시다.”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오늘이 끝날 때 까지 회의는 계속되며, 선제후들은 자유롭게 지지를 선언하거나 철회할 수 있었다.
언제라도 탁자 위에 일곱 개의 두루마리, 즉 지지표가 모이는 순간 황제는 결정되는 것이다.
신성 그룬발트가 성립되던 무렵인 거의 천년 전, 고대의 선제후들에게 이는 엄숙한 협력과 충성맹세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다음 황제로 정해진 이의 이름을 걸고, 각 선제후들이 차례대로 두루마리를 놓는, 그 자체는 요식행위지만 장엄하게 그지 없었을.
허나 오늘날은 마치 서로를 견제하고 조롱하는 요식 행위로 변질되어 버린 느낌이다.
“벌써 그룬발트의 옥좌가 비어버린 지 26년이 흘렀소. 우리는 아홉 번 모였지만 한 번도 뜻을 모으지 못했고.”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 말투에는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분노.
“주군을 잃어버린 그룬발트의 백성들이 가엾지도 않소? 올해 초에 여섯 가문의 뜻이 모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렇게나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우리가 인간들의 바람에 응해 주어야 할 때가 아니겠소?”
“그거 좋은 말씀이긴 한데··· 하지만 카젤하겐도 15년 전에는 잘도 우리를 걸고 넘어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폴름스의 선제후가 지적하고 나선다. 그 말투에는 경멸이 짙게 섞여있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 아니오?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거요, 사과를 하라면 하겠소.”
“하핫, 글쎄··· 15년은 그 잘난 인간들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에게는 ‘찰나의 시간’이 아니던가? 그 시간 동안 우리 폴름스가 지지했던 후보자는 전쟁하다 죽어 버렸지 뭐야.”
“...후보자의 죽음에는 애도를 표하나···.”
“애도? 그걸 전장에서 죽여버린 것이 다름아닌 디오보르크 공작인데, 그런 자를 신성 그룬발트의 다음 주인으로 인정해도 되겠나?”
“휴우···.”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군다.
매번 이런 식이다.
선제후들 끼리의 반목, 인간 후보자들 끼리의 반목.
그게 얽히고 설켜 모든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다. 거듭해서 벌어진 선제후끼리의 내전에서 적지 않은 가문의 일원들이 죽어갔다.
설령 수백년 전의 사건이라 해도, 현 선제후의 친부모, 혹은 친형제, 심지어는 자식인 경우도 있었다.
···엘프들 사이의 원한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잘잘못을 따지기도 쉽지 않았다. 대체 언제 누가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원한과 복수는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만큼 끝도 알 수 없었다.
서로가 나름의 해묵은 정통성과 명분을 들고 있는 이상, 명백하게 잘못된 쪽을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해보려 한다.
“엘랑키아 왕국이 역사속에서 본 적 없이 강성해진 것은 다들 알 것이오. 선대 국왕 때 까지만 해도 무모하게 벌인 전쟁에서 연거푸 패배했으나···.”
정세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선제후들의 태도가 조금 바뀐다.
“새 국왕이 즉위한 이후로는 연전연승, 우리 그룬발트는 물론이고 나우데사, 라솔, 심지어 주디칼리의 법황 상대로도 승리를 거두었소.”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머리 위로 오른 손을 치켜들자, 그의 손과 어깨 위에서 하얗게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프트 발동의 표시.
이어서 허공에 빛무리가 생겨나 뭉치더니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대륙의 중앙, 엘랑키아와 그룬발트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지도의 모습이었다.
엘랑키아의 귀퉁이 여기저기가 빛난다. 최근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과, 그 과정에서 엘랑키아가 얻은 영토와 이권 등을 표시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기프트로 허공에 빛의 지도가 그려지자, 선제후들의 시선이 싫어도 집중된다.
“최근에는 내전의 위기도 있었다고 하나, 무사히 봉합이 된 모양이오. 게다가 새 국왕은 젊고 건강하오. 최소한 앞으로 30년은 막힘 없이 통치할 수 있겠지.”
그가 다시 손을 흔들자, 허공의 지도가 서서히 사라진다.
“엘랑키아는 앞으로 거침이 없을 것이오.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고, 분명 지금까지 처럼 작은 전쟁에서 조금씩 점수를 벌어가며 타국을 압박하겠지. 이걸 막을 건 우리 그룬발트밖에 없지 않겠소?”
분위기는 바뀌었다. 분위기는.
명백하게도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제시한 문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선출에 동의할 정도로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 것 같다.
“라오리스 공, 비젤키르헨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황제 선출에 가장 적극적이지 않았소?”
더욱 답답해진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시종일관 아무 말도 없이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있던 비젤키르헨의 선제후를 지목해 말을 건다.
“그건···.”
라오리스라 불린 비젤키르헨의 선제후는 잠시 눈가를 찌푸린다. 그는 회의실의 선제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마치 소년처럼 보이는 엘프였다.
그 질문은 다른 선제후들 역시 궁금해하던 질문인지, 모두의 이목이 쏠린다.
“...우리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소. 다만··· 개인적으로는 함께 해 주지 못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
“무슨 사정이오? 혹시 우리가 도와서 해결할 수 있는 사정이라면···.”
“그건 아니고. 우리 가문이 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요.”
“...알겠소이다. 부디 잘 해결하길 바라겠소.”
단호한 대답에, 어느정도 짐작가는 점이 있는 듯 카젤하겐의 선제후는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된다.
결국, 탁자 위의 두루마리는 여섯개에서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로.
이번에도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는 선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