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69화 (369/556)

39-2.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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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도 베르마유 왕궁에서 진행되는 어전회의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서로의 의견이 오가고 논리와 논리가 충돌하는 토론이라기 보다는, 각 부서 담당자들이 각자가 준비해온 내용을 보고하는 자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국왕 다고베르 2세는 다소 방만한 경우가 많았던 평소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로 대신들의 보고와 의견을 집중해서 듣는다.

평소라면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가 적절하게 제어를 해 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다. 아마도 그런 점이 국왕을 평소보다 긴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성 서측 성벽 일부가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런 것 까지 폐하께 보고드릴 필요가 있는 것이오?”

“그게··· 6년 전 비가 많이 내렸을 때 무너졌던 부분이 다시 무너졌습니다. 조적공을 불러 수리를 의뢰했더니 주변 성벽들 모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허어··· 전면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라 하던가요?”

“예, 아시다시피 내성벽은 500년 넘게 보수한 적이 없어서···.”

다고베르 2세는 보고를 받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대륙 최강국 중 하나인 엘랑키아 왕실의 현실이 이 모양이다.

국경을 확장하고 지키는 데 너무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기에, 정작 국왕이 사는 본진의 담벼락이 무너지는 데도 전전긍긍할 정도로 가난했다.

물론 고치고자 하면 어려울 것은 없겠지. 어떻게든 예산은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그 예산은 또 그만큼 중요한 어딘가에서 끌어 온 여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국정 운영을 엉망으로 했다고 호통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최근 심각한 재정지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국왕 본인이 적극적으로 시작했던 나우데사와의 북방 전쟁에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얻은 나우데사와의 국경지대가 지금은 새롭게 요새 지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양성하느라 돈 먹는 무저갱이지만, 언젠가 안정이 되면 훌륭한 왕실의 안정적 수입원이 될 것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돈이 없다. 누가 뭐래도 돈이 없다.

당장 국왕 자신도 내탕금을 왕실군 운용에 거의 다 쓰고 있었으며, 왕비와 자식들에게도 검약한 생활을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왕실의 돈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고 라솔과의 이스키비르 전선 방어를 남부 영주들에게 떠넘긴 뮈르텔 재상의 판단은 정말 훌륭했다.

애초에 딱히 끌리지도 않는 법황의 성전 선포를 따랐던 것도 블랑독을 실질적으로 왕실 영지로 삼으려던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블랑독의 수입은 국가 재정에 잡히지도 않고 있었고, 이제서야 진짜 엘랑키아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일 정도니.

앞으로 라솔과의 전선에 들어갈 막대할 비용을 생각하면 ‘성전에서 적절하게 패배하고’ 블랑독 영주들의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은 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 우선은··· 베르마유 경비대 증강 비용을 아껴서 내성 수리를 우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최근 베르마유의 치안 상태가···.”

갑자기 왕도 베르마유가 몰락하여 치안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베르마유의 경제는 활황이었다. 대륙 중앙의 진주라고 빗대어 부를 정도로,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였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외부 인력이 많이 유입되다보니, 뜨내기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늘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시가지 영역 자체가 넓어졌기에 경비대 인력을 확장할 필요성도 있었고.

“경비대 증강은 내년으로 미룹시다. 대신 왕실군과 근위대의 도시 순찰을 좀 더 늘리도록 하겠소. 홍보 효과도 있고, 대기하는 녀석들에게도 좋은 일거리가 되겠지.”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폐하.”

다고베르 2세가 심드렁한 말투로 말하자, 걱정으로 찌푸려졌던 궁내부 장관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하지만 임시 방편이다. 왕실군은 왕궁 경호나 하는 부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앙이 보유한 기동 전력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들이 베르마유 시내를 순찰이나 도는 것은 병력 낭비가 분명했다. 언제까지나 왕도에 머물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하지만 그와 반대로 확실하게 효과는 있으리라.

화려한 갑옷으로 온 몸을 무장한 ‘국왕의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시내를 돌아다닌다면, 근처에서 사고를 치려던 자들은 한 번 더 고민할 가능성이 높았으니.

“그러고보니 최근 주디칼리의 철면 은행이 엘랑키아 남부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흐음, 우리 엘랑키아에 지점이라도 만들고 싶은 걸까요?”

“그런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나라의 문을 열어준다는 것은··· 흐으음···.”

“하지만 그들의 황금이 급히 필요할 때가 생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작년에는 알디온 왕실도 왕세자의 성인식을 화려하게 치르기 위해 철면 은행에서 금화를 빌렸다고 하니까요.”

“허허, 그것 참···.”

다고베르 2세 역시, 철면 은행에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 위험도 없이, 채무자들의 고혈을 빨아 자기 배만 불리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정말로 다급하게 금화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철면 은행이라는 ‘선택지’를 예비로 남겨두기로 한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올해 가뭄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나마 베르마유 인근 사와르 강 유역은 상황이 좀 괜찮았지만, 중부와 남부는 농사를 망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니까요.”

“저도 영지에서 온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식량난이 발생할지도 모를 지역에는 비축 곡물을 풀기로 했습니다. 다만··· 최대한 아끼기는 했습니다만 이것 때문에 왕실의 곡물 비축량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건 또 큰 일이었다.

곡물 비축은 국가의 중대한 사업이었다. 이번 처럼 가뭄으로 인해 수확량이 예상에 못 미칠 때도 유용하게 쓰이지만.

전쟁 등으로 인해 대량의 물자가 필요한 경우 가장 먼저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특히 전쟁이 벌어지면 곡물을 비롯한 식량의 가격이 치솟게 마련인데, 여기 대응할 수단이기도 하다. 나라의 곳간이 비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흐음, 보고서를 보면 대부분의 비축 곡물은 중부 지역에서 사용이 된 것 같소만. 정작 작년부터··· 전쟁 상태였던 남부 지역은 상황이 괜찮다는 말이오?”

서류를 살펴보던 다고베르 2세가 묻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쳐들어갔던 땅인데 괜찮냐?’라는 것이지만.

다만 질문 자체는 타당한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군대가 오가는 지역이 황페해지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군대가 약탈을 하지 않더라도, 불안해진 농부들이 농작물을 돌보기 어려워진다. 수확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평소처럼 열심히 농사를 짓지도 않기 쉬웠고.

그런데 올해에만 성전군과 라솔군의 2연타를 얻어 맞은 남부 지역은 식량 사정이 안정적이라는 것인지.

“예, 다행히도 블랑독 지역의 식량 사정은 꽤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었고, 대부분 내부적으로 해결한 모양입니다.”

“허어, 그걸 누가 해결했다는 말이오?”

“그것이··· 아마도 작년부터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이 주디칼리로부터 막대한 곡물을 수입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트랑카벨이라면, 이번에 블랑독의 관리자로 승격된 그 자작가 말이오?”

“예, 주디칼리와의 무역으로 대단한 부를 쌓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게다가 가문의 금전출납을 담당한 가문의 장녀가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고 합니다.”

“장녀? 그··· 이단의 성녀 소리를 들은 영애 외에 다른 딸이 있었다는 말이오?”

“그··· 이단의 성녀라 불리는 자작영애가 맞습니다. 주디칼리에서 대학을 나온 재원이라고 합니다.”

대신들이 탄성을 지른다. 상상도 못했던 내용에, 다고베르 2세도 꽤나 놀랐다.

다소 과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유능한 인물이 있다면 발탁해 와서 왕실의 재무 관리자, 아니 부재상으로라도 앉히고 싶었다.

그나저나 자력으로 식량부족을 예상하고 해결했다니, 돈도 돈이지만 훌륭한 통찰력이다.

당장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던 군사 귀족들도 전쟁하라고 하면 병력과 무기, 전술 부분만 신경쓰지 병참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이 천지인데.

재상이 돌아오면 한 번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

“어쨌든, 곡물 비축에 대해서는 가뜩이나 가뭄이 심했던 ‘올해’는 아직 대응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차후에는 비어버린 만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심하고 있으리다.”

“감사합니다, 폐하.”

다행히, 이번 안건은 돈이 나갈 일이 아니었다. 미래, 아마도 내년에는 나가야 할 돈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이 별 것 아닌 사실이 빠듯한 예산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 중인 국왕과 대신들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다음은··· 이번에 도착한 뮈르텔 재상 각하의 보고서에 대한 건입니다. 대 라솔 전선과 남부 영주들의 복속에 대한 내용이 되겠습···.”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예, 폐하?”

다고베르 2세는 재무대신의 보고를 중간에 끊었다.

“재상이 보낸 보고서 내용에 혹시 우리 논의가 필요하다거나, 혹은 당장 판단이 필요한 내용이 있소이까?”

“음··· 아닙니다, 폐하. 제가 먼저 읽어본 결과로는 거의 모든 일을 재상 각하께서 마무리하셔서, 그 결과를 폐하께 보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휴우, 그거 정말 다행이군.”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역시 뮈르텔 재상이었다. 직접 나선 이상, 큰 문제가 없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아마 그렇게나 깔끔하게 일을 일단락 짓고 보고를 올린 이유는, 그가 부재한 왕실에 발생할 업무 공백을 고려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럼, 재상의 보고서에 관련된 건은 본인이 돌아오면 직접 보고를 듣는 것으로 합시다. 짐도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일을 두 번 할 필요는 없어 보이니.”

“폐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는 국왕으로서 재상에게 가진 절대적 신뢰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진짜로 시간이 너무 없었다.

왕도 베르마유가 발전하고, 엘랑키아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왕실에 집중되는 책임도 갈수록 과다해지고 있었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회의와 보고로 업무 시간을 다 쓰다보니 잠 잘 시간도 부족하다는 불평이 슬슬 들려올 정도였으니···.

게다가 재상이 한 일에 문제가 발견되어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면, 결국은 또 재상이 있어야 했다. 차라리 그때 가서 모든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도록 하자.

아마도 그럴 일 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그럼 대 라솔 전선과 남부 영주들에 대한 일은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북방··· 나우데사에 관한 건이 남았습니다.”

“으으으음···.”

“나우데사라···.”

나우데사 연방의 이름이 나오자, 국왕을 포함한 어전회의 참석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분명 나우데사 대책은 북방 전쟁에 승리하고, 변경 지역에 요새 지대를 건설하면서 마무리가 되었어야 했다.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 기어코 전쟁에서 이기고, 그 승리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막대한 지출을 감내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간신히 만든 안정이 다시 무너진다면, 그래서 새로운 전쟁을 해야 한다면···.

정세로 보나 재정으로 보나 그건 파탄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미 나우데사 정세는 파탄 상태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오?”

“이소브론 대공은 실각 직전입니다. 사방에서 뇌물을 받아 먹어도 너무 많이 받아서 뇌물을 준 사람이나 안 준 사람이나 불만이 극에 달했다고 하더군요.”

뇌물을 너무 받은 끝에, 나눠줄 이권이 부족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욕심이 너무 많아 나눠줄 이권조차도 자신이 독점했을지도 모르고.

이소브론 가문의 친척들이 하나같이 빠르게 큰 부를 긁어 모았다는 것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아마 다음 연방 의회에서 결정이 나리라 생각됩니다. 이소브론 대공이 의장 자리를 내려 놓는 것은 기정사실, 그리고 다음으로 정권을 잡는 것이 누가 될지가 관건이겠습니다.”

“흐음···.”

“게다가··· 그 배후에는 그룬발트가 있으니까요.”

“그 산적 녀석들이!”

엘랑키아를 극도로 증오하는 비르케제 공작이 세력을 다시 되찾게 된다면 평화 조약을 백지화 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 후원자가 그룬발트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고.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소?”

“저희 공작원들은 대부분 이소브론 대공에게 공을 들였던 참이라···.”

“그래, 그거 아쉽군.”

경악한 얼굴의 대신들과 다르게, 다고베르 2세의 표정과 말투는 묘하게 평온하다.

“나우데사나 그룬발트 놈들이 전쟁을 다시 원한다면··· 엘랑키아는 거기 응할 뿐이오.”

“예···.”

이번에는 진심으로, 다고베르 2세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누가 봐도 참고 견뎌야 할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남이 도발해온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랑키아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라솔과의 전선을 틀어 막은 이상, 과거에 비해 상황이 나쁠 것도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나우데사와의 국경 지대에서는 긴급 전령이 왕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우데사에서 이미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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