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68화 (368/556)

39-1. 고요함

###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만!”

“어서 와! 어서 와! 어이구, 우리 수도사님 고생해서 얼굴이 다 상했구먼!”

“이걸 어째 어휴, 다친 덴 없구?”

트랑카벨 군을 따라, 라솔과의 전선에 종군했던 아르옌 그로반 수사는 마침내 마음의 고향, 아넥시로 돌아왔다.

함께 사선을 몇 번이나 넘었던 주민들이 환영해주는 와중에, 스승인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사제의 두 손을 굳게 맞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승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본 아르옌 수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랜 원정에 이어 여행이 고단했는지, 움푹 들어간 데다가 거칠거칠해진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내린다.

“정말 잘 왔네, 아르옌 수사.”

“평안하셨습니까. 다치신 데는 이제 괜찮으십니까?”

“그야 물론이라네! 잘 먹고 잘 지내다 보니 살까지 이렇게 쪄서 자네에게 미안할 정도구만, 핫핫핫!”

아르옌은 환영해주는 주민들과 함께 도시로 돌아간다.

치열했던 2차 아넥시 공방전이 끝나고 몇 달이나 흘렀을까. 아르옌 자신이 스승의 허락을 받아 고향을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아르옌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아넥시는 성전군의 공성포에 맞아 성벽에는 멀쩡한 구간이 거의 없었고, 성벽에 가까운 건물들도 모조리 파괴된 상황이었다.

시체는 치웠다지만, 블랑독 연맹군의 기병 돌격에 궤멸당한 성전군이 남기고 간 흔적, 진영지나 바리케이드의 흔적 등은 확연하게 남아 있었었다.

무엇보다, 돌더미로 아예 틀어막아 성전군 공성 특공대의 페타드 공격을 무효로 만들었던 성문 주변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폐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아넥시는 그렇지 않다.

심하게 무너진 부분은 어쩔 수 없었겠으나 성벽 여기저기는 흉하지 않을 정도로는 수리되어 있었고, 주변 개활지도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바뀐 것은 도시의 분위기이다.

처음 요한과 아르옌이 도착해서 치열한 공방전을 싸워냈을 무렵의 도시는 비장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였으나, 지금은 한결 열린 느낌이다.

실제로도 과하게 환영받고 있었지만.

“그럼 스승님이랑 이야기 하고, 저녁에는 우리 다 같이 환영회를 열자고?”

“피곤하겠지만 꼭 내려와서 한 잔 하게!”

주민들의 환영을 뒤로 하고, 요한 사제는 제자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지내고 있는 방은 바위 언덕 비탈에 달라붙듯 지어진 소박한 벽돌 집이었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 안에는 침대와 탁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벽을 따라 나란히 늘어서 있는 도끼와 삽을 비롯한 각종 공구는 완벽하게 손질되어있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모습이, 공구의 본래 역할을 할 때도, 혹은 감히 아넥시의 성벽을 타고 넘으려는 무도한 자들의 머리통을 부술 때도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싸워 지킨 이 아름다운 시골 도시의 최고 장점이 뭔지 알겠나?”

“무엇입니까, 스승님?”

“바로 끝내주는 포도주가 저렴하다는 것이라네! 이 가난한 주신의 종도 아쉽지 않게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예....”

“하하하핫! 농담이니 정색하지는 말게! 전장에 유머 감각을 놓고 돌아왔는가?”

떠나기 전에도 자신에게 특별히 유머 감각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하면서, 아르옌은 군소리 없이 스승이 따라주는 잔을 받았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몸에 알싸한 포도주가 깊게 스며든다. 술이 이렇게 달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피곤하기 때문일지, 반가운 스승님을 만나 잔을 나누게 되어서일지.

이대로 마시면 정신없이 취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잔을 내려 놓는다.

“그래, 멀리 서쪽에서는 주신께서 내리신 자네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던가?”

“아뇨··· 아닙니다, 스승님.”

“허어, 어째서?”

“저는··· 이번에는 총을 잡지 않았습니다.”

“아하, 그랬군!”

그 말 대로였다.

잘 손질된 총을 기름종이로 싸서 조심스럽게 가지고 갔지만, 한번도 그 꾸러미가 전장에서 풀리는 일은 없었다.

트랑카벨 가문의 호의로, 아르옌은 객원 군속으로서 트랑카벨 영지군 내에서 어떤 포지션이든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포지션은 다름아닌 트랑카벨 의무대였다.

이제는 베테랑이 되어버린 군의관과 간호사들과 함께 의료품을 옮기고 부상자를 돌보았다.

수도원과 방어 교회에서 배웠던 각종 의료 기술도 도움이 되었지만, 의무대에서도 힘이 필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덕분에 성실하고 일머리도 있는 아르옌은 의무대에서 환영 받는 존재였다.

이대로 의무대를 돕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전장에 나가 총병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겠다··· 라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생뢰르반 전투가 시작었다.

전에 없이 치열한, 대규모 전투에 아르옌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평원을 가득 채운 아군과 적군이 격돌한다.

당연히 부상을 입어 실려 오는 병사들의 수도 끝이 없었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열한 격전에서 실려오는 병사들의 상처는 실로 끔찍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손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처를 입은 병사들을 능숙하게 대처하는 군의관들을 보며, 아르옌은 그저 부상자를 옮기고 부축하는 것 외에는 도울 방도가 없었다.

그가 가진 기초적인 응급처치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상자는 애초에 전장을 떠나지도 않는다.

다시 상처를 싸매고 무기를 쥔 채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과 맞서는 쪽을 택할 테니까.

결국 전장에 어둠이 내려 전투가 끝난 이후에야, 아르옌은 피냄새와 화약냄새로 코가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군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건만, 그의 양 손과 앞자락은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몰랐습니다··· 전투는 끝났지만 야전병원의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것 참··· 고생하셨구만. 하지만 값진 역할이기도 하지.”

당연히 전투가 끝난 이후 실려오는 부상자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아비규환의 시체더미에서 아직 숨이 붙은 채로 발견된 중상자들은 늘어만 갔다.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야전병원에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삶을 얻었고, 또 많은 이들이 삶의 마지막 숨결을 힘겹게 몰아쉬기도 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야전병원을 지키던 그가 쉴 수 있었던 것은 다음 날 해가 뜬 이후였다.

“저는··· 제가 원했다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하지만 야전병원에서도 자네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나?”

“맞습니다. 실제로 군의관이나 간호사분들이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자리를 비우기 곤란했던 것도 맞고요.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흐음, 설마 이제 와서 전투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 테고.”

“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답에 요한 사제가 빙긋 웃는다.

애초에 전투를 앞둔 도시, 그것도 몇 십 배는 되는 적에게 포위 당할 것이 분명한 도시에 스승과 함께 일부러 찾아 들어간 두 사람이다.

정작 도시 주민들 조차 이번에는 끝까지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는 분위기에서, 오히려 주민들을 설득해 구원군이 올 때까지 싸웠던 두 사람이다.

농담으로라도, 전투가 겁나서 자리를 피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역시··· 으음, 문제는 방어 교회의 서원이었나?”

“...맞습니다, 스승님. 역시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언제나 고지식해 오히려 못난 스승을 가르치던 아르옌 수사가 아닌가?”

“그, 그런 말씀은···.”

방어 교회는 주신교의 종파이되 종파가 아니다.

그들이 주신교의 다른 신도들과 갈라져 나온 이유는 교리 해석에서 이견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당연히 주신교의 성직자로서 교단에 가지는 순종의 의무를 거부하고, 종교를 이유로 탄압받는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겠다 서원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단, 순종의 의무를 어길 뿐 아니라, ‘타인의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또한 교리에는 크게 어긋나는 행위이다.

게다가 방어 교회 자체가, 무력을 가진 스스로가 타락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몇몇 기사단이 그렇듯, 신의 이름을 등에 업은 용병대 따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때문에 방어 교회 소속의 성직자들은 모두가 까다로운 전투 수칙을 지키기로 맹세한다.

오로지 ‘종교적 이유’로 탄압받는 약자들을 위해서만 싸울 것.

탄압받는 약자들과 그 삶의 터전을 지키는 방어전에만 참여할 것.

불리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힘을 보태지 말 것.

이러한 전투 수칙들은 방어 교회의 성직자들을 얽매고 있었다. 본래 힘을 가지면 안 되는 이들이 힘을 가졌기에, 더욱 그 힘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듯이.

아넥시에서의 전투는 이 수칙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힘껏, 주신께서 영혼을 거두어가는 그 순간까지 후회 없이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생뢰르반 전투는 조금 달랐다.

물론 처음에는, 스승의 허락을 받아 아넥시를 떠날 때만 해도 약자들을 위해 전선에서 싸울 생각이었다.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던 트랑카벨의 정순파를 위해서, 라솔의 종교 기사들에게 트집 잡혀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이스키비르 강가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지만··· 갈수록 방어 교회의 스승님들 앞에서 주신과 마주해 세웠던 서원이 아르옌의 마음을 옭아맸다.

분명 전혀 정당하지 않은 전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정당화를 하다 보면, 결국은 방어 교회에서 그렇게 경계했던 ‘신의 이름을 등에 업은 용병’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무기를 들기가 어려웠다.

만약에 적이 야전병원을 습격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형편에 따라 맹세를 고무줄처럼 다루는 자신이 보여 더더욱 부끄러웠다.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허허허, 그거 참 고생이 심했겠구려···.”

“예··· 스승님.”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 아르옌 수사는?”

“...그걸 모르겠습니다.”

“허허.”

방어 교회는 신앙심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가는 성직자들 중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기준을 세운 이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단순히 새로운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닌, 혼란한 시기에 주신을 따르는 성직자로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제자를 본 요한 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까웠다.

방어 교회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한 삶의 기준을 세운 이들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신념을 흔들게 된다면··· 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조건 신앙과 순종만을 강요하며, 실상은 세상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겉만 번지르르한 교단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란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주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르옌 수사, 자네는 이번 고행에서 주신께서 내리신 역할을 찾아 낸 모양이네.”

“예? 아닙니다, 스승님. 저는 오히려 혼란에 빠져···.”

“아닐세. 일단은 환속하도록 하게.”

“스, 스승님?”

아르옌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환속이라니··· 성직자에게 속세로 돌아가라는 말은 파문이라는 말과 진배 없다. 자신의 번민이 그 정도로 큰 죄였다는 말인지.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쫓아낸다는 말이 아닐세. 그저 잠시, 수도사의 삶을 내려놓고 주신께서 내리신 역할을 수행하러 ‘다녀 오라’는 말이지.”

“하지만··· 이는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가···.”

“허허, 이 사람! 애초에 우리는 교단이나 법황 성하 입장에서는 다 같은 배신자야!”

“네, 스승님···.”

힘들어하며 고개를 떨구는 제자를 보며, 요한 사제는 인자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감히 하는 말이네만, 자네나 나 따위가 주신을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네. 우리가 걷는 길은 모두 주신께서 예비하신 길이며, 우리네 따위가 다소 번민한들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니.”

“...온당하신 말씀입니다, 스승님.”

“자, 그러니 우리 ‘아주 잠시’ 헤어지도록 하지. 잠시 떨어져 있는다 해도 자네는 내 제자이고, 나는 자네의 스승일지니.”

“...그래도 됩니까, 스승님?”

“물론! 까짓 성직이 뭐 대단한 거라고! 오히려 거기 금테 두르고 대단한 척 한 결과가 현 교단의 타락이 아니던가! 환속? 그거 열 번이든 백 번이든 마음대로 하게! 백 한 번째에 돌아와도 이 못난 스승은 언제라도 받아 줄 터이니.”

“스승님···.”

아르옌은 참던 눈물을 터뜨린다. 역시 그의 스승만큼 자신을 잘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인가? 대략 결심한 바가 있으니 고민한 것 같은데.”

“지금 카르카냑에서는 트랑카벨 영지군의 사수를 선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 참여해 보려고 합니다.”

“오호, 좋네! 자네의 재주는 실로 주신께서 내린 것이 틀림 없음이니.”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잠시 그룬발트로 돌아갈 생각이네. 나도 스승님께 보고하고, 향후 정세에 따라 또 활동할 곳이 정해지지 않겠나?”

“예, 스승님.”

요한은 제자의 잔에 포도주를 마저 따라준다. 자신은 이미 세 잔 째 연거푸 마신 참이었다.

“그보다 빨리 가도록 하게! 이게 군대란 성직자 조직과도 같아서, 모든 게 짬순이라네! 짬에서 밀려 어떤 수모를 당할 지 모르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