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67화 (367/556)

38-8. 새로운 블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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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남부에서의 일은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뮈르텔 드 생프랑보, 엘랑키아 왕국의 재상인 그는 아마도 이번 건에 관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상념에 잠겼다.

최근 10년 간, 거의 왕성에서 나간 적이 없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출장은 잘 한 일이다. 만약에 자기가 직접 찾아오지 않고 보고서와 수치만 가지고 판단했다면 절대로 지금처럼 합리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으리라.

영토와 백성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살핀 것도 중요한 성과였고, 특히나 남부의 요주의 군주들을 직접 만나 대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겨우 며칠 만나 회의를 함께하고 밥을 같이 먹은 정도로 인간을 ‘알았다’고 말하기는 다소 성급할지도 모른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있고.

왕궁을 너무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늦어도 다음 주에는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으니 마음 편하게 귀환길에 오를 수 있겠다.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사실상 반독립 상태였던 변경의 블랑독을 명실상부한 엘랑키아의 일부로 흡수했다는 것.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확고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이겠다.

‘남부의 드 레뮤즈 백작가와, 트랑카벨 자작가를 위시한 블랑독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 하지만 향후 이들 남부 영주들에 대한 정책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

보고서의 마무리에 조심스럽게, 지금 머리속에 있는 기대와 걱정을 섞어 적어 넣는다.

일단 복속시키고 나름의 역할을 맡기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할 때라는 것이 재상으로서 그의 생각이다.

드 레뮤즈나, 트랑카벨이나 왕실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시키려 하면 강해게 반발할 것이다. 그게 자신들에게 이득이든 손해이든.

설마 왕국에 반기를 들고 적대 행위까지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뭐가 되었든 맘에 들지 않는다면 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지. 하더라도 뻔뻔하게 태업, 왕실은 절대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니들 마음대로 하고 대신 딱 이것만 지켜 달라, 이건 어차피 너희에게도 필요한 일이 아니냐’ 식으로 살살 달래는 것이 맞았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도, 국왕이 직접 이끄는 왕실군의 전열에 끼워 넣는 것은 힘들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대 라솔 전선을, 이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내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한편, 뮈르텔이 데리고 온 재상부의 유능한 조사원들과, 재무부에서 파견 온 마찬가지로 유능한 재무관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블랑독의 토지 조사를 마무리했다.

낯선 땅이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영주들의 반응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제 와서 국왕 노릇하고 세금 걷겠다며 찾아온 인간들이 예뻐 보이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드 레뮤즈 백작가와 트랑카벨 자작가가 적극적으로 협력했기에 가능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건 수십년 전 엘랑키아 건국 초창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다들 겪었던 일이다.

어설픈 관습법과 스스로의 힘 외에는 아무것도 기댈 것 없던 지방 영주들이 불안한 지위에 왕실의 광휘가 닿는 것이다.

자신이 통치하는 땅을 내 후손이 무사히 물려받을 수 있다··· 라는 확신,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상위 군주의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요소이니까.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군대를 보냈던 왕실이라는 분명한 치부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서로가 가급적 언급하지 말자는 분위기이다. 다행스럽게도.

새롭게 영지의 지도를 그리고 농토의 규모를 측정하면서 다소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웃 영주 끼리의 영토 분쟁, 조사관과 영주 사이의 분쟁들.

이는 대부분 왕실에서 향후 기술자를 파견해 우물을 파 주거나, 관개 사업을 도와 주겠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당장의 작은 욕심을 포기하고, 장기적인 생산력의 증대를 선택한 것이다.

···혹은 그냥 기회 있을 때 심술을 부려 봤다가 못 이기는 척 양보하는 척 했을 수도 있고.

영지 개발 이야기를 하자면, 블랑독은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역의 넓이에 비해서 인구도 적고, 토착 영주들의 세력도 작았다.

이런 땅에서 대체 어떻게 트랑카벨과 같은 별종이 태어났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역대 트랑카벨의 군주들 중 단 한명이라도 영토 욕심을 냈거나, 정세를 읽는 감각이 없었다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외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수입을 제하더라도, 이미 트랑카벨 가문이 보유한 4개 자작령의 세력만으로도 나머지 블랑독 영주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혹시라도 영토 욕심 강한 인물이 가문의 주인이 되어 강욕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금이든 무력이든 사용해서 블랑독을 통일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었으리라. 거기 더해서 ‘블랑독의 백작’을 자칭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실제로, 블랑독 전체를 단일 가문이 통치한다 가정하면, 이는 명목상 상위 군주인 드 레뮤즈 백작가보다도 세력이 강해진다.

하지만··· 세력이 강하다는 것이 반드시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드 레뮤즈를 군사적으로 찍어 누른다고 해도, 이는 왕실의 관심을 끌었겠지.

아니, 왕실까지 갈 것도 없다. ‘근본도 없는’ 변경의 귀족 나부랭이가 백작위를 자칭하며, 건국 8대귀족 중 하나인 드 레뮤즈를 무력으로 위협했다.

아마 이것 만으로도 사방에서 포위당해 가문이 완전히 사멸할 때까지 얻어 맞았으리라.

···조금만 삐끗했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는데, 적당한 선을 잘 지키고 욕심도 부리지 않아 몇 백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과거사야 어찌 되었든, 앞으로 블랑독은, 그리고 왕명으로 블랑독의 관리자가 된 트랑카벨 가문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직 미개발로 버려진 지역이 많기에 일단 개발에 들어가면 그 격차는 괄목할 수준일 테니까.

거기에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되었으니··· 소유권이 애매하거나 개발해 봤자 유사시 지킬 수 없다 생각된 외딴 지역도 개발할 이유가 충분하다.

굳이 중앙 정부에서 우물이나 관개 기술자를 보낼 필요도 없겠지. 트랑카벨은 기술도 차금도 이미 가지고 있다. 필요했던 것은 의지와 정통성 뿐이었고.

그렇게 트랑카벨은 갑자기 지역의 강자가 되어 버린다.

이를 걱정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사실 어전회의에서는, ‘상위 관리자 가문의 통치를 받는 관리자 가문’이라는 어정쩡한 포지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의견이 있었다.

차라리 트랑카벨 가문에 백작위를 내려, 드 레뮤즈 백작가와 경쟁을 시키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만약 드 레뮤즈 백작가가 완전히 블랑독을 통제하게 된다면··· 실제로 그 세력은 왕실이 직접 나서도 어떻게 하기 힘든 수준이 되기는 할 테니까.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정작 고삐가 풀려버린 트랑카벨 ‘백작가’가 드 레뮤즈 보다 골칫덩이가 되면 어쩌나 하는 의견도 있었다.

당사자들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생뢰르반 군의 사령관과 참모장 직위를 두 가문에 나눠준 것은 그 논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군을 통솔하는 권위와, 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실무자를 서로 다른 가문에 나눠준다.

그럼 군 사령부의 결성과 운영에 대해 두 가문은 다툴 수밖에 없고, 거기서 오는 미묘한 균형이 분명 왕실과 중앙에 이득을 가져 오리라는 계산이었다.

사실 뮈르텔은 그런 논의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군주란 모름지기 가신의 성장을 기뻐해야지, 두려워하면 안 된다··· 가 그의 생각이었다.

반역을 기도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단계에서 위험 분자로 몰아간다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로 유력한 귀족을 심증만으로 몰아 붙였다가,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 생각한 끝에 진짜 반란이 일어난 사례가 역사 속에는 적지 않다.

또 블랑독 주변에는 큰 세력을 가진 영주가 그 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전쟁에서 영지의 절반 이상을 잃었으나, 여전히 블랑독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드 누아 백작가가 있다.

그 주인인 가스텔 드 누아는 블랑독을 하나로 묶는 데에, 그리고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의 관계를 조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들었다.

뮈르텔은 그래서 가스텔 백작에게도 어느정도 힘을 실어 줄 생각이었다. 그는 분명 라몽과 아롱드가 너무 멀리 가려 할 때 안전장치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

실제로 생뢰르반 전투에서도 드 누아 영지군이 활약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 두 가문은 미처 왕실이 제대로 나서기도 전에 알아서 국경을 침범한 라솔 군을 훌륭하게 격퇴해 낸 직후가 아니던가.

상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는 이유 만으로 견제하는 것은 통치자의 자세가 아니라 생각했고, 다행히 다고베르 2세 폐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실제로 남부에 도착해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뮈르텔의 개인적인 판단은···.

일단 라몽과 아롱드 두 귀족은 절대로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재상직을 걸고, 명예를 걸고라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두 명이 각자의 세력을 연합해 하나의 거대한 지방 정권을 세워 중앙을 위협하는 경우의 수 역시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원래 여러가지 첩보를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가문은 물과 기름이다. 사이 좋게 섞이는 경우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생뢰르반 군을 무사히 편성하여, 향후 분명히 벌어질 라솔의 침략 전쟁을 막아낼 수는 있느냐··· 고 묻는다면.

이건 확실하게 수행해 낼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중앙 정부에서는 남부 지방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 오히려 중앙에서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려 들면 반말만 더 강해질 것.’

이렇게, 보고서에 한 줄을 추가해 넣는다.

여러모로 라몽 드 레뮤즈 백작, 그리고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은 독특한 사람이다.

베르마유와 그 주변의 북부 귀족들을 모조리 조사해도,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 없으리라.

인간이 아예 다르니, 아예 다르게 접근하자··· 이런 괴상한 정책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만 해도 그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다만···.

다만 명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그 용병대장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이었다.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평생을 행정에 바쳐온 뮈르텔은 군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름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자부하고 있었고, 군사 이외 분야에 대해서도 재능과 지식이 있는지는 대화를 통해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레뮤즈 성을 방문했을 때도, 블랑독을 방문했을 때도 에트라는 이름의 용병대장은 자리에 없었다.

일국의 재상 입장에서 얼마든지 소환하여 면담을 해볼 수는 있었겠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호기심은 공적인 입장에서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낭비한 며칠이 현장에서 어떻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노릇이니.

게다가 재상 자신도 더 이상 왕성을 비우기에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분명 지금쯤, 영명하신 다고베르 2세 폐하께서는 업무의 산에 짓눌려 계시겠지.

재상부의 유능한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생각은 하지만, 결국은 윗사람의 판단을 요하는 일은 하루에도 수십 건이나 있을 테니까.

아쉽지만 호기심은 여기서 접고, 어서 왕도로 돌아가기로 하자.

일이 얼마나 쌓여 있을지, 또 얼마나 꼬여 있을지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특히 나우데사의 북방 문제는 제발 자신이 관여할 수 있을 때까지 조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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