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새로운 블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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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간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았던, 블랑독을 포함한 엘랑키아 남부에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고요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설령 그게 일시적인 평화일지도 모른다 해도 그 가치가 폄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피할 수 없는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 기간이고 하더라도.
느린 듯 빠른 듯 지나가던 계절은 어느새 가을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인해 농경지를 돌보기 힘들었던 데다가, 올해는 심하게 가물었기 때문에 풍요로운 수확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통에 흔히 생기기 쉬운 지역 전체에 만연한 기아 상태가 생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최소한, 블랑독이나 드 레뮤즈 영지에 정말로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통치자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아쥬흐는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통치자가 해야 할 최저한의 역할이 분명하였으니.
물론 전쟁에 대비해 충분한 물자를 준비하고, 물류 유통망을 유지하는 데도 신경 썼던 것은 중요한 역할이다.
그렇다 해도 반드시 고맙다고 해야 할 상대가 하나 있다.
바로 콘도티에레 에트였다.
연이어 벌어진 전쟁을 매우 빠르게, 그것도 승리로 끝마쳐 주었으니까.
아무리 유리한 전쟁이라 해도 오랜 기간 질질 끌었다면 농지의 황폐화는 피할 수 없다. 설령 군대가 오가며 농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농지가 버려지면 1년 까지는 몰라도, 2년 이상이면 복구에 큰 노력이 들고 더 오래되면 사실상 새롭게 개간하는 셈이라고들 한다.
그걸 피할 수 있었기에 블랑독은 그럭저럭 최앙의 재앙을 겪지는 않아도 된다.
그런 점을 생각하니, 더더욱 콘도티에레 에트에게 고마움이 느껴지고 그 이상의 애정을 느끼게 된다···.
뭐, 워낙 바쁜 사람이라 그 애정의 일부라도 보여줄 틈은 없지만 말이다.
지금도 콘도티에레 에트는 생뢰르반 사령부 설치 건으로 출장 중이다.
아쥬흐의 친동생이자 벨모제 자작, 명목상 트랑카벨 영지군의 총사령관인 아실 역시 오랜만에 그를 꼭 만났으면 했지만 얼굴 볼 틈도 없었을 정도였다.
아실이 자칫 엇나갈 수도 있는 복잡한 시기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역시 트랑카벨 가문은 콘도티에레 에트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정말 영지 하나 정도는 내줘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콘도티에레 에트가 지금 이처럼 바쁜 이유는, 당연히 없던 사령부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왕명’ 때문이 가장 크겠지만 이제는 엘랑키아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명사가 되었다는 것도 있었다.
엘랑키아에서도 가장 낙후된 촌구석의, 시골 자작가의 대리사령관. 주디칼리에서 굴러먹던 이름 없는 용병.
그 ‘시골 자작가’가 국왕이 보낸 군대와 법황이 보낸 군대를 연거푸 격파 했을 때도, 그게 천재적인 사령관이 이룬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타국의 익숙치 않은 전장에서, 충분히 준비를 하지 않은 원정군이 ‘뭔가 어이없는 이유’에 의해 무너졌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힘 대 힘, 전술과 전술의 충돌에서 밀렸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랑키아 8대명문 중 하나인 드 레뮤즈 백작가의 군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라솔의 침략군을 격퇴했을 때 비로소 여론이 바뀌었다.
그리고 왕실에서 ‘그 시골 자작가’에 블랑독 지역의 관리자라는 직책과 신규 사령부의 참모장 자리를 내주는 파격적 인사를 감행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졌다.
대체 ‘왕실과 법황청과 라솔을 연이어 물리친 그 용병이 누구냐’ 라는 질문의 휘몰아쳤다.
처음부터 콘도티에레 에트를 전폭적으로 믿고 있었던 트랑카벨 가문으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어딘가 호사가들이 모인 살롱에 가서 외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발탁해 처음부터 믿었다!’ 라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 콘도티에레 에트를 발탁한 것은 할아버지인 아롱드 자작이며, 아쥬흐로서도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승리를 연거푸 가져올 줄은 모르긴 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나만의 작은 콘도티에레’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다소 속상하기도 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인정한 인물이 모두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다.
아무튼, 유명해지니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본인도 농담이긴 하지만 ‘여기저기서 월급 주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었고···.
확신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도 베르마유의 상인이 전달해준 첩보에 따르면, 왕실군의 원수라는 자가 콘도티에레 에트를 손녀 사위로 삼고 싶어한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이런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날파리들이 엮이면 쫓아내야지.
그 왕실군의 원수라는 노인은 샹다메리에서 패배했으면 은퇴라도 할 것이지, 왜 터무니 없는 강욕은 부려 대는지 원.
어쨌든, 전란이 조금 마무리 되었으니 한동안 신경쓰지 못했던 정보원들, 아니 ‘돈 되는 소식’을 싣고 오는 상인들과도 관계를 회복해야겠다.
정보망이 필요한 것은 단순히 콘도티에레 에트에게 꼬이는 날파리들을 감시하기 위함은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최근 카르카냑을 방문했던 카렐 드 상포리앙 소백작의 말대로, 북방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여기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멀리 북방의 문제이다. 설령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남쪽 끝인 블랑독 지방이나 트랑카벨 가문이 휘말릴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
그럼에도 나우데사는 가문에서 운영하는 블랑독 상단의 이권과 매우 강하게 얽혀있는 지역이기에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아쥬흐는 최근, 그녀에게 거대한 부를 안겨 주었던 나우데사 무역회사들의 주식을 대부분 팔았다.
갑자기 현금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도 어느정도 마무리 되어 군자금도 안정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돈 필요할 일이 뭐가 있었겠나.
다만, 나우데사 연방을 이루는 일곱 도시들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것을 예상해 샀던 주식이니, 전쟁이 시작될 것을 예상해 팔아버리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랜 앙숙이었던 이소브론 대공과 비르케제 공작의 사이가 다시 한 번 틀어졌다고 한다.
본래 나우데사는 일곱 도시로 이루어진 연방국이기는 하지만, 북부의 이소브론, 남부의 비르케제라고 할 정도로 두 가문의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비르케제 가문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고, 이소브론 가문이 사실상 나우데사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사건이란, 바로 엘랑키아에서 ‘북방전쟁’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국경을 접한 대국 엘랑키아와의 전쟁.
양측의 긴장 상황이 극에 달했을 때, 그 전쟁을 주장했던 쪽이 비르케제 가문, 화평을 주장했던 쪽이 이소브론 가문이다.
결과적으로 엘랑키아 국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투는 시종일관 수세로 몰렸으며, 결국 국경 영토를 뜯기기까지 했으니 강경파가 발언권을 빼앗기는 것도 당연했다.
하물며 종전 조약으로 빼앗긴 국경지대의 일부는 비르케제 가문의 영토이기도 했으니 세력이 쪼그라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최근 좀 다른 정보가 돌기 시작했다.
나우데사 상층부, 즉 일곱 도시의 상류층과 연방 의회 의원들 사이에 출처 불명의 투서가 전달되었다.
해당 투서는 이소브론 가문과 그 주인인 대공을 탄핵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이소브론 가문이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받았는지, 지난 전쟁에서 얼마나 비협조적으로 굴었는지.
심지어 전쟁이 패배로 끝나도록 자행했던 이적행위까지 말이다.
물론 대부분은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고, 주변에 소문낼 법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니 의회에서 직접적으로 이소브론 가문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우데사 지도층의 뇌리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는 데에는 성공했다.
아쥬흐는 멀리 북방과 거래했던 상인을 통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주식들을 팔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전으로 인해 입지를 잃고 칩거하던 비르케제 공작의 세력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갑자기 아쥬흐 양께서 주식을 팔라고 해서 놀랐습니다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군요.”
“저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요.”
지금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상대는, 주디칼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공신력있는 은행인 철면 은행의 지점장 빈첸조이다.
오랜만에 엘랑키아를 찾아온 그는 트랑카벨 가문에 배당금을 지급하고 거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카르카냑을 방문했다.
트랑카벨 가문이 소유한 블랑독 상단의 주디칼리 금융 대리인을 맡을 정도로, 철면 은행과의 인연은 깊었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담당 지점장인 빈첸조와 아쥬흐의 관계는 단순한 금융 파트너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협업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빈첸조 지점장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저 역시··· 약간이지만 위험을 분산하는 시간을 버는 데엔 성공했습니다.”
“후후, 다행이네요.”
“전부 아쥬흐 양의 통찰 덕분이지요. 갑자기 주식을 대부분 처분하신다고 하셔서 놀랐지만요.”
빈첸조는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두 사람은 모두 상당한 금융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작은 실패에도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라솔과의 전쟁 관련해서도 투자하셔서 재미를 보셨다고 들었어요.”
“하하··· 손해까지 보진 않았지만, 큰 수익도 없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에트 경이 그렇게까지 전쟁을 빨리 끝낼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러셨군요.”
금융 시장은 전쟁 소식에 민감하다. 누군가는 전쟁으로 큰 손해를 입겠지만, 누군가는 전쟁으로 큰 돈을 번다.
후자에 투자할 수 있다면 투자자 역시 돈을 버는 것이다.
전쟁, 남의 불행으로 돈을 번다.
그런 인식이 전혀 없지는 않다. 특히 아쥬흐는 전장에서 죽어가는 것이 자기 영민들이라는 사실을 뼈아프도록 느끼고 있었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다.
돈이 없었다면 대부분이 수입품인 최신형 화승총을 모든 총병에게 지급할 수도 없었다.
거리와 각도에 따라서는 총탄도 막아내는 최고급 갑주를 모든 보병에게 지급하지도 못했을 것이니까.
하루 종일 쏴도 부족함 없는 충분한 화약도, 전장에서도 최소한 배 곯을 걱정은 없는 넉넉한 병참도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와 노력으로 얻은 정보를 돈 벌기 위해 활용하는데 거리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나 빈첸조나 절대로 넘지 않는 선은 있었다.
그건 바로 전투 결과에 도박처럼 배팅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브론 대공은 그런 짓을 한 모양입니다.”
“철면 은행이 수집한 정보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최근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았던 이소브론 대공가의 측근이 털어 놓았습니다. 대공은 아군이 패배한다는 결과에 ‘배팅’을 했고, 아군이 패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정말 구역질나는 인간이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였다. 빈첸조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아쥬흐가 처음 넘겼던 정보에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이겠다.
물론 빈첸조는 자신이 속한 철면 은행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철면 은행은 금화보다 가치 있는 말 한마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제공하거나 맡아두는 것은 금화 뿐이 아니니까.
···그들이 ‘철면’이라는 이름 처럼, 간부급이 아닌 직원들에게 철가면을 씌워 업무 현장에서 발언을 제한하는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호의로 드리는 정보입니다만, 아직 확인이 필요한 첩보라는 점을 감안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명심할게요.”
“나우데사 지도층에 뿌려진 투서의 배후에는 그룬발트의 어느 선제후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선제후가 누구인지는 모르시나요?”
“그것까지는 아직은···.”
빈첸조가 ‘아직은’이라 한 것은 아직은 정말로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은 그것까지 제공할 때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아쥬흐에게는 귀중한 첩보임은 분명하다.
“이소브론 대공은 실각하게 되겠지요?”
“저는 반반이라 예상합니다.”
북방전쟁을 끝내고, 엘랑키아와 나우데사 사이의 평화 조약을 주도했던 것은 이소브론 대공이다.
만약 그가 실각하고, 평화 조약 자체가 매국노의 행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태는 극단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조약을 무효로 주장한다면··· 엘랑키아 국왕은 이를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쥬흐와 빈첸조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