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새로운 블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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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넓은 방 안을 식탁 위의 촛대가 밝히고 있는데도 어둑어둑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촛대의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으로, ‘겨우 밥 먹는 데 대낮처럼 밝아야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집 주인의 지론 때문이리라.
이번에는 저번처럼 방이 휑하게 넓지도 않고, 회의 당사자들만 덩그러니 마주 앉아 있지도 않다.
식탁에 마주 앉은 건 두 사람 뿐이지만 그들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식기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긴 했지만.
어둑어둑한 식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다름아닌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이다.
최근 여러가지를 결정하느라 며칠째 자리를 같이했던 두 사람은, 마침내 꽤 많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이 자리는, 내일 다시 트랑카벨 영지로 복귀하는 아롱드 자작을 배웅하는 자리였다.
···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평소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제법 세력이 있는 두 영주 가문의 주인이 함께하는 만찬 자리인데도 유난히 조용하고 소박한 것은 분명했다.
“...나는 말이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 자리의 호스트이자, 평소처럼 못마땅한 표정인 라몽 백작이다.
“그저 풍문을 들었을 뿐인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모든 걸 분석했다는 듯 으스대는 꼴이 정말 싫어요.”
“오호, 그건 정말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백작님.”
“벌써 만나서 조언을 드리고 싶다, 함께 미래에 대해 논의를 해 보자라는 편지가 몇 개나 왔는지 압니까. 지겹고 지겨워서 역겨울 정도고요.”
“허허허, 앞으로 새로운 군, 생뢰르반 군을 꾸리게 되었으니 돕고 싶다 그런 기특한 마음으로 연락하는 분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 따위 마음!”
정말 기분이 나빠졌는지, 눈살을 찌푸리던 라몽 백작은 탁 소리가 나게 식기를 내려 놓는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불쾌감이 아닌, 분노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에 진짜로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한 자들이라면, 라솔이 이스키비르 강을 넘었을 때는 왜 쥐죽은 듯 조용했던 것이지요? 돕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지 않았나요!”
“허헛, 물론 온당하신 말씀이지요. 하지만 각자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 준비가 되지 않은 분들도 있었겠지요.”
“그놈의 준비···.”
어찌나 화가 나서 이를 꽉 물었는지, 라몽 백작의 발음은 거의 뭉개지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는, 우리 가문과 오랫동안 거래해온 북쪽의 어느 소영주 가문이 참여했지요.”
“음, 어떤 분들이신가요?”
“영지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목재와 사슴 가죽밖에 없는 가난한 기사 가문이지요. 하지만 드 레뮤즈의 소집령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아버지와 장남, 겨우 두 명이 말입니다.”
“그것 참 훌륭하신 기사님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병대를 꾸릴 정도로 부유하지 못함을 사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쟁 경험이 있고 아들도 다 컸으니, 일개 기병으로라도 종군하겠다면서 말입니다!”
“...그러셨군요.”
흥분 때문인지, 라몽 백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힘이 들어간 주먹은 반대로 하얗게 변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눈가가 축축해진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힌 이야기인 것 같다 생각하면서, 아롱드 자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그 기사분과 아드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뢰르반 전투의 마지막 국면에서 아버지가 전사했습니다. 중기병의 선두에서 훌륭하게 싸웠고, 라솔 놈들의 총에 맞았다고 합니다.”
“흠··· 용감했던 고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아버지의 유품과 시신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장남에게 노획한 말과 수레를 찾아다 준 것은 트랑카벨 가문의 용병들이라 하더군요. 그 점은··· 그게··· 음, 고맙게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어! 그런 장한 일이 있었습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찾아서 상을 줘야 할 일이군요.”
어떤 의미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던 라몽 백작은 조금 진정한 듯,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듭 말하지만 드 레뮤즈의 호의는 이런 자들을 위한 것이지요. 이미 남들이 피땀흘려 일구어 놓은 자리에, 뒤늦게 숟가락이나 얹으려는 자들을 위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작님.”
여전히 흥분의 잔재로 씩씩대는 라몽 백작에게, 아롱드 자작은 진심어린 동의를 했다.
불과 몇달 전 까지만 해도 드 레뮤즈 가문과 트랑카벨 가문이 관계는 절망적으로 보였었다.
드 누아 가문의 가스텔 백작을 통해서도 여러 차레 들었지만, 대대로 드 레뮤즈 가문이 쌓아온 트랑카벨에 대한 원한은 상당했던 듯 하다.
정작 당사자인 트랑카벨 가문에서야 그렇게까지···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드 레뮤즈는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듯 하다.
실상 트랑카벨 가문이 블랑독 지방에 기틀을 잡고 독립하기 전에는 블랑독 서부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였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모를 어떤 이유로 두 가문의 관계는 틀어졌으며, 트랑카벨은 고용주와의 관계를 끊고 블랑독의 황무지로 떠났던 것이다.
물론 여전히 블랑독은 드 레뮤즈의 권역이었고, 트랑카벨은 드 레뮤즈의 종주권을 거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두 가문의 관계는 미묘하게 흘러갔다.
두 가문은 여러 차례 다양한 이유로 충돌했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런 크고 작은 충돌은 트랑카벨 가문의 영향력을 키워주게 되었다.
당장 선선대 드 레뮤즈 백작 시절, 즉 아롱드의 젊은 시절만 해도 두 가문은 무력 충돌을 벌였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선대 백작, 즉 라몽의 아버지 시절부터는 현재와 같은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 오히려 평화로워졌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드 레뮤즈는 트랑카벨을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두려움’ 조차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아롱드 자작은 생각했다.
그래서 세금을 바치기 위해 찾아가도 알현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형식적인 공물만 오가는 애매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로 상종도 하지 않으려 들었던 두 가문의 주인들이 어느새 마주앉아 엘랑키아 남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사를 논의하더니, 이렇게 식사도 함께 하고 있으니까.
···그 살풍경함과 불편함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이 큰 변화는, 사실 지난 라솔과의 짧았지만 치열했던 전쟁에서 트랑카벨 가문의 파견 병력이 많은 피를 흘린 덕에 생긴 것이다.
라몽 백작이 방금 분노로 치를 떨며 했던 설명은, 사실 그 가엾고 가난하지만 용맹한, 기사 부자에 대한 이야기 뿐만은 아니었다.
드 레뮤즈 가문이 요구할 때 기꺼이 달려와 전열에 참여하고, 함께 싸우다 힘이 다 되어 전장에 몸을 누이더라도 굴복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건 달리 보면 트랑카벨 가문의 이야기이다. 분명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건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명백한 사실이었다.
지금 아롱드 자작이 드 레뮤즈 가문의 본성에서 머물며 명목상의 주군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리고 트랑카벨 가문이 명명백백하게 블랑독에서의 지위를 인정 받은 것.
이 모든 것은 결국은 트랑카벨의 청년들과 용병들이 생뢰르반과 로그포르에서 흘린 피의 대가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라몽 백작은 트랑카벨의 인간을 영주관에 들이지도 않았겠지. 그만큼 싫어하던 상대였으니까.
아롱드 자작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몽 백작은 까다로운 사람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음습한 음모꾼이 아니라 다행이라 느낀다. 그런 상대라면 협력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에.
“...서로 별로 원했던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왕실에서 목록까지 만들어 와서 시키니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군요.”
“국왕 폐하께서 시키시는 일이니 견마지로를 다 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남부 가문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라솔 왕국과의 전쟁에 앞장세워 뼛속까지 털어먹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이지만요.”
“허허헛,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백작님.”
또다시 라몽 백작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아마도 둘 다 섞여 있겠지만 그 비율은 짐작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이 정도면 평생 만나온 독설가들 중 순위권에 들겠다··· 는 실없는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트랑카벨 가문의 의향에 대해서··· 음, 질문이 있습니다만.”
“백작님께서는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새로 창설되는 생뢰르반 군 사령부에, 참모장은 어느 인물을 임명하실 생각이신지?”
“흐음··· 허어, 그거야 가장 적합한 인물을 앉히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초조해보이는 라몽 백작의 질문에 아롱드 자작이 다소 모호하게 대답하자, 잠시 펴졌던 질문자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꼭 참모장으로는 그 남자, 코, 콘도티에레라 불리는 자를 데려오도록 하세요.”
“허허허, 물론 그러면 좋겠지요. 허나 트랑카벨 가문은 본인의 자율을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본인이 계속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 와서 의뭉 떨어도 소용 없으니 무조건 데려오세요! 영지 절반을 줘서라도 어떻게든 참모장 자리에 앉히라는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아까보다도 흥분하여 열정적으로 말하는 라몽 백작의 말투에서는 다소 부끄러움도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아롱드 자작은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 못 알아들은 척 장난을 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자칫했다가는 라몽 백작이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았기 대문이다. 어찌됐든 그는 주군이니, 더 이상 열받게 해서 얻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영지 절반을 줘서라도 해결이 될 문제라면 좋겠습니다만, 에트··· 에트 경은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덜컥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정말로 훌쩍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이를 초월한 술친구였음에도 서로가 워낙 바쁘다보니 얼굴 본 지도 꽤 오래 지나버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이미 카르카냑을 준다고 해도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
···손녀까지 주려고 했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손녀 아쥬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아롱드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이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라몽 백작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카르카냑은 블랑독의 알짜배기 땅으로, 어지간한 백작령에 준하는 훌륭한 영지였다. 블랑독을 권역으로 가진 드 레뮤즈 가문에서 당연히 아는 이야기이다.
자유롭게 고용주를 고르며,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하면 용병료와 인센티브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용병대장이란 직업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정쩡한 하급 귀족 작위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도 들었다. 한 명의 군주에 얽메이는 쪽이 기대수입을 오히려 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카냑 정도의 영지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우리 드 레뮤즈 가문에 넘기시지요.”
“허헛, 그 역시 당사자의 생각에 달린 게 아니겠습니까?”
“노자작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지금 왕실이며 서부의 명문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며 죄다 우리 참모장을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이쿠, 그렇게 되었답니까?”
“아무튼 단기간에 너무 많은 전공을 세웠으니까요. 그 전공 세우는 데 자기들도 한 몫 해서 무대를 만들어 줬다는 생각은 또 못하고···.”
막 튀어 나오려는 쌍욕을 간신히 참는 모습으로 보인다.
실제로 왕실은 괜히 이단토벌에 참여해 직접은 아니더라도 대군을 보냈다가 샹다메리에서 박살이 났고, 드 몽파르지에는 추태를 부려 전공 몰아주기를 해버렸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라몽 백작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정말로 말하기 싫다는 듯 한 마디를 보탠다. 역시 남에게 아쉬운 말을 하는 것을 어지간히도 싫어하는 인간인 모양이다.
“...거듭 말하지만, 꼭 필요하니 그 에트라는 자를 어떻게든 참모장으로 데려오시오.”
“이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나겠군요.”
“혹시라도··· 드 레뮤즈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이야기 하도록 하시고.”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면, 남달리 강한 자존심도 얼마든지 굽힐 줄 아는 인간이기도 했다.
“백작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노인네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당사자는 전혀 모르는 장소에서 또 한 번 운명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