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새로운 블랑독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는 다시 한번 갑자기 블랑독 변경에 나타난 남녀노소의 대군을 살펴본다.
눈 앞의 남자 다섯 명은 확실히 무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방금 그와 대화를 나눈 빌리발트 보겐 폰 탈리부르크는 마치 수도복처럼 생긴 거친 갈색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 아래로는 철제 흉갑을 입고 있다.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 역시 오랫동안 사용되어 가죽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이 남자는 만만치 않은 무용을 가진 검술사이리라. 본인이 평생을 검의 길을 연마해 온 달인이기에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나머지 네 명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갑주를 입고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대표인 빌리발트와 갑자기 나타난 악셀을 번갈아가며 불안하게 훑어본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긴 대열은 확실히 보고대로였다. 이들을 ‘군대’라고 부를 수는 없어보인다.
무장을 한 자는 몇몇 있어 보였지만, 제대로 된 전투용 무기를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갑옷까지 챙겨 입은 자들은 더더욱 부족해 보였고.
무엇보다 아무리 봐도 전투에 도움은 커녕 짐이 될 것 같은 여자와 아이, 노인들이 절반은 되어 보인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동그란 눈에 안타깝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멀고 먼 그룬발트에서 여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평생을 블랑독에서만 살아 지리감각이 부족하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그룬발트는 충분히 먼 땅이었다. 최소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걸어서 횡단하기에는 말이다.
“나는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부장, 악셀 엑스코르쥬라 하오. 빌리발트 경, 귀하와 귀하를 따르는 자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소?”
“이들은 그룬발트 안스바 지역의 단성파 신자들이오. 조베른 수도회의 수사로서, 주신의 이름으로 블랑독의 영주들에게 요청드리오. 부디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생필품을 나눠주시기를 바라오.”
빌리발트의 고개 숙인 정중한 요청과 함께, 뒤에 서 있던 남자 두 명이 협력하여 상자의 뚜껑을 열고 보여준다.
단단하지만 투박해 보이는 나무와 놋쇠로 된 상자 안에서는 제법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금화와 은화 사이에 놓인 순금 술잔과 장신구, 제법 큼직한 형형색색 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향사 집안 출신인 악셀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정도의 큰 재산이었다.
그나저나, 빌리발트가 하는 말은 절반은 알아 듣지만, 나머지 절반은 알아 들을 수 없엇다. 안스바, 단성파, 조베른 수도회··· 전부 무엇이란 말인가.
“4중대의 그로팽 파르디외를 불러주게.”
“옛, 부연대장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과 함께 말을 탄 총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부르셨습니까, 부연대장님?”
“그로팽 파르디외 소대장, 자네는 분명 신학교 출신의 견습사제였지 않나?”
“맞습니다.”
“음··· 여기 이 수사님과 다른 사람들이 그룬발트에서 온 모양인데,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서 잘 모르겠으니, 조언을 부탁하고 싶네.”
“아, 알겠습니다.”
상상도 못한 엉뚱한 요청을 받자, 그로팽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빌리발트가 다시 자기 소개와 요청을 하자 차츰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모양이다.
델레망드 삼각주에서의 전투 이후 연대에 소대장으로서 합류한 그로팽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5년 이상 엘랑키아 북부의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향했었다.
당연하지만 원래는 성전에서 사제를 도와 일하다 그 자신도 사제가 될 젊은 신학도였다. 물론 이단으로 낙인찍힌 정순파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의감과 신앙심 넘치는 젊은 견습사제는 성직자로서의 커리어를 계속 쌓아가는 대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입대하는 쪽을 선택했다.
본래 주신의 기물을 들고 성사를 집전해야 할 섬세한 손가락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화승총을 다루었으며, 주신의 말씀을 전할 입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탄약포를 잡아 뜯었다.
얼마 전 있었던 연대 사격 대회에서 그로팽은 1분 간 4.5발의 사격했으며, 4발을 전부 명중시켜 자신이 연대 최고의 명사수임을 입증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참 빌리발트의 말을 듣더니 부연대장 악셀에게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을 전한다.
“이 분들은 그룬발트 중부의 안스바 지방에서 온 단성파 신도들입니다. 단성파는 그··· 이단으로 분류되는 신앙입니다.”
“블랑독의 정순파처럼?”
“그게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알고 있습니다. 정순파는 교리 면에서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지만, 단성파는 교단의 성직자와 성사의 허례허식과 호화로움을 비판하는 교파입니다.”
“...알면서도 모르겠군. 어쨌든 서로 다른 이유로 이단 취급을 받는 존재란 말인가.”
그로팽은 다소 자신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룬발트에 제법 넓게 퍼져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탄압당했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럼 조베른 수도회는 무엇인가?”
“조베른 수도회는 청빈함을 강조하는 조베른 두미히 수사가 창건한 수도회입니다.”
“청빈? 그렇다면 단성파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실제로 조베른 수사는 몇 번이나 법황청으로 압송되어 이단 심사를 받았다고는 합니다만··· 결국 이단 혐의를 벗고 풀려났습니다.”
“어째서지?”
“음··· 조베른 수사는 부패한 ‘일부’ 성직자들을 비난하기는 했으나, 교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어···.”
그로팽의 말투는 무척 조심스러워 보인다. 주신교단에 맞서 총을 들고 일어났으면서도, 신학도 입장에서 교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성장기의 가장 중요한 5년을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보냈었을테니까.
그나저나 비슷한 말을 하는데 교단을 직접적으로 까고, 까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단과 이단이 아님이 갈리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빌리발트 경, 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단성파 신도들이 그룬발트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오?”
“그렇소이다. 최근 갑자기 신도들이 연행당하고, 고문까지 당하는 일들이 거듭해서 벌어졌었소.”
“최근 갑자기라면···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그 말씀대로요. 블랑독의 정순파 영주들이 법황이 보낸 군대를 격퇴했다는 소식에, 겁이 난 자들이 차별 받으면서도 조용히 신앙을 지키던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오.”
오랜 여행이 힘들었는지, 핼쑥해진 무장 수도사의 선이 굵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안스바 교구에서는 우리 조베른 수도사들을 시켜 이단을 색출하려고 했소··· 성자 조베른 수사의 뜻을 따르는 자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소···.”
빌리발트 주변의 다른 남자들도 같은 수도회 소속인지, 모두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바른 말을 해서 껄끄럽긴 하지만 이단은 아닌 자들로 하여금 이단을 색출하게 했다라. 참으로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이미 찍혀버린 자들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반항하거나··· 본인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더더욱 철저하게 색출 작업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이 수도사들은 양심을 따라 전자를 선택한 모양이다.
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단으로 찍힌 자들이 이단으로 찍히지는 않은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이단으로 찍힌 무리에게 구원을 청하다니.
그런데 또 양 이단 집단은 서로간의 공통점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주신교단에 찍혔다는 것 말고는.
하지만 빌리발트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우선 트랑카벨 가문의 세 사람은 모두 정순파 신도는 아니었고.
“사령관이신 아실 트랑카벨 자작님께 보고를 올리겠소. 그때까지는··· 외곽 지역에 머물러 주셔야겠소.”
“우리 수도사들은 아무래도 좋소. 하지만 여기 이 백성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이오. 노인들과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져가고 있소.”
“식량은 얼마나 남으셨소?”
“...아껴 먹으면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몇몇 환자들은 정말 위독한 상태요. 그들이라도···.”
“그것도 포함해서 자작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아마도 아실 트랑카벨 자작은 이 피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겠지.
###
새롭게 이스키비르 강변을 지키는, 대 라솔 전선을 책임지는 생뢰르반 군 창설이 공표된 것에 이어 새로운 소식이 또 전달되었다.
먼저 생뢰르반 군의 사령관 선발권을 가진 드 레뮤즈 백작가는 이스키비르 유역의 관리자가 된다.
다음으로 생뢰르반 군의 참모장 선발권을 가진 트랑카벨 자작가는 블랑독의 관리자가 된다.
관리자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며,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는 지방관직이다.
국왕이 직접 임명하고, 가문의 작위에 딸리는 형식이다.
이론상 직위가 내려진 가문의 주인에게 작위와 함께 세습되며 해당 지역에서는 국왕 공인의 폭 넓은 권한을 가지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위’가 아닌 ‘관직’인 만큼, 임명권자인 국왕의 판단에 따라 회수해 갈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동안은 거의 지역의 총독 수준으로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엘랑키아 전역의 호사가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국가 단위에서 효율성이 필요한 상황에서, 왕실이 지역 관리자를 임명하는 것 자체는 자주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우선 ‘이스키비르 유역의 관리자’가 된 드 레뮤즈 백작가는 또 다른 백작가인 드 누아 가문 뿐 아니라, ‘또 다른 관리자’인 트랑카벨 가문 역시도 관리하에 두게된다.
한편 ‘블랑독의 관리자’가 된 트랑카벨 자작가는 대귀족으로 분류되는 백작 작위 없이, 거대한 신흥 영토인 블랑독 지방 전체를 관리하게 되었다.
이 두가지 모두 지금까지 엘랑키아 역사상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거기에 더해, 라솔 전선을 채임지게 하기 위해 두 개의 관리자 가문을 동시에 임명해 버리는 것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왕도 베르마유가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엘랑키아 특성상, 남부 지방을 변경으로 여기며 하찮게 보던 귀족들에게 대체 남부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 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는 여론 또한 존재했다.
라솔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남부 가문들의 작위를 승작해주는 대신, 언제라도 회수할 수 있는 지방관직을 내려 편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 남부의 잠재력을 한 곳에 집중할 생각이라면 관리자의 담당 영역을 둘로 분산시킬 것이 아니라, 한 명만 임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완전 동격은 아니더라도, 왕실로부터 강한 권위를 부여받은 두 가문이 협력하게 된다면 주도권 다툼을 시작하게 되어 오히려 약화된다는 의견이다.
다고베르 2세 국왕이 진정 라솔과의 전쟁을 중요시하는 대신, 오히려 남부 지방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정세에 밝다고 자신하는 호사가일수록, 이런 시각을 주변에 밝히거나, 심지어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반론에는 또 반론이 붙게 마련이었다.
양쪽 모두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기에 서로의 불꽃튀는 토론은 대부분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도 신랄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당사자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