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새로운 블랑독
사실 이미 트랑카벨 가문은 해외로부터 많은 인력을 받아들여온 상태이긴 했다. 아쥬흐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콘도티에레 에트부터가 그룬발트와 주디칼리에서 활동하던 용병이기도 하고.
슈토르히 연대며 프리스마라 연대 등 대규모 용병단 역시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
카르카냑이나 몽세나에 건축된 대규모 조병창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의 상당수도 외국에서 데리고 온 기술인력들이다.
그런가 하면, 그녀가 직접 편성한 트랑카벨 의무대의 군의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 자신이 주디칼리의 델로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던 점도 있으니. 그래서 군의관의 거의 절반이 그녀의 선배와 후배, 혹은 동기들이었다.
장기적으로는 블랑독 내부에서도 고급 기능 인력을 양성해야 하겠지만 너무도 요원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시설도, 후보생들도 없지만 일단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인력부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쥬흐는, 일단 스카웃해오는 외부 인력의 폭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델로나 대학의 은사님들에게 편지를 썼다.
다행히 트랑카벨 의무대에 정착한 다수의 의사와 의학도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그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델로나 대학의 교육자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키워낸 재원들이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 게 싫을 리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낯설고 위험하지만 풍요로운 블랑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졸업하고서 자신의 능력을 낯선 땅에서 자유롭게 발휘해보고 싶어하는 젊은 공학도.
자신이 쌓은 기술에 비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생각하며, 변변찮은 일만 하는 데 염증을 느낀 중견 기술자.
하다 못해 여러가지 이유로 기술과 판로를 독점한 길드와 싸워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살길이 막막해진 독불장군들 까지도.
어쩌면 자신들의 자리가 바다 건너 이국 엘랑키아의 변경에는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배에 오르는 것이다.
이번에 아쥬흐가 특히 신경써서 모집한 인력들은 건축쪽이다.
주디칼리는 누가 뭐래도 대륙 전체에서 건축기술이 가장 발전한 곳이다. 아니, 가장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우선 당장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주신교의 총본산, 법황청이 주디칼리에 있다.
예나 지금에나 종교인들은 종교 시설을 건립하는데 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는다. 마치 신의 성전이 주신의 위대함을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 말이다.
주디칼리 전체에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주신교 성전들이 건립되었고, 개축되었고, 신축될 예정이니까. 모두가 건축가들이 활동할 무대이다.
또한 남들이 탐낼 정도로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 충분한 돈을 낼 생각이 있는 군주와 도시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성채는 군주의 권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수단으로도 여겨졌다. 영지 전체를 굽어보는 장려한 요새가 가지는 힘은 분명히 있으니까.
때문에 주디칼리에서 건설되는 성곽과 요새, 성채들은 하나하나가 기능적으로나 미감적으로나 완벽한 예술품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 요새라는 것은 끊임없이 개축과 유지보수를 필요로 한다.
끝없는 경쟁과 개선 과정에 기술의 발전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이미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주디칼리의 유명한 기술자들을 초빙해 요새와 성전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기도 했고.
다만 트랑카벨 가문은 아직 그만한 인지도나 자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자금으로 따지면야 절대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지출이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금화 하나도 허투르게 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젊고 주류에 안착하지 않은 인력들을 모아 일을 시켜보려는 것이다.
최소한,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아직 태동 수준인 블랑독의 산업 인력들이 배우는 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부려 본 아쥬흐 입장에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업계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했다는 것이 반드시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실제로 그 대담한 시도가 군수산업과 의무대 쪽에서는 어느정도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러고보니··· 라니오타에도 방어 거점을 만들어야겠구나.”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중얼거린다.
항구도시 라니오타는 이제 누가 뭐래도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 전체의 생명줄이다. 봉쇄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하다 빼앗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오래전에 건설된 항구 요새 정도야 있지만, 항만을 지키는 외벽과 새롭게 확장된 시가지를 지킬 요새는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이번에 들어온 이들은 짐을 꾸리기도 전에 첫 임무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는 블랑독 북부 지역에 주둔한 트랑카벨 정규 연대 중 하나이다.
이들은 트랑카벨 영지군 중에서는 비교적 나중에 편성된 후발 연대로서, 샹다메리나 마르사코르 등, 굵직한 대규모 전투에는 참여한 적 없다.
하지만 법황군의 일부가 기습적으로 북 로데브 강을 건너 델레망드 삼각주를 침공했을 때, 용감히 싸워 지원군의 도착까지 버텨낸 수훈을 가진 부대이기도 하다.
이때 입은 피해가 적지 않았기에, 천천히 재편성 과정을 거쳐 지금은 어엿한 정규 연대의 하나로서 북부 방어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뭐 마르사코르에서 법황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이후, 북부 방어라고는 해도 주제도 모르는 멍청이들 쫓아다니는 일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 중 가장 북쪽에 배치된 분견대를 지휘하는 제19 연대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는 갑작스러운 보고를 받는다.
타 연대 소속의 기마 정찰대로부터였다.
“블랑독 경계 너머 북쪽에서 대규모 행렬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대규모라면 얼마나 되나?”
“선두만 해도 3백 이상에, 본 대열을 합치면 최소 2천에서 3천 정도는 되어 보입니다.”
“뭐! 갑자기 연대급 병력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당장 연대 본부에 전령을 보내고, 전군 출동 주비를 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다소 느슨해지기까지 했던 주둔지에 갑자기 활기가 돈다. 전령들이 이리저리 달려가고, 비번인 병사들을 불러 출동 준비를 하느라 난리 법석이 벌어진다.
“여, 연대장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적은··· 상대는 연대급 전력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방금 2천에서 3천 정도의 병력이라 하지 않았나?”
부연대장 악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최악의 경우, 연대급 이상의 병력일지도 모른다는 것일까?
실제로 이만한 병력이 편제를 이루어 접근하고 있다면, 그 이상의 후속 전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소문만 무성하던 법황청이 보낸 새로운 군세의 선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19 연대 선에서 끝낼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소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하는 전령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그게··· 군대가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니라고? 그건 무슨 말인가?”
“무장한 남자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조직된 군대는 아닙니다. 후위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확인되었습니다.”
“음?”
보고를 듣고 악셀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혼란기라고는 하나, 상인을 비롯한 민간의 여행자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델레망드에 거점을 두고 있는 상단도 여럿 있으니까, 오히려 어릴 때부터 그런 광경에는 익숙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상단은 몇천 명이나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도, 그들이 먹고 자는 비용도 당연히 계산되기에 오히려 인력을 줄이려고 하는 편이지, 여자에 애들까지 끌고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규모가 크고 비전투원이 다수 섞였다면··· 그건 피난민이란 이야기인데.
아니 라솔과의 전쟁도 마무리된 지금 엘랑키아 전체에서 유일하게 전쟁 상황인 곳은 블랑독 밖에 없는데.
대체 어떤 정신나간 길잡이가 피난민을 여기로 이끌고 온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도 적이 침공해오는 급박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지만··· 설령 상대가 평화적인 무리일지라도, 저만한 숫자를 블랑독에 그냥 들여 놓을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란, 적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온갖 사고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통과하는 지역의 주민들과도 물론이고, 당연히 자기네 내부에서도 말이다.
“연대장께는 보고를 드렸나?”
“옛, 방금 전령을 보냈습니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령부의 아실 자작께도 전령을 보내게. 내용은 ‘여자와 아이 등 비전투원이 포함된 2천 명 이상의 행렬이 접근 중, 확인되는대로 추가로 보고하겠음’ 이상!”
“알겠습니다!”
이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는 버려진 방앗간이 있는 언덕에 올랐다.
블랑독에서도 가장 북쪽 끝인 이 부근은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지경이다. 이쪽을 통해 침공해온 법황의 성전군이 오래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좀 더 남쪽 지역들도 대부분 피난을 가긴 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텅 비어있지는 않았다.
풍차 방앗간 역시 법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는지, 숯덩이가 된 들보를 제외하면 돌로 된 벽 일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저 방향입니다!”
“이미 다른 아군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군···.”
방원경을 꺼내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블랑독의 북쪽 변경을 감시하는 부대는 악셀의 부대 뿐만이 아니다. 열 명 정도로 이루어진 소규모 기마 정찰대 몇 개가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적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말이군··· 수레에 걸터 앉은 아이들이 보인다. 선두 집단에도 여자들의 모습이 꽤 보이는군.”
“대체 어디서부터 온 자들일까요?”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적··· 아니 상대 대열의 선두에 백기가 올랐습니다!”
그 말대로, 장대에 걸린 하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몇 명 정도의 남자들이 깃대를 들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백기는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며, 투항 혹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이다.
어떻게 할까. 아마도 아직 주변에 도착한 아군 중에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없는 모양이다.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말이 몇 마리 있지? 전령마들을 포함해서 준비해주게.”
“...저들은 무장하고 있습니다, 부연대장님. 위험합니다. 최소한 1개 중대라도 호위대와 함께 가시죠.”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저들의 목적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나. 그리고 나에겐 이게 있다네.”
악셀이 등에 멘 가문의 보검을 툭 건드리며 말한다.
엑스코르쥬 가문은 블랑독에서는 꽤 유명한 검술의 명가로, 악셀 역시도 델레망드 삼각주 전투의 치열한 백병전에서 명불허전임을 증명했었다.
그를 만류하던 장교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미심쩍은듯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는 소수의 장교들, 그리고 전령들의 ‘호위’를 받으며 백기로 향한다.
상대측 역시 대화의 의도를 명확히 한다는 듯, 대열을 멈추게 하더니 다섯 명의 남자만이 백기를 들고 앞서 나온다.
“우리는 트랑카벨 영지군 제19 델레망드 연대요! 주군의 명령을 받고 블랑독 북부 변경을 지키고 있소. 귀하의 신분과 목적을 알고 싶소.”
긴장한 듯한 다섯 명의 남자들을 내려다 보며, 악셀이 큰 소리로 외친다. 백기 아래에 서있던 자가 우두머리인지, 몇 걸음 앞으로 나온다.
“블랑독? 우리가 드디어 블랑독에 도착한 게 맞소?”
“...그렇소. 여기서부터 남쪽을 통상 블랑독이라고 부르니.”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다섯 남자들은 감동에 찬 표정으로 서로 얼싸안거나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르며 기쁨을 표한다.
그럴수록 악셀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리둥절할 뿐이다.
“하지만 블랑독은 현재 전쟁 중이오. 미안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 줄 수는 없소.”
“아,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구려.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내 이름은 빌리발트 보겐 폰 탈리부르크, 탈리부르크 자작의 차남이고, 일단 이 가엾은 무리를 이끌고 있소.”
“탈리부르크라면··· 혹시 그룬발트에서 오셨단 말이오? 이 많은 인원을 이끌고?”
“그렇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