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 신규 군 사령부
“일단 제가 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뮈르텔 드 생프랑보 재상각하께서 직접 방문하시기에 앞서, 왕실의 의도를 전달하는 한편 트랑카벨 가문의 의향을 듣는다··· 입니다.”
“아, 생뢰르반의 아군을 방문하셨다는 기병지휘관 디타레 경과 비슷한 임무신가요?”
“예, 디타레 경께서도 그런 임무를 받으셨다고 들었지만··· 저는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아쥬흐 역시 내가 나름 자세하게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상황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다.
“저 역시, 그리고 저희 드 상포리앙 백작가 역시 이번 신규 사령부 건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하··· 상포리앙 가문 역시 신규 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시는군요.”
“하하, 맞습니다.”
“헉, 진짜요?”
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멀뚱멀뚱 눈알만 굴리고 있는 사이, 아쥬흐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모양이고, 나는 한 발 늦게 이해하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알기로 상포리앙 영지는··· 흠, 엘랑키아 남부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긴 하겠네.
“현 가주이신 아버님, 그리고 다른 가문의 어른분들과 논의해서 정했습니다. 상포리앙 가문은 항상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아왔으니, 이 기회에 엘랑키아 귀족으로서 역할을 다 하자는 생각입니다.”
“후후, 그거 참 훌륭하신 생각이네요.”
으음, 단순히 그런 의도만은 아니겠지. 이 눈 앞의 상쾌한 청년이야 그렇다 쳐도, 집안 어른들은 말이다.
아쥬흐도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 같다.
그렇다고 이를 음모 따위로 받아들여서 견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말하자면, 지금 드 상포리앙 가문에서는 신규 군 사령부의 ‘주주’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이겠지.
군 사령부가 설치되면, 연관된 가문들은 병력을 파견하고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당연히 무거운 의무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주주’로서 탐낼 만한 이권은 뭐가 있을까.
일단 트랑카벨 가문이야, 불안하디 불안한 블랑독에서의 권위와 영토를 국왕님 이름으로 도장을 꽝 찍어서 보증해준다는 게 크겠지.
드 상포리앙 가문의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뭐 세금 공제 같은 건 어차피 줬다 뺐는 느낌인 별 메리트가 되지는 않을 테고.
“사실 이번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에트 경 덕분이 큽니다.”
“제가요! 아니 그건 또 무슨 경우입니까?”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상포리앙 가문 사람들은 이 쾌남 카렐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하하, 그··· 저희 가문의 군대가 블랑독에 침입하려다 호되게 당한 적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랬었죠.”
“그때 당했던 가슴이··· 하하, 아직도 가끔은 쑤십니다. 실제로 몸이 아픈 건지, 머리가 아픈 건지 모르겠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진심이다. 솔직히 지독한 꼴을 당하게 했었지.
하지만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 고문으로서,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역시 진심이지.
“아닙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오히려, 당시 에트 경의 대처 덕에 제 목숨도 무사했고 가문 병사들의 피해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으음··· 그렇게까지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시면서도 이길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에트 경.”
“배려라니요, 그건 너무 확대해서 생각하신 겁니다.”
당시의 리니 능선 전투, 그리고 국왕군을 상대했던 샹다메리 전투까지도 다소 ‘조심스럽게’ 전술을 짰던 것은 사실이다.
상대를 철저하게 섬멸하거나 서로에게 큰 피해가 누적되는 소모전을 피하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배려’라고 하기는 다소 어폐가 있다. 리니 전투나 여울목의 전투 같은 경우는 몰라도, 샹다메리 전투는 정말로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다만 기조를 그렇게 잡았던 이유에 ‘향후 적대관계를 유지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엘랑키아 귀족층에 너무 미움 받지 않으려는 생각이 분명 있기는 있다.
그렇다 해도, 전쟁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한된 트랑카벨 영지군의 전력을 온존하고자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아무리 우세한 상황이더라도, 가령 포위 섬멸 상황일지라도 아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아무리 교전비가 유리하다 해도, 사실상 무한한 예비 전력을 갖춘 엘랑키아 왕국의 군세와 지금 전장에 나온 전력이 사실상 전부인 트랑카벨 영지군이 비교가 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배려라니···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순 없다. 그건 그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니까.
흐음, 리니 능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추격전을 시도했다면 더 입힐 수 있었던 피해를 포기했던 건 맞긴 하지만.
다만 그때는 아직 신생 영지군 병사들을 공세 작전에 투입하기가 좀 불안했단 말이지. 음, 지금이라면 문제 없겠지만.
“그런데··· 제가 드 상포리앙 백작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저희 가문은 당시 트랑카벨 가문과의 교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름 가문의 정예들을 이끌고 갔던 것인데도요!”
흐음··· 아무래도 요즘 세상에 검과 방패로 무장한 단일 병종 부대가 활약하긴 쉽지 않지.
슈토르히 돌격대라는 특이 케이스가 물론 존재하긴 하 지만, 얘들은 자진해서 끌어 올린 괴물같은 신체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철저하게 제한된 보조 역할에 집중하니까.
당시 트랑카벨 영지군은 아직 초보단계이긴 했지만, 장창과 화승총이 적절한 비율로 섞였고 든든한 야전축성으로 보호받은 데다가 지형에서도 우위였다.
아마 단순히 검과 방패로 무장한 근접 보병은 2~3배의 숫자가 몰려와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리라.
아무리 개인의 무용이니 정신력이니 해 봐야, 결국 철저한 무기체계의 우위를 뒤집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트랑카벨 가문이 얼마나 훌륭하게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샹다메리 전투나, 그 이후 법황군의 침공 과정에서도요. 물론 이번 라솔의 침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렐의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역시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디타레 드 카울 경처럼 냉정하게 말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서 호감과 신뢰를 느끼게 되는 것도 분명하다.
“결론은, 저희 드 상포리앙 영지군은 그런 전장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무기 체계를 개편하고 적합한 훈련을 받지 못한 군대는··· 제한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도 솔직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하물며 본인들이 이렇게 문제점을 자각하고 극복하려 하는데 진지하게 답해주지 않으면 결례겠지.
“엘랑키아 남부의 방위는 저희 드 상포리앙 가문에게도 좌시하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도 분명 있습니다.”
너무 자기네 입장만 이야기 한 것이 다소 쑥스러운지, 아니면 감정을 드러낸 것이 부끄러운지 다소 어색한 말투로 말한다.
“그게 참, 아직 뭐 정해진 바는 없지마는··· 음, 함께 싸우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환영합니다?”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카렐은 행복한 듯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신규 군 편성에 참여하시는 건 드 상포리앙 백작가 단독입니까? 아니면 다른 남부 가문들도 포함되나요?”
“흠, 먼저 저희 가문과 봉신관계는 아니더라도 우호적인 몇몇 소가문들이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드 레스펜스 후작가 역시 설득하려고 했지만 거긴 아직 마음이 좀 복잡하신 모양입니다.”
“레스펜스··· 드 레스펜스 후작가라면 들어본 것 같은데···.”
“가문의 주인, 르므완 드 레스펜스 후작님이 제가 참전했던 전투의 총지휘관이었고, 샹다메리 전투에도 보병 연대장으로 종군했었습니다.”
“아···.”
흠··· 리니 능선 전투에서 적장 멍청이라고 속으로 욕했었는데··· 이 말은 안 하는 게 좋겠다.
그나저나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적으로 두 번이나 싸웠다면 감정이 좀 쌓일 법도 하네.
어제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는 거야 용병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그건 용병이니까 그렇고··· 귀족님들 사이에서는 자존심 문제도 있고 하겠지.
게다가 두 번이나 병력을 일으켰다가 말아먹었다면 금전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치적 입지도 파탄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
봉건제 산하의 계급 사회가 은근히 실력주의 영향이 없지 않다. 직위만 높은 머저리가 생기기도 하지만, 무능한 인물은 설 자리가 줄어들게 마련이지.
“그리고··· 디타레 경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무엇인가요?”
갑자기 카렐이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또 뭔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에트 경에게 봉급을 지불하면, 영지군 양성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드 상포리앙 백작가 역시, 정식으로 에트 경께 고용 계약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그건 무슨···.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거죠?”
“트랑카벨 가문 외에도, 드 레뮤즈 백작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엘랑키아 왕실 및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 역시 추가로 고용 계약을 맺을 계획이라 들었습니다만···.”
뭔 말이 또 어떻게 흘러서 어떻게 왜곡이 된 거지?
“고용··· 흐음. 콘도티에레 에트, 제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던 건가요?”
“아뇨 그게··· 별 일은 아닌데요.”
빌어먹을, 하늘에 맹세코, 나는 진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그래서 카르카냑으로 보내는 보고서에서 그 이야기는 빼먹었었다. 아니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벌써 몇 장이나 됐는데, 사소한 건 좀 빠질 수 있지.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아쥬흐의 묘하게 싸늘한 표정을 보니 말이다.
카렐 이 망할 인간이 겉으로는 성실한 청년을 위장하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 아니 복수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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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경과 우리, 정확히는 트랑카벨 가문 대표인 아쥬흐와의 회담은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생뢰르반에서 들었던, 디타레 드 카울 경을 통한 전언은 아직 이쪽 상황을 명확히 알지 못한 어전회의의 결정 사항을 러프하게 ‘통보’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서 카렐 경을 통한 전언은 좀 더 정제된 외교의 언어였다.
단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향후 블랑독 전체를 큰 탈 없이 엘랑키아 왕실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로 집어 넣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대부분의 내용은 전쟁이 마무리 된 트랑카벨 가문이나 블랑독 입장에서 마냥 손해만 되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실 입장에서도, 어느정도는 ‘전쟁의 승자’인 블랑독 연맹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명목상 협의체인, 그리고 당면한 전쟁의 위협이 줄어들었으니 더더욱 개인의 의견들이 난립할 블랑독 연맹 내부에서 모두를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겠지만···.
트랑카벨 가문과 드 누아 가문 등이 의견을 함께한다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우연찮게도 아롱드 영감님이 드 레뮤즈 영지를 방문한 사이에 재상 각하란 양반 역시 방문했으니 진짜 결정은 거기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회담 자체는 잘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단히 불편해진 아쥬흐의 심기였다.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아쥬흐 양.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드 레뮤즈 백작가로부터 봉급을 받고 있었고, 그 후에는 드 몽파르지의 공작이 말 실수를 했다니까요?”
“흐음···.”
“분명 그게 어전회의의 사절이었던 디타레 경에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졌고, 카렐 경에게도 와전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흠···.”
아쥬흐는 다소 삐딱한 표정으로··· 이런 말 하면 양쪽 모두에게 아주 큰 실례겠지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생각나는 표정으로 듣고만 있다.
“네··· 그러니까 그냥 오해로 인한 사건 같은 거라서, 굳이 보고서에는 추가하지 않았던 것이구요.”
“그랬군요.”
“그래서 혹시라도··· 걱정하셨을 것 같은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뭘 걱정했을까요?”
“다른 가문과 중복 계약을 하는 등의 부당한 행동을 했을까 걱정하시지 않았을까요?”
“그건 알아주셔서 다행이네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이중 계약은 다시는 용병 일을 못할 정도의 치명적인 문제거든요!”
“하아아···.”
조금 기분이 풀리는 듯 했던 아쥬흐는 내 마지막 말을 듣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아니 또 뭐가 문제지!
그래도 어쨌든 기분이 풀리기는 한 모양이다.
“그래요, 만약에라도 콘도티에레 에트를 의심한다면 제가 어리석은 것이죠. 당연히 믿어요.”
다시 평소의 잔잔한 미소를 담으며, 평소의 아쥬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냥 좀···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서 제가 심통이 났었나 보네요.”
“이런 저런 일들이요?”
“가령,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편지가 왔나 싶어서 열어 봤더니, 온통 랑시아 성녀에 대한 질문만 있었다거나요.”
“아! 그러게요, 랑시아 성녀는 괜찮은가요? 저 그게 계속 걱정이 되더라고요. 아니 이게 법황청이 밉기는 하지만 트집거리를 주면 안되니까요.”
“휴우··· 그렇지요. 랑시아 성녀는 건강하다고는 못하지만 회복하고 있어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쥬흐 역시,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이다. 어째 좀 표정에 그늘이 보이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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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적으로 엘랑키아 남부, 구체적으로는 라솔과의 전선인 이스키비르 강변을 지키는 신규 군 사령부의 설립이 공표되었다.
군 사령부의 명칭은, ‘생뢰르반 군’으로 정해졌다.
본래는 평범하게 남부 방면군 정도로 정해질 예정이었지만, 사령관으로 보임할 예정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그 명칭을 강력하게 원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라몽 백작은 설명하지는 않았고, 감히 그에게 이유를 캐물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실제로 생뢰르반에 건설 될 예정인 요새를 거점으로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만 나중에 라몽 백작은 측근들만 모인 자리에서 ‘그래야 라솔 놈들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더러울 테니까’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