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신규 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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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저녁시간에 시작한 회의는 밤 늦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노년에 접어든 데다가 오늘도 하루종일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엘랑키아를 가로지른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도.
이 자리의 호스트이며, 가장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건강상으로 문제가 많은 라몽 드 레뮤즈 백작도.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칠순에 가까운 노인인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도 조금도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현재 자신들이 논의하고 있는 이야기가 자신이 대표하는 집단에게 얼마나 중요한 내용일지 알고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의 앞에는, 어느샌가 준비된 간단한 요리가 담긴 접시, 포도주와 물이 담긴 잔이 놓여있다. 가혹한 장시간 논의를 돕는 몇 안되는 동반자이리라.
당연하지만, 물과 포도주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유난히 넓고 휑한 방의 한 가운데에서 딱 세 명만 들어와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서 오고 간 이야기가 ‘부적절한 누군가’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 라몽 백작의 결벽스러움 때문이다.
물론 이 시간에 영주관에 돌아다니는 이들은 대부분 드 레뮤즈의 가신들이거나 고용인들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정말로 다른 세력의 사주를 받은 정보원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악의 없이 실수로 알고 있는 사실을 누군가의 앞에서 입 밖에 낼 수도 있고 말이다.
처음부터 모른다면 실수 할 일도 없다. 때때로 편집증에 시달리고는 하는 라몽 백작이 선택한 방법이다.
이 정도 넓은 방이다. 세 사람이 앉은 원탁에서 문 까지의 거리라면, 어지간히 큰 소리로 격론이 벌어져도 밖에까지는 들리지 않으리라.
“...결과적으로 군을 유지하는 비용에서 이만큼을 왕실에서 교부금으로 충당해 주신다는 것이군요.”
한참을 길고 긴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라몽 백작이 문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롱드 자작 역시 멋드러진 단안경을 끼우고, 잘 보이지 않는지 적당한 거리에서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읽고 있는 문서는 재상 뮈르텔이 미리 왕도로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신규 군 사령부의 설립에 대해 주로 경제 관점에서 검토된 문서였다.
봉건 군대는 기본적으로 상비군이 아니다. 물론 특히 군사귀족이 많은 엘랑키아의 영주들은 병력을 소집하고 훈련할 의무를 지기는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준비 단계’이다.
실제로 병력을 중앙으로 소집해 하나의 군대로 조직하고 출정까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영토를 대가로 군사력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숫자나 종군 기간은 무한이 아니다.
물론 봉신들과 사이가 좋은 주군의 경우, 상황에 따라서 가신들의 ‘호의’에 기대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쓰고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실제로 생뢰르반 전투에 참여한 드 레뮤즈의 여러 봉신들은 전쟁이 다소 길어졌더라도 추가 비용을 요구하지 않고 종군의 의무를 이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건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방어전이기 때문이지, 당장 전투상황도 아닌데 1년 내내 불러 집에도 보내지 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군의 의무를 지기 위해 소집되는 기사와 보병들은, 평소에는 고향에서 행정관과 법무관, 상인과 농부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 사령부가 설치된다면, 할당된 병력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상시적으로 임전 태세에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일부러 군을 편성하는 것이니까.
이들을 전문 군인으로 잡아두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용이 필요하다. 게다가 군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을 반복하고 장비를 교체하는 것 역시 전부 돈이다.
때문에 평소보다 많은 전비가 지출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논의가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왕실로 가는 조세에서 공제되는 형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만약에··· 정말 만약의 경우입니다만, 자연재해나 전쟁 등의 이유로 그마저도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세수가 급격히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 경우에는 물론 예정대로 왕실에서 교부금을 지급하여 군 유지를 돕게 될 것입니다.”
“흐음··· 그런 예가 있습니까?”
“나우데사 남부 요새에 주둔한 북부군이 현재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많기 때문에, 모두가 왕실 예산으로 유지되고 있지요.”
미심쩍다는 듯 물어보는 라몽 백작에게, 뮈르텔은 막힘없이 대답한다.
하지만 막힘없이 대답하면서도, 뮈르텔은 라몽 백작의 지적이 상당히 날카롭다 느낀다.
도저히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자기 영지만 지키며 두문불출하는 시골 영주의 시각은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관리로 부리며, 더 많은 귀족들을 접하는 재상이라는 중요한 직위에 있는 그이기에 말할 수 있다.
아마 재상부에 들락거리는 귀족들의 태반은 이 라몽 백작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라몽 백작의 질문을 일일이 대답해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피곤하기는 했으나, 그만큼 유능한 자가 엘랑키아의 일각을 지키게 된다는 생각에 든든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논의하여 납득시키지 않으면, 라몽 백작은 자신의 역할을 거부할 것이다.
이런 남자는 진심으로 납득시키지 않으면 억지로 시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든 라몽 백작을 설득해 블랑독 이단토벌에 참여시키려 했던 왕실의 어설픈 수작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제와서 어설픈 수 따위를 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라몽 백작은 원칙을 따지기는 해도 의무를 저버릴 인간은 또 아니니까.
“다고베르 2세 국왕 폐하께서는 왕실 내탕금을 털어서라도 사령부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재상으로서, 이 뮈르텔 역시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일단 라몽 백작은 거기에 대해서는 납득한 모양이다. 하지만 문답이 여기서 끝날 리는 없다.
“뭐 좋습니다, 재상님. 하지만 우리 드 레뮤즈는 그렇다 치고, 트랑카··· 블랑독의 영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슨 뜻이지요, 백작님?”
“블랑독의 영주들은 오랫동안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실에 대한 의무를 지는 데 익숙치 않을지도 모르지요.”
세금도 제대로 안 내고 자유롭게 살던 인간들이, 갑자기 병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호락호락 내겠느냐는, 이 지적은 이런 뜻이다.
“허허허, 뭐, 트랑카벨 자작가는 매년 두 번, 왕실과 드 레뮤즈에 세금과 공물을 바치고는 있습니다만.”
“흥, 그걸 세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매년 늘어가는 세금을 부담하기 위해서 중앙 영주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가시지요.”
“허허헛, 그거 두렵습니다.”
블랑독의 반독립 상태의 영주들은 엘랑키아 국왕의 신하임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섬기지도 않는다.
때문에 세금과 공물의 납부는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왕실에서는 관리하지도 않는 땅에 더 이상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세금을 얼마나 걷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맞겠다.
“물론 초반에는 다소 혼란이 있겠지요, 라몽 백작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질서가 자리 잡을 것입니다.”
역시 준비된 대답인지 명쾌하다.
“부담이 생긴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자들은 분명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직위와 영토가 왕실에 의해 공인된다는 안정감, 후손에게 계승된다는 확신에 결국은 모두가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한다, 라고 라몽 백작은 생각했다. 실제로 모두가 그런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지금까지의 블랑독 지방이 특이한 케이스였으니까.
“허헛, 그렇군요. 허나 이 뒷방 늙은이가 동의하고, 다른 영주가 모두 동의하더라도 블랑독에 대해서 왕실에서는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한참 듣고만 있던 아롱드 자작이 입을 연다.
경작지의 규모도, 인구 숫자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떻게 영지를 분할하고 세금을 거두겠냐는 질문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재무장관 휘하의 유능한 관리들이 파견되어 확인 중입니다. 금방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벌써? 이거이거, 어지간히 준비해서 오신 게 아니군요, 재상님.”
재상의 빠른 대답에, 아롱드 자작은 유쾌한듯 받아 넘긴다.
사실 트랑카벨 가문은 제도권 편입을 피할 방도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독특한 상황이었지. 그리고 정식으로 봉신이 된다는 것이 가지는 강점 또한 분명하다.
최소한 왕실로부터 침공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외부로부터의 침공 역시 지난 이단토벌 성전처럼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상황도 줄어들겠지.
국왕의 눈 밖에서 난 독립 영지를 침공하는 것과, 국왕의 비호를 받는 지방 영지를 침공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아무리 성전이다, 주신의 명령이다 라는 구실이 있더라도 최소한 ‘자기도 잃을 게 있는’ 자들은 망설이게 될 것이다. 아무리 신앙심이 강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왕실에서 ‘이번 전쟁에서 이긴’ 영주들에게 내를 포상이 따로 있습니다.”
“아니 또 무엇을 주시려고요? 영지든 직위든 결국 책임만 늘어나는 게 아닌가요···.”
“허허허, 저희 트랑카벨 역시 이미 과분한 배려를 받고 있어서 더 바랄 게 없겠군요.”
라몽 백작은 불안함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노골적으로 말하고, 아롱드 자작은 속내를 숨기며 품격 있게 거절한다.
설령 그게 허울뿐인 포상과 훈위, 작위일지라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두 귀족의 한결같은 태도에 뮈르텔은 일종의 상쾌함마저도 느꼈다.
이들에게 변경 방위를 맡기기로 한 것은 어전회의에서 분명히 잘 판단한 일이다.
“역시 여러분의 두 가문이 사이가 좋은 것을 보니 일을 마치면 안심하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들은 라몽 백작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지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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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카렐 드 상포리앙 소백작님.”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아쥬흐 자작영애.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에트 경.”
“예,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다소 어색하게 인사했다. 이 양반은 만날 때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카렐 드 상포리앙, 벌써 한 10년은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리니 능선 전투에서 적으로 처음 만났던 청년 귀족이다.
내가 트랑카벨 가문에 고용되어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영지군과 출정했던 첫 전투였다.
그 전투에서··· 나는 금속의 경도를 높이는 기프트를 가진 카렐 경의 심장을 멈추게 했었다. 뭐, 어떻게든 도로 살려내 포로로 잡았던 것도 나였긴 하지만.
한번 ‘심장을 멈추게 한’적이 있는 상대에게는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니 뭐라고 인사해도 왠지 빈정대는 것 같잖아.
“제가 이번에 카르카냑의 트랑카벨 가문을 방문하게 된 것은, 엘랑키아 왕국의 재상이신 뮈르텔 드 생프랑보 각하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카렐 드 상포리앙은 이단토벌 성전이 블랑독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던 시기, 마찬가지로 공적인 임무를 안고 카르카냑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는 양식있는 사람이고, 백작가의 후계자라며 가질 법한 오만함도 전혀 없는 훌륭했던 청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트랑카벨 가문과 접촉이 있으면서, 왕실과 너무 가깝지도 않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모양이다.
본인은 성실하게 임무를 이행하고 있지만 괜히 찍힌 거지 뭐.
“오늘은 여러가지 임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우선은··· 왕실에서 파견된 재무 관리들이 블랑독을 조사중입니다. 이에 대해서 알리고··· 협조를 구하고 싶습니다.”
“물론 도와드려야죠.”
다소 조심스럽게 요청하는 카렐에게, 아쥬흐가 시원하게 대답한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재무 관리들의 조사는 영지를 체계화 하여 기록하고, 세금을 물리기 위한 전단계이다.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고 법적으로도 막을 근거가 없다.
하지만 ‘외지에서 온 기분 나쁜 인간들이 내 영지를 들쑤시고 다닌다’며 싫어하는 영주나 지주들도 많으니까, 협력을 구하고자 하는 거겠지.
아쥬흐도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뢰르반 전투 이후, 디타레 경과 함께했던 회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고했었으니까.
정작 나는 엘랑키아의 귀족 제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른다.
트랑카벨 자작가가 승작하여 백작가가 되나? 근데 그러면 상위 영주인 드 레뮤즈 백작가와 동격이 되지 않나?
뭐 이런 정도의 기초적인 생각이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롱드 영감님이 확실히 하기 위해서 드 레뮤즈 가문을 방문했다니···.
대체 아롱드 영감님과 ‘그’ 라몽 백작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니, 우선 만나주기는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겉으로는 양식있는 척 이야기 하겠지만, 속으로는 서로 뱃속에서 길러온 시커먼 구렁이가 더 크다며 자랑하는 엄청난 대화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 자리에 있으면 괜히 휘말려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긴 하지만.
음음, 집중하자. 나는 다시 이어지는 카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쥬흐가 나를 불러다 앉힌 것은 이유가 있어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