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신규 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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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둑해져가는 어느 저녁 시간, 레뮤즈 성 북쪽의 작은 철문은 평소와 달리 열려있었다.
왕도에서 찾아온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재상 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거, 내가 늦었구먼. 미안하네. 라몽 백작께서는 기다리고 계신가?”
“지금 모시겠습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엘랑키아 왕국의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늙은 집사에게 인사하자, 집사장 드레피니는 예의바르게 응대한다.
재상 뮈르텔은 평생을 문관으로 살았다. 드 생프랑보 가문의 남작가의 장남이면서도, 계승권을 동생에게 넘기고 자신은 관리로 남았다.
선대 국왕 시절에 처음 왕실에 들어갔으며, 그 후로 주욱 왕국의 대소사를 관리하다가, 이제는 왕실 신하의 정점인 재상 자리에 올라 있다.
그랬기에 평생을 왕실에서 서류만 끼고 보냈다.
뮈르텔은 엘랑키아 전역을 관리, 실제로 통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을 문서 위에서 읽어내는 데 능숙하다. 주로 숫자의 형태로 말이다.
오히려, 평생을 그렇게 하기 위해 바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랑키아 전역의 정보가 데이터가 되어 왕도 베르마유로 모인다. 단순 보고가 아니라, 표준화된 데이터이다.
이를 통해서 엘랑키아 각지, 심지어 왕국 영토 밖에 있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고 지방 영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그렇게 선대에 비해 윤택해진 수입은 차근차근 엘랑키아 왕국의 국고를 채워가고 있었다.
여전히 여러가지 명목, 주로 군사 관련으로 엄청난 비용이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여러 차례 전쟁을 거듭한 엘랑키아 왕국이 파산하지 않고 있는 이유의 절반 정도는 이 남자의 활약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드 레뮤즈 백작령 방문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뮈르텔이 엘랑키아 전체에서 직접 눈으로 보아 알고 있는지역이라고는, 태어난 드 생프랑보 영지를 제외하면 왕도 베르마유가 전부였다.
설령 국왕이 왕도를 비우고 친정에 나서더라도, 재상은 왕궁을 지키며 이를 뒤에서 철저하게 지원해야 하니까.
익숙하지 않은 승마에 한참 시달린, 문관들의 고질병인 척추 통증이 이 노재상을 괴롭혔지만 조금도 티를 내지 않는다.
그는 일국의 재상이다. 아무리 지방 영주들이 권리를 나누고 할거한 봉건제도의 왕국이라 해도, 그 권한을 부정하는 영주는 아무도 없으리라.
만약 뮈르텔이 피곤함을 이유로 호화로운 휴식처와 진수성찬을 요구했다고 해도, 드 레뮤즈 백작가는 싫은 티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걸 반겼을지도 모르지. 단순히 중앙 정부의 고관을 접대할 기회가 생겨서가 아니라,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엘랑키아 남부의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아 버리기 전에, 서둘러 개입해야 했다.
아직 쇠가 뜨겁게 달구어진 사이에, 왕실이 원하는 대로 때려서 모양을 잡아야 하니까.
실용적인 핵심 성채의 구조를 한, 드 레뮤즈 영주관으로 안내받은 뮈르텔이 안내받아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방이다.
가문의 큰 행사가 있다면, 백 명 이상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기는 했으나 장식이 없어 살풍경한 모습이다.
벽에 흔히 있을 법한, 무기 장식이나 늘어뜨린 가문의 깃발 따위도 전혀 없이 회색 벽이 노출되어 있다.
그 넓은 방의 한 가운데에는, 역시 열 명 정도는 둘러 앉을 수 있을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고.
이 장소의 주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마유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뮈르텔 드 생프랑보 경.”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
“뭐··· 정말로 받아들일 지는 어떤 이야기를 하실 지 들어보아야 겠지만요.”
자신의 거성으로 돌아와 충분히 쉬었기 때문일지, 라몽 백작은 평소보다 건강해보인다.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와 있고, 피부에도 최소한의 윤기는 있었으니까.
허나 국왕을 제외한 왕국의 제일가는 권력자를 앞에 두고서도 평소의 퉁명스러운 말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재상 뮈르텔은, 마치 수백년 전, 아직 왕권과 신권이 확실히 나눠지기 전 시절의 군사 귀족의 태도를 떠올렸다.
‘네가 아무리 직책이 높아 보아야, 국왕의 신하일 뿐. 나도 내 영토에서는 왕이나 다름 없다.’
라는 것이 본래 엘랑키아 봉건제 하의 질서였던 것은 맞다.
‘나는 군주 본인에게라면 몰라도, 군주의 신하에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오만하고 긍지 높았던 초창기 엘랑키아 귀족의 전통을 생각나게 했다.
그야, 재상으로서 왕궁에서 만나는 귀족들은 뭔가 아쉬워서 그를 찾아오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굽실대기 마련이다.
대귀족으로서 몇 차례 왕실을 방문한 적 있는 라몽 백작이기에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는 것 자체는 처음이다.
때문에 라몽 백작은 소문대로, 아니 소문 이상으로 특이한 인간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온 라솔의 대군을 한 달도 안 돼서 섬멸한 특이한 인간이지.’
물론 라몽 백작이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방에서 부하들을 손발처럼 움직이며 지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안다.
실질적으로 단기간에 오합지졸들을 쓸만한 보병 군단으로 조련해내고, 전장에서 능숙하게 지휘하여 승리해낸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 쯤은 당연히 왕실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참모장’으로서 한 데 묶어 놓으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지금 쯤은 ‘참모장’에게 보낸 인물도 슬슬 목적지에 도착했겠지.
어쨌든 그렇다고 라몽 백작의 업적이 완전히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단기간에 라솔의 대군을 야전에서 맞상대할 정도의 병력을 끌어 모아, 다소 알력은 있었다 해도 하나의 군대로 엮어 낸 것은 대단한 수완이다.
아무리 왕실에서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서부군에 출정을 요청했었다곤 하더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참모장’에 유능한 인간을 앉히고, 전권을 몰아 주어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히 라몽 백작의 판단이 아니던가.
왕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귀족들은 대부분, 심지어 자신이 라몽 백작과 제법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던 자들 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대부분은 라몽 백작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며, 병력을 레뮤즈 성에 집결시켜 숨죽인 채 기다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자기 영지 밖의 다른 엘랑키아 영토가 어떤 피해를 입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전부 틀렸다.
라몽 백작이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승전보가, 그것도 두 번이나 연이어서 도착했을 때 ‘자칭 라몽 백작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 허둥대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으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 지금 뮈르텔이 마주해야 하는 상대는 그 누구도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남부의 대영주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뜨거운 쇠를 두드리기는 커녕 화상만 입고 끝날지 모른다.
“이쪽은, 미리 말씀을 드렸던 블랑독의 영주···.”
그러고보니, 큼직한 원탁에는 또 한 명이 앉아있었다. 라몽 백작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힘든 일을 겨우 한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입니다. 블랑독의 영주 역시 이번 면담에 참여를 부탁드렸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재상님! 저는 블랑독의 척박한 땅에서 카르카냑이라는 작은 성을 가지고 있는 아롱드라는 촌로이옵니다. 다리가 불편해 앉아서 인사드리니 용서를 바랍니다.”
“뮈르텔 드 생프랑보입니다. 마침 트랑카벨의 영주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허허헛, 실권은 똑똑한 손녀와 손자에게 물려주고 뒷방 늙은이 신세이긴 합니다만.”
인사를 마친 세 명은 원탁에 마주앉는다.
아마도, 혹은 분명히, 이 세 사람의 권력을 합치면 엘랑키아의 삼 분의 일 정도는 들었다 놓을 수 있는 정도이리라.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디타레 경이 대략적인 내용은 전달했겠으나, 그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전령에 불과했다.
“대 라솔 전선을 책임질 신규 군 사령부의 설치와 조직에 대해 논의를 해보고 싶습니다.”
듣기 좋은 미사여구는 방금 전의 인사말로 충분하다. 그렇기에 뮈르텔의 말투는 냉정하다 못해 싸늘하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저는 국왕 폐하의 전권 사절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결론이 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라몽 백작의 눈가가 꿈틀거린다. 그에 비해 노회한 아롱드 자작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뮈르텔은 상대의 눈치를 통해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고 꺼리는지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그런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논의를 진행하고 상대를 움직이는 데 재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이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안심···을 하셨다고요?”
“그렇지요, 라몽 백작. 혹자는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이 원수 사이라고 말하지 뭡니까! 뭐, 왕실의 호사가라 불리는 자들의 정보란 그렇게 부정확한 경우가 많지요.”
“으으음···.”
“허허허, 블랑독의 트랑카벨로서는 당연히 섬겨야지요. 허허헛!”
라몽 백작의 표정이 다시 한번 썩어들어가고, 아롱드 자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당연히 일국의 재상으로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거나, 두 백작과 자작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외부의 적에 함께 맞서는 정도의··· ‘신뢰’ 정도는 있지요.”
그냥 하나의 문장이지만, 라몽 백작은 굉장히 힘들게 말하는 듯 하다.
라몽 백작은 속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지난 전쟁에서 트랑카벨 가문의 도움··· 없어서는 안 되는 도움을 받았다.
당연히 블랑독에 종주권을 가진 대영주로서 향후에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관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나 시기는 좀 천천히 정하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아롱드 자작, 젊은 나이에 과로로 사망한 선대 드 레뮤즈 백작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귀족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다른 일로 찾아와서 문안 인사를 하려 한다는 명목이라면 적당히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용무 핑계를 대며 면담을 신청했다 해도 마찬가지로 피했을 것이다. 실제로 최근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점도 있었고.
하지만 이 능구렁이같은 노귀족은, ‘공물’을 바치러 왔다.
백 정의 최신형 화승총, 천 발의 합금 탄환, 스무 통의 화약까지.
하필이면 모두가 군수품, 지금 드 레뮤즈 가문이 사무치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공납품을 검사해본 군수 장교들의 평가에 따르면, 빌어먹게도 모두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최상급품이라는 보고였다.
모두가 트랑카벨 가문의 직인이 찍힌 멀끔한 상자에 정갈하게 담긴, 보증서가 딸린 명품들.
‘최근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은 카르카냑과 몽세나에 조병창 건설을 완성했습니다. 마침 괜찮은 품질의 물건이 생산되어 드 레뮤즈 백작각하께 보여드리려 합니다.’
오로지 그것 뿐, 면담 요청조차도 없었다.
정말 싫었다. 마치 이쪽의 아쉬운 점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아서. 묘하게 선을 지키는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 가치의 물건을 가지고 온 명목상의 봉신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결국 레뮤즈 성에 머물도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고, 재상 뮈르텔과의 회담에도 참여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드 레뮤즈 백작가에도 도움이 될 일은 분명하니까.
“두 가문이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도 잘 풀릴 것 같군요.”
이 인간은 분명 알면서도 속을 긁는 것이다 라고 확신하며, 라몽 백작은 속으로 울분을 참는다. 그리고 재상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새로 생기는 군의 사령관은 드 레뮤즈 백작가에서, 참모장은 트랑카벨 가문에서 임명합니다. 두 사람, 더 나아가 두 가문이 협력하여 대 라솔 전선을 지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 폐하의 생각이십니다.”
“흐음··· 해당 직책··· 그러니까 ‘관직’은 일대에 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롱드 경. 대 라솔 전선을 지키는 사령부는 영속적인 것으로, 두 가문은 앞으로 대대로 사령관과 참모장 직위에 어울리는 인물을 추천하고, 그 권리를 세습하게 됩니다.”
“허어···.”
이번에는 아롱드 자작 역시 제법 놀란 모양이다. 라몽 백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봉신들의 병력과 자원을 공출하여 병력을 편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사령관직에는 보통 왕실에서 사람을 보내기 마련이다.
아무리 타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변경의 영주라 해도, 과한 군사력을 가진 귀족은 언제나 중앙의 견제 대상이 되니까.
그런데 지금 왕실에서는 ‘공식적으로’ 대군을 상비할 권한에 이어, 이를 지휘할 권한까지도 주겠다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권한이라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그럼 각 가문의 책임과 권한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봅시다.”
뮈르텔은 미리 가져온 서류들을 꺼내며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이 자리의 주도권을 가졌음을 확신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