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신규 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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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 정도의 남자들이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정신 없이 헐떡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억, 크흑!”
“멈추면 죽는다고! 이단자 새끼들은 사람 가죽을 벗겨서 탕녀에게 제물로 바친다잖나!”
“어흐흑, 가, 같이가!”
한명이 숨이 차 견디지 못하고 뒤처지자,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고함을 지른다. 뒤처진 남자는 이를 악물고 따라붙는다.
달리는 남자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계속해서 흘끔흘끔 뒤를 바라본다.
저 멀리서는 기병들이 서두르지도 않고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이 기병들의 추격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지형은 개활지는 아니다. 여기저기 바위가 튀어나와 있고, 맨발로 들어가기 껄끄러운 가시가 있는 덤불도 있다.
무리하게 달리면 말의 발목이 부러지거나 낙마할 수도 있는 지형인지라, 추격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는 않다.
그게 아직 기병에 따라잡히지 않은 이유이며, 덕분에 남자들의 도망길은 영 가망이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차, 차라리 싸우면···.”
“우리보다 숫자가 훨씬 많고 무장도 잘 되어 있는데, 다 뒈질거라고···.”
몇명이 이대로 도망치느니 싸우자는 의견을 내 보지만 대다수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기병과 보병 사이의 전력 격차는 차치하더라도, 남자들의 무장 상태는 좋게 봐도 형편 없다.
철제 투구와 흉갑을 걸친 자는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둘 중 하나라도 걸친 자도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기병 상대로 유용한 자루가 긴 창류 무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으며, 화승총을 가진 자도 몇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나 정신없이 뛰어왔으니, 화승의 불도 전부 꺼져있다. 아마 화약도 전혀 장전이 되어 있지 않겠지.
한마디로 온 몸을 갑주로 무장한 적 기병과 싸워서 이길 방도가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전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대로 도망친다고 희망은 없다 생각하는 부류였다. 기병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릴 숲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적은 끈덕지게 쫓아오고 있었고, 험한 지형이 끝나는 순간 바로 따로잡혀 학살당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기마 돌격은 피할 수 있는 이런 지형에서 싸워보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빌어먹을! 마귀의 땅이라더니!”
허나 어느 쪽이든, 그들은 이 빌어먹을 땅에 들어온 과거의 선택을 저주하고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주신의 가호가 닿지 않는 이단의 땅. 그곳에는 마귀에게 바친 암흑 성사의 대가로 얻은 황금과 보석이 넘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마귀를 섬기는 이단자들을 토벌하고 주신의 볕 안에 든다.
길바닥에 자갈처럼 깔려 있다는 황금과 보석을 마음껏 취한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혹한 머저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번 욕심에 눈이 뒤집히자 보이는 게 없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판단력이 멀쩡한 자들은 엘랑키아 국왕의 군대가 격퇴된 것에 이어, 법황이 소집한 대군이 섬멸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으니까.
물론 대부분은 지옥의 악마니 마귀니 하는 자들이 활보하는 이단의 땅이라거나, 길에서 발에 채이는 황금 따위의 소문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란 중의 혼란 통에, 수십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재미를 보는 것에 익숙해진 자들은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적당히 눈치를 보며 종군한다.
이기는 싸움에서는 활약하며, 도망치는 적은 용맹하고 악랄하게 추적한다.
적지의 마을이나 도시에서 벌어지는 ‘잔적소탕’ 작업에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처음부터 그런 ‘소박하고도 현실적인’ 생각 뿐이었을 것이다. 뭐, 그러다 대박이 걸리면 인생 역전을 할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이단의 땅은 생각보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복마전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탕! 타탕! 탕!
“으윽!”
“어, 어디야? 억!”
“마, 맞았어··· 살려줘!”
갑작스러운 총소리. 도망치던 동료들 중 몇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또 몇 명은 상처를 감싸쥐고 울부짖는다.
전장의 일제사격처럼 귀가 따가운 빽빽한 총격은 아니다. 몇 명 정도가 노리고 있었던 듯 조준사격의 소리.
하얗게 피어 오른 화약 연기 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도망쳐가고 있던 나지막한 오르막길의 위에서.
적지 않은 수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이쪽으로 총구를 들이대고 말이다. 아마도 자신들의 무기처럼 빈 총은 절대로 아니겠지.
하필이면 잘 닦인 투구와 흉갑이 반사하는 햇빛이 눈부시다.
“항복해라.”
맨 앞에 선 장교가 몇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한다.
“무기를 버리면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 보내준다. 자작님께서 자비를 베풀라 하셨다.”
장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하게 잘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억지로 화를 참는 것 처럼도 들렸다.
앞장선 장교 그 자신도 권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 뒤로 늘어선 십수 개의 총구였다.
“빌어먹을··· 시바알!”
이판 사판이라 생각했는지, 혹은 정말 승산이 있다 생각했는지, 가장 가까이 있던 세 명이 장교에게 달려든다. 조잡한 무기를 휘두르면서.
“이런 머저리들!”
탕!
우선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 권총에서 발사된 납탄이 맨 앞에 선 자의 명치를 관통한다.
“끄으윽!”
서걱, 하고 어느새 앞으로 겨눈 장교의 기사검이 뒤따르던 자의 목을 찔렀다.
아니 찔렀다기 보다는 적의 시야로는 칼 끝 밖에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움직여 겨누었고, 거기에 적이 달려오다 목을 가져다 댔다는 말이 맞겠다.
둘 사이의 역량 차이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아마도 목이 절반쯤 찢겨 피거품을 토해내는 병사는 검술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겠지.
“흐, 흐익! 항복···.”
영리하게도, 세번째 남자는 치켜들었던 검을 던지고 빈 손을 들어올린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 항복하면 살려준다지 않았나!”
“모두 항복해라!”
“죽여버린다고!”
기선을 제압당한데다가 총구로 위협당하며, 지칠대로 지친 무리는 곧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는다. 어차피 대부분은 싸울 각오가 있었던 적도 없다.
장교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어려있다. 당장이라도 모조리 죽이고 싶지만, 위에서 시켰으니 살려는 놓는다는 표정.
겨누어진 총구의 뒤에서 몇명이 나서 밧줄로 포로들을 묶는다. 매듭을 짓는 모습이 매우 능숙해 보인다.
“재빠른 녀석들을 덕분에 모두 잡았군요, 감사합니다. 제8 벨모제 기병 연대의 로용 드 말리크 중대장입니다.”
“덕분에 거저 먹었습니다. 제21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막생 노타름입니다.”
뒤따라온 기병들의 지휘관과, 보병들의 지휘관이 굳은 악수를 나눈다.
전공을 다투는 듯한 느낌이나, 경쟁자 끼리의 신경전은 전혀 없어 보인다.
트랑카벨 영지군 사이의 유대감도 유대감이지만, 이미 이 정도의 적, 아니 떠돌이들을 포로로 잡은 정도는 다툴 정도의 전공도 아닌 것이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포로들의 호송을 제21 연대에 맡겨도 되겠습니까?”
“맡겨주십시오. 기병대가 짐덩이 끌고 다니긴 귀찮으실 테니.”
보병 지휘관 막생 노타름은 시원하게 상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대신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묻는다.
“혹시 카르카냑에서 새로운 소식은 있습니까? 저희는 벌써 3주 째 여기서 멍청이들 쫓아 다니는 중이라서요.”
“아, 그럼 못 들으셨겠군요. 드 레뮤즈로 파견간 아군, 콘도티에레의 군대가 크게 승리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콘도티에레의 군대가 질 것으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순식간이군요.”
“예, 그리고 카르카냑에서는 군을 재편성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제가 아는 건 이 정도군요.”
“감사합니다, 로용 경!”
원래 전방에 나가있는 군인들은 후방, 그리고 다른 전선의 소식이 궁금한 법이다. 그게 좋은 소식이라면야.
돌아가는 기병들을 배웅하고 겁에 질린 포로들을 수습하며, 막생 노타름은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그는 원래 드 레뮤즈 가문의 가신인 랑두제 남작령의 하급 관리였으나, 지금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중대장이다.
원래 주군이었던 소베트르 드 랑두제 남작이 정순파 토벌을 시작했을 때, 정순파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탈주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도망치던 그들은 훈련을 위해 나와있던 트랑카벨 영지군에 의해 구원받았다.
이어진 여울목의 전투에서 민병대로 지원해 콘도티에레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그 이후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파견군에도 지원했었으나, 반려되었다. 이번 파견군은 순수하게 트랑카벨 직할 영지 출신들로만 뽑혔기 때문이다.
나중에 연대장이 미안하다는 듯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당시에는 적대하던 드 레뮤즈 백작가와 현재는 동맹 관계라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뭐 이해가는 이유이긴 했으나,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하면, 옛 주군의 주군인 드 레뮤즈 가문에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알게 된 정보를 보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
“전령! 아치요 있나?”
“옛, 중대장님!”
트랑카벨 영지군의 군복을 입은, 비쩍 마르고 키만 큰 청년이 겅중거리며 달려온다.
“연대 본부에 전령이다. 컨디션은 괜찮나?”
“최곱니다!”
둘은 마주보고 씨익 웃는다. 아치요는 막생 입장에서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떠돌이 청년이었던 아치요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훈련 중인 트랑카벨을 찾아 소식을 전했기에 살안마을 수 있었으니까.
“이 편지를 연대장께 전달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중대장으로, 아치요는 연대 전체에서 가장 빠른 준족의 전령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거, 거기 대장 양반!”
“뭐요?”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끌려가던 포로 중 하나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포, 포로의 가죽을 벗겨 제물로 바친다는 게 사실이오? 내, 내 품 속에 은화가 좀 있으니 나좀 제발···.”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끌고 가!”
화를 참지 못한 막생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포로가 두 눈을 감으며 움찔한다. 저런 헛소리는 대체 누가 퍼뜨리는지.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지만, 위에서 정한 정책이었다. 말로는 블랑독 지방이 얼마나 철통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지 외부에 알리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헛소문만 퍼져가는 모양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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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쥬흐 마님, 앗, 아니··· 아쥬흐 대장님!”
“무슨 일이죠?”
밖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며 문을 탕탕 두드린다. 병상 곁, 불편해보이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던 아쥬흐 트랑카벨은 궁금한 기색으로 문가로 향한다.
병실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튼튼해보이는 철문이 살짝 열리며 잔뜩 상기된 얼굴이 드러난다.
“무슨 일이죠, 리타 양? 소란은···.”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께서 도착하셨어요! 정문에서 소식이 왔어요!”
“저, 정말인가요! 으흠, 흠, 리타 양,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앗, 죄송해요··· 대장님. 그래도 소식이 오는대로 알려달라 하셔서··· 기대하셨잖아요!.”
“기대라니, 아니에요! 저는 음··· 맞아요, 급한 공무가 있어서···. 그랬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저도 곧 가도록 할게요.”
“넵!”
호들갑을 떨며 소식을 전한 간호사 리타 드 리스바쥬가 문을 닫고 떠나자, 아쥬흐는 작게 한숨을 쉬며 원래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온다.
가급적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어딘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
“랑시아 성녀님,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서 실례를 범해야겠네요.”
그녀가 정중하게 말하는 대상은, 아쥬흐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있다고 할까.
검소하지만 청결한 담요를 반쯤 걸치고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은 다름아닌 포로로 잡힌 주신교의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였다.
그녀의 살아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비쩍 말라있었다.
그 뼈만 남은 팔목에는 단단한 가죽 끈이 묶여 병상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툭 튀어 나온 눈은 흐린 채로 말 그대로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 반응 없는 상대를 보며, 아쥬흐는 한숨을 푹 내쉰다.
“오늘 대화는 즐거웠어요. 그래도··· 다음 대화는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또 뵐게요.”
상대가 반응을 하거나 말거나, 정중하게 인사를 한 아쥬흐는 품위있는 걸음으로 철문을 열고 방을 나선다. 그녀의 발걸음은 묘하게 서두르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지껏 꼼짝도 하지 않고 생기 없는 듯 보였던 성녀 랑시아의 눈이.
마지막 순간 기묘한 지성으로 번뜩였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