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신규 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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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나, 이쪽 바위 언덕 두 곳을 기록해 줘.”
“네에, 콘도티에레. 어라? 물방울?”
“으음?”
강가에서 지형을 살피고 있던 나는 첼레스티나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진다.
“아앗, 비가 오네요!”
첼레스티나가 황급히 들고있던 종이 뭉치를 방수처리된 가죽 가방에 넣는다.
비가 내린다.
가뭄이 심했던 이스키비르 유역에는 소중한 단비였다.
계절상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하는 지금은 너무 늦었나도 싶지만, 그래도 오지 않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방수천 덮어! 이쪽으로! 이쪽으로!”
“자, 하나 둘!”
“당겨! 당겨라!”
하지만 갑작스러운 비는 행군 중인 부대에는 큰 재앙이다.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천을 둘러 쓴들, 비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고했다. 모두 제자리로!”
“땅이 물러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보급부대 장교들이 마차 바퀴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다.
갑작스러운 비는 인간과 말의 발걸음을 모두 느려지게 한다. 하물며 수레의 경우에는 말 할 필요도 없다.
격발시에 불을 쓰는 화승총은 아예 사격 불능 상태가 되고, 부싯돌 충격시 불꽃을 이용하는 수석식이나 치륜식도 불발률이 대폭 올라간다.
때문에 총병들은 자기 몸보다 소중하다는 듯, 총을 둘둘 말아 보듬어 안는다.
지금 쏘진 못하더라도 물에 심하게 젖으면 나중에도 못 쏘는 일이 생긴다. 화승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전투를 앞둔 행군은 아니라 다행이다.
물에 젖은 몸과 옷은 평소보다 무겁고, 미끄러지기 쉬운 지면은 체력을 쉽게 빼앗아가니까.
“콘도티에레, 강변 도로를 통해 귀환하기로 한 것이 고생길이 되면 어떡하죠?”
“그러게. 그래도 아직은 폭우가 아니니 지켜봐야지. 지금 위치가 어디쯤이지?”
“조금만 더 가면 드 누아 영지예요, 콘도티에레.”
“비가 더 심해지면 숲에 들어가서 쉬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은 무리하진 말자고.”
이번 라솔과의 전쟁, 생뢰르반 전투와 로그포르 전투는 역대급으로 전장 정리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일단 결코 규모가 작지 않은, 만명 단위의 병력이 충돌하는 전투가 두 번 아주 짧은 기간을 두고 이어서 벌어졌다는 점.
게다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전장에서 갑주와 무기를 회수하고 시체를 묻거나 태우는 것은 대체로 승리자의 몫이니까.
아닌 경우도 있지만 엘랑키아 땅에서 벌어진 전투이니, 이번에는 우리가 하는 게 맞았다. 힘든 전투를 이겨낸 병사들이 만난 또 하나의 벽이었으리라.
다음으로 노획한 막대한 물자를 수습하고 분류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은, 강을 건너 공격해온 적을 격파하고, 도로 강 건너 쫓아보낸 전개였다.
그렇다는 것은 적은 거의 모든 장비와 물자를 버려놓고 몸만 도망쳤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물었다 해도 평소라면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는 강이다. 그러니 기병이면 모를까, 보병들은 갑주까지 입고 강을 건너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덕분에 로그포르 전투가 끝난 직후, 이스키비르 강변에 산더미처럼 쌓인 갑주와 각종 무기는 나나 첼레스티나도 놀랄 정도의 막대한 양이었다.
상태가 좋아 그냥 재활용해도 될 흉갑만 5천 벌이 넘었고, 장창과 화승총이 각각 2천 개가 넘었으며, 화약과 식량 같은 소모품들도 비슷한 양이 회수되었다.
거기에 수레와 짐말과 같은 전투 물자는 아니지만 군대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필수 물자들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두 전투에서 노획한 라솔의 야포도 40문은 넘었으니, 사실상 무거운 짐은 다 버리고 간신히 도망쳤다고 해야겠지.
일부 야포에 적은 화문에 못을 박거나 포가를 부숴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긴 했지만 이건 시간을 들여 수리하면 바로 사용 가능한 문제다.
생뢰르반에서 회수된 분량을 합치면 정말 1개 야전군을 새롭게 편성하고도 남을 양이다.
신구 군 사령부··· 디타레 경이 언급했던 게 정말 사실인지, 실제로 설치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느새 내 머리속은 그걸 반영해 돌아가고 있다. 고약한 노릇이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에휴, 뭐든 기대하면 실망하니까···.”
“네에? 콘도티에레, 뭐라 말씀하셨나요?”
“아, 아니야. 그냥 혼잣말.”
자포자기한 심정이 말이 되어 나온 모양이다. 뭐, 살면서 내가 바라는대로 되었던 적이 얼마나 있던가.
한때는 영웅이라도 된 듯, 높은 뜻을 가지고 살았던 적도 있긴 했는데. 세상 무서운 줄 알게 되면서는 다 포기하게 되었지만 말이지.
사실 생각해보면 이 전쟁에 휘말린 것 부터가··· 아쥬흐의 반쯤 억지에 맞춰주다 보니 그랬고···.
그냥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구호만 거창하지 별 것 없는 지방 분쟁일줄 알았던 전쟁은 상상 이상으로 격화 되었고···.
결국 이웃의 대영주에, 적대적인 이웃 나라에, 국왕 폐하까지 얽혀서는 뭐 내가 손도 대 볼 수 없는 수준으로 저 혼자 마구 굴러가게 되었구나.
그래서 내가 나락으로 빠져들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전쟁은 어렵고, 공들여 키운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비겁하게도, 일련의 싸움을 겪으면서 나는 충만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용병 은퇴의 이유 중 하나였던 손떨림도 최근에는 많이 잦아들었다. 정말 아쥬흐의 말대로 심리적인 원인이었던 것인지.
왕실에서 멋대로 통보하듯 떠들었던 신규 군 편성인지 뭔지로 사태가 어디까지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진짜 그냥 몸을 맡기고 있다.
이제는 뭔가, 상황은 통제하지 못해도 최악으로 흘러가는 패는 뽑지 않는 요령이 생겼달까?
괜히 거대한 파도에 정면으로 버티다 힘 빼는 대신, 적절한 여울이나 모래톱이라도 찾아놓는 격이지.
휴우, 블랑독으로 출발하기 전, 사령부 회의가 생각난다.
‘국왕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디타레 경이 전달한 말을 무시할 수는 없겠소. 일단은 정식으로 칙명이 내려올 때 까지는 기다려야겠지만··· 블랑독, 트랑카벨 가문과 이야기는 해둘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말한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얼굴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남자의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왠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정말 표정 관리 하느라 힘들었다.
‘우리 드 몽파르지에도 온 힘을 다해 돕겠소이다! 아니, 아닌가··· 사실 우리도 도움 받을 일이 있겠지.’
최근들어 사람이 상당히 변했다고 느껴지는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은 말을 좀 조심하는 느낌이다.
뭐, 신규 군이 편성되면 인접한 서부군과는 제휴를 할 수 밖에 없겠지. 맡은 지역이 좀 다르긴 하더라도 주적이 라솔 왕국으로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아군이 얻은 것들, 노획물과 군수품, 포로를 분배해야 하겠소.’
올 것이 왔구나 느꼈었다. 지금까지는 블랑독 연맹군 단독이었고, 거기에 지방 도시의 민병대 정도가 포함되는 정도였으니 이런 논의는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군수품 대부분을 트랑카벨 가문이 대고 있었으니, 적절하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데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 자리의 맹주는 드 레뮤즈 가문.
가장 서열이 높은 것은 드 몽파르지에 가문.
가장 큰 전공을 세운 것은 트랑카벨 가문··· 이니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전장을 바삐 뛰어다니며, 가장 많은 적을 상대했던 것이 트랑카벨의 병사들이 아닌가.
금화 한 닢, 식량 한 자루가 탐이 나서가 아니다. 예로부터 전공의 가장 확실한 확인은 전리품 분배라는 것이니까.
용병들의 전공이 평가절하당하고, 시답잖은 활약을 한 같은 전장의 귀족군에 전공을 몰아주곤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뭐, 그때야 어차피 용병료만 받으면 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지.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아무리 격에서는 비교도 못하게 밀리는 자작가문이라고 할지라도, 이번에 우리 병사들이 흘린 피는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겠다.
그러니 적어도 동등한 입장인 1:1:1 분배라도···.
‘트랑카벨 가문이 절반, 나머지를 앙비토 공의 서부군과 우리 드 레뮤즈가 나누도록 합시다.’
···하려고 했는데 라몽 백작이 선빵을 쳐 버렸다. 그보다 ···절반을 양보하겠다고? 이건 통이 큰데.
‘이의 없습니다, 백작님. 우리 서부군은 더 박한 대우를 받아도 할 말이 없구려···.’
앙비토 공작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한다.
‘본인도 그 점에 대해 한소리 하고 싶은 심정이오만, 앙비토 공작과 서부군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점 까지 평가절하할 수는 없지 않겠소.’
라몽 백작은 여전히 엄청나게 화가 난 표정이지만, 그 찌푸린 눈에는, 정말 놀랍게도, 약간은 기특한 동생을 보는 듯한 빛이 있었다.
앙비토 공작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전쟁에서 서부군의 행동은, 실로 졸렬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한 적과 마주했다고는 쳐도, 기병도 보병도 전투 초반에 전장을 이탈했다. 나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어진 추격전에서는 일부 기병대가 명령도 없이 이탈해 내 속을 썩이기도 했었지.
···솔직히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엄청난 사망자를 생각하면 울컥 올라오는 게 있긴 하다. 화내고 욕이라도 하고 싶단 말이다.
서부군이 붕괴해 도망치는 바람에, 지키지 않아도 될 측후방을 지켜야 했고, 여기 투입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는 힘든 싸움을 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서부군을 마냥 비난하기만 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서부군은 엘랑키아 남부와 서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야전군이다.
향후 그 새로운 군인지 뭔지가 생길지는 몰라도, 라솔과 전쟁을 하려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니까.
거기에 더해서··· 생뢰르반 전투 전의 앙비토 공작과, 전투 후의 앙비토 공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각성했다··· 라는 표현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현재의 앙비토 공작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은 그게 아닐까?
내가 뭐 내려다보는 대단한 입장은 아니지만, 한번 붕괴하여 전장을 이탈한 보병 연대들을 수습하고 재편성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온 것은 상당한 수완이다.
갑자기 지휘력을 발휘했든, 병사들의 감성에 호소했든, 아니면 그냥 가문 빨이든 운이든 상관 없었다. 지휘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재능’이니까.
실제로 앙비토 공작은 병력을 고스란히 수습해 전장으로 돌아왔고, 아직은 싸울 힘이 남아있던 라솔 군의 후방을 위협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게 결정적으로 승리라는 물이 가득한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방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이후 이어진 추격전에서는, 폭주하여 뛰쳐나간 귀족 기사들을 수습해 복귀하지 않았던가? 이 또한 나름의 지휘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런 점들은 참모장으로서, 총사령관인 라몽 백작에게 보고했었다. 어쩌면 그런 점이 이런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라몽 백작은 은근히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감정적으로 불만이더라도 향후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쪽에 배팅했겠지.
아무튼 나 역시 앙비토 공작에게 과도하게 망신을 주고, 책임을 지우는 것에는 반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좀 다른 생각도 있었다.
‘배려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공작님. 다만 한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향후 포로 석방 협상에서 지불될 몸값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번에 저희는 사상자가 많아서···.’
자세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는다. 이번 파견군의 사망자는 상당수가 트랑카벨 가문의 하급 귀족과 평민이 대부분이고, 보상이 필요하다고.
아무튼 이번에 포로의 숫자는 7천 명이 훌쩍 넘는다. 거기에 연대장급 고급 장교와 귀족들도 다수 포로로 잡았으니, 상당한 금액을 예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머지, 곧바로 재활용할 수 있는 무기와 갑주, 그리고 군수물자들은 드 레뮤즈 가문에 위탁하고 싶습니다.’
‘흐음, 이유는 무엇이오?’
‘새롭게 군을 편성하려면, 어차피 다시 쓰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호오, 그렇겠구려! 그럼 우리 서부군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이다!’
내 말에 앙비토 공작은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어차피 이 사람도 필요한건 물자 그 자체보다는 전공에 맞춰 분배를 받았다는 ‘사실’일 테니까.
하지만 라몽 백작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들어갔다.
아··· 이 사람은 정말로 싫어하고 있구나.
어떤 점에서 왕실이 주도하여 편성한 야전군이 새로 생기고 자기가 거기 수장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비용 부담이야 있겠지만, 왕실에서 교부금도 나올 테고 가문의 격 또한 오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좋아할 법도 한데···.
라몽 백작은 그런 것 없다. 그냥 싫은 건 싫은 것이고, 전쟁은 죽도록 하기 싫은 모양이다.
‘...바라지 않는 미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백작님.’
뭐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었다. 앞으로의 일에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가분하게 끝났었지. 짐도 줄였고 말이다.
그런 망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치고 있었다.
으··· 망토가 눅눅해지고 등짝에 들러붙어서 불쾌하다. 해가 좀 났으면 좋겠는데.
찐뜩하게 달라붙는 젖은 망토를 털어내고 있는데, 첼레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콘도티에레, 전령이네요!”
“전령? 어디서?”
“카르카냑의 아쥬흐 트랑카벨 의무대장님의 전갈이네요! 모든 의무에 우선하여, 콘도티에레 에트는 시급히 귀환할 것! 이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