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53화 (353/556)

36-22. 승리자의 영광

적이 대열을 버리고 도망친다.

아우성대는 소리와 첨벙대는 소리가 강가를 비롯한 주변을 가득 채운다.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든 이스키비르 강은 어떻게든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이 드러날 정도의 깊이이다.

몸을 가볍게 하고 물에 익숙하다면 헤엄을 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허우적대며 건널 수 있는 정도의 깊이임은 분명했다.

그마저도 못한다면···.

새로운 한 무리의 도망자들이 라마엘의 눈에 들어왔다. 휘하 병력의 눈에도 말이다.

적이 거의 불이 꺼진 바리케이드를 넘어 도망치고 있었다.

드디어, 라는 생각에 라마엘의 눈이 커진다.

일부는 강쪽으로 우회해서, 일부는 타오르며 무너진 장작더미 틈으로 나무토막을 놓고 넘어서.

아무리 불이 꺼졌다고는 해도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기인지라, 상당수는 벽을 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군다.

그러거나 동료들의 나뒹구는 몸을 밟고 더 많은 수가 넘어온다. 공포에 질린 도망자들은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라마엘은 시급히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도록 신호했다.

저들은 라솔의 침략자들이다.

지금은 저런 형편없는 꼴이지만, 혼란에서 벗어나면 다시 위협적인 전사가 될 것이다. 게다가 드 레뮤즈의 영토로 숨어들면 골치아픈 위험 세력이 될수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대로 구경만 하며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계획대로 대열을 정돈한다!”

“무장병은 앞으로!”

이제야 자신의 차례가 왔다며 신을 내는 자도, 막상 전투가 시작된다니 긴장한 모습인 자도 보였다.

분명 라마엘이 어쩌다보니 지휘하게 된, 이 작은 잡탕 경비대는 준비된 적과 싸운다면 조금도 견디지 못하리라.

하지만 지금 그들이 마주한 적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아니, 그 뿐이 아니라 절반은 무기조차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 역시 이미 정신은 반쯤 놓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잡탕 부대로 두들겨 패기에 딱 적절한 상대였다.

“후우···.”

전투를 결심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 날, 로그포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변경의 작은 마을을 방문한 날이 떠오른다.

거대한 장작 더미 주변에 빙 두르듯 매달려 있던 열 구의 어린아이의 시체.

한 가운데 한 더미가 되어 뭉쳐있던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시체.

눈물과 땀을 함께 흘리며 무덤을 팠다. 무덤을 만들어 줘야 할 의무는 없었으나, 그냥 두고는 도저히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마엘 드 레도쿠르나, 함께하는 가신들이나 귀족이거나 가문을 섬기는 향사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군소리 없이 무덤을 만드는데 동참했다.

목각인형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탄화된 시체들은 가지런히 눕히기도 힘들었다. 뒤엉켜서 신체 일부를 손상시키지 않고는 떼어낼 수 없는 시체도 많았다.

그 날의 생지옥이 벌어졌던 로그포르는 이 전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만약 적이 포위망을 돌파해서 더 상류쪽으로 올라간다면, 금새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로그포르에 도착하리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지켜주지 못했으나, 참혹하게 죽어간 마을 사람들이 쉬고 있는 장소를 라솔 놈들이 밟게 할 수는 없었다!

“티에넬, 네가 좌측을 맡아라!”

“감사합니다, 라마엘 경.”

“너희 부대가 뚜껑이 되어 문 열리듯 돌격해 정면에서 적을 막는다.”

“그리고 본대가 옆구리를 치는 것이군요!”

“정확해. 맡기겠다!”

“옛, 적은 한 놈도 못 지나갑니다!”

레도쿠르 성 집사장의 둘째 아들, 티에넬이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떠나간다.

티에넬은 기사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온순하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 집사장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고용인을 총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마엘은 기억한다. 삽을 집어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누구보다도 분해하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영지로 돌아가서도 몇 번이나 로그포르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려 괴로워하며 복수를 다짐했었다.

그러니, 중요하고도 위험한 측익을 맡겼을 때 ‘고맙다’라는 대답을 했겠지.

“자, 지금부터 조용히 한다.”

일단은 기습이니 수풀 속에 가급적 몸을 숨기고 무기를 눕혀 시선을 피한다.

허나 바로 근처의 대규모 전장에서 끝없이 소음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거의 정신을 놓은 도망병들은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어 보였지만.

“발사!”

“발사아!”

탕! 타앙! 탕!

몇 자루 되지는 않지만, 그 어느때보다 강렬한 분노를 안고 총기들이 불을 뿜는다.

숫자가 좀 더 많은 궁수들도 일제히 시위를 놓고, 돌팔매질에 자신 있다던 자들은 미리 골라둔 자갈을 날린다.

평소의 타라트라바 연대라면 콧웃음 칠 정도의 조잡한 공격이지만, 지금 부대도 마음도 산산조각나 흔들리는 도망병들에게는 청천병력이나 다름없었다.

“돌격! 나를 따르라!”

“우와아아아아아아!”

왼쪽에서 티에넬이 이끄는 ‘뚜껑’ 부대가 먼저 돌격을 개시한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적의 격렬한 대응사격은 없었다.

속으로 다섯까지 센 다음, 라마엘 역시 공격명령을 내린다.

“돌격! 적을 끝장내라!”

아마도 구경꾼은 커녕, 전장 근처에 올 일도 없었을 운명의 오합지졸 경비대가 그 기세를 폭발시킨다.

“이야아아아아!”

혹시 아란 제국 시절의 유물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녹투성이인 사슬 조끼를 입은 장년의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라마엘을 스쳐 지나간다.

장대에 송곳을 고정했을 뿐인 조잡한 창을 들고 있으나 그 사나운 기세는 진짜였다.

라솔 군이 자기 형님 가족을 몰살했다고 분통을 터뜨리던 것을 기억해낸다.

“끄으윽!”

그쪽을 노리며 총을 겨누던 적병이 비명을 지르며 총을 떨군다. 누군가가 던진 돌팔매가 정확히 그의 얼굴을 맞췄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돌격 거리는 매우 짧다. 미처 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타라트라바의 숙련병들라 해도 소용없다. 패잔병이고, 기습당했고, 수적으로도 밀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조잡하고 무질서한 정돈되지 않은 돌격, 날카로운 창 보다는 녹슬고 이가 빠진 톱날이 생각나는 돌격이지만 적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비록 주 전장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로그포르 마을의 작은 복수전은 그렇게 격렬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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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라마엘과 휘하의 임시 부대는 나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투가 일단락 된 이후에도 그들은 전장에 남아 전후 정리를 도왔다.

자신들이 쌓아 올렸던 장작더미를 길 옆으로 치우는 한편, 도망친 라솔 군의 말들을 붙잡아 모으고, 버려진 적의 보급마차를 수거하는 등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절반 정도는 자진해서 남아 주변을 순찰하며 도망병들을 색출해냈다.

원래 인근 주민들이 대부분이니, 지리도 밝았고 다른 주민들과의 협력을 얻기도 쉬웠다.

결국 적지 않은 라솔 군 도망병들이 붙잡혀 끌려 나왔다.

분노하고 흥분한 병사들이 과도하게 린치를 가해 죽는 경우도 있었기에 라마엘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를 말리느라 진땀을 뺄 정도였다.

그렇게 열성적인 지원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혼자 돌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라마엘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책임지고 지휘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본진으로 가장 늦게 귀환한 이유 중 하나였다. 소수이지만 호송해야 할 포로도 있었고 말이다.

“이 녀석, 늦었구나!”

“아, 아버님!”

본진으로 돌아온 라마엘을 가장 먼저 맞이해준 것은 아버지인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었다.

“늦은 데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보고서를 미리 보내드렸지 않습니까?”

“으흠, 흠. 그래도 이번에는 그럭저럭 한 명 분은 한 것 같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참모장, 트랑카벨의 에트 경의 혜안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전부 예상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야 뭐··· 백작님께서도 인정하신 사람이 아니겠느냐. 우리 드 레뮤즈 보병대의 성공도 절반은 그 사람의 몫이었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다행히도 작은 상처도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부자답지 않은 대화가 잠시 오간다. 그러더니 전쟁 이야기가 아니면 아무 대화도 나눌 게 없는 것처럼, 어색한 침묵이 자리한다.

“...잘 싸웠고 잘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아버님께서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라몽 백작님께서는 별 일 없으십니까?”

“다행히 지금은 괜찮으시다. 속히 가서 인사를 드리거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릴리에게 편지가 왔으니 나중에 읽어보거라.”

“릴리한테요? 정말입니까?”

그렇게 한참 후에야, 부자 사이의 부자다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평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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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의 수도, 베르마유의 왕성이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수도답게, 내부의 사람들은 어두워진다고 결코 업무를 멈추지 않는다.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는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 국왕 다고베르 2세를 방문했다.

나른한 표정으로 유리잔에 든 붉은 액체를 홀짝이고 있던 국왕은 늘어진 자세로 재상을 맞이한다.

“쉬고 계신데 죄송합니다, 폐하.”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 않나요. 재상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자, 또 무슨 일인가요?”

재상 뮈르텔은 국왕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라고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고베르 2세가 저녁 식사를 늦게 한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식사를 늦출 만큼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다소 경박하고 낙천적인 경향이 있긴 하지만, 다고베르 2세는 무능한 군주도 아니고, 어리석은 군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는 나라 안팎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있다 보니 과도한 업무에 치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소한 업무는 재상부나 궁내부에서 가급적 처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최종 결정권자의 의향을 물어야 하는 일은 언제나 넘쳐나기만 했고.

그래도 가급적이면 국왕의 휴식 시간을 존중해주고 싶긴 하지만, 이번 안건은 도저히 내일까지 늦추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내일 아침에는 왕성 베르마유를 떠나 있을 테니까.

“폐하, 드 레뮤즈 백작의 군대가 라솔 상대로 승리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상세한 보고를 보지 않았나요? 대단한 승리였지만, 어둠 때문에 섬멸은 실패했다고··· 아쉬운 일이지만.”

“아닙니다, 폐하. 생뢰르반에서 벌어졌던 그 전투 말고, 또 한 차례 승리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결정적인 승리로 보입니다.”

“뭐요? 며칠이나 지났다고! 거짓 보고일 가능성은 없고?”

다고베르 2세는 경악한 표정으로 묻는다.

지난 전투에서 주도권은 완전히 가져왔고, 양군의 전력 차이도 결정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니 이제 좀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라솔과의 전선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승전보가 온 것이다.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너무 좋은 소식이라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전투와 전투 사이의 텀이 너무 짧았다.

“예, 디타레 경의 보고입니다.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 돌아가려는 적을 따라잡아 패퇴시켰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승리라면 어느 정도 결정적인가요?”

“현재 적군은 완전히 격멸되어 생존자들은 강을 건너 패퇴한 상황으로, 패잔병 소탕 중이라고 합니다. 예, 엘랑키아가 또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허어··· 라몽 백작이 정말로 해냈구만···.”

뮈르텔의 목소리는 다소 들떠있다. 왕국 전체를 냉정하게 경영하는 재상의 입장에서도, 숙적과의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는 그만큼 기쁜 일인 것인지.

“하지만 디타레 경이 큰일입니다.”

“왜죠? 설마 전투 중에 큰 피해라도?”

“아닙니다, 전혀 전투에 참전할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합니다. 다만, 디타레 경이 가진 지침은 아직 라몽 백작과 남부 영주들이 전쟁중인 상황을 가정한 회의 결과니까요.”

“으음, 너무 빠른 속도로 상황이 변했군···.”

어전회의에 참여한 대신들이나, 국왕군의 핵심 간부들도 대부분 이번 전쟁은 최저 내년까지는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디타레 드 카울 경에게 내려진 역할은 그런 상황을 가정한 것이 당연했고.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재상. 정식으로 사절을 보내야겠군···. 포상에 대한 논의도 해야 할 테고···.”

다고베르 2세의 표정이 흐려진다. 이건 일개 가문에 얽힌 일이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전쟁이 끝난 뒤처리를 해야 하는 일이다.

또 얼마나 많은 회의가 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결정사항이 업무실의 책상 위에 쌓일 것인지. 생각만해도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때는 이미 새로운 남부 질서가 자리잡을지도 모릅니다. 왕실에서 원한 것과 무관하게요.”

“으음, 그럼 어쩐다.”

“그래서 감히 청컨대, 소신을 전권사절로 보내주시겠습니까?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고, 아직 변하는 과정에 있는 남부 영주들을 두드려서 알맞는 모양새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오···.”

수완이 훌륭한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아니다. 절차를 중시하고,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성격이 급하고 편법으로라도 수행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주장하는 쪽은 국왕 본인이었고, 말리는 것이 재상이었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국왕인 자신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좋든 싫든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눈 뮈르텔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 뿐이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뮈르텔 재상. 관련하여 전권은 맡길 테니.”

“감사합니다, 폐하. 내일 새벽에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바로! 급하게도 움직이시는구려··· 알겠소.”

“재상부의 관리들은 유능합니다. 제가 없어도 큰 문제 없이 폐하와 대신들을 보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휴우, 또 내 일이 늘어난 다는 말이군. 빨리 다녀오세요 재상.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을 테니.”

“예, 폐하. 저는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뮈르텔 재상의 머리속에서는 벌써부터 준비할 일과 시작할 일의 우선순위가 정리되고 있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엘랑키아 남부의 영주들은 매우 뜨거운 상태이다.

그냥 놔둔다면, 제멋대로 굳어버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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