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1.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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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이스키비르 강변, 로그포르 마을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가신들과 함께 좀 늦게 생뢰르반 주변의 주둔지로 귀환하고 있었다.
드 레뮤즈 영지군의 보병대장,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의 장남인 그는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드 레뮤즈 영지로 향했었다.
레뮤즈 본성을 비롯한 주요 방어 거점에 연락을 하는 한편, 본인은 남부 지역으로 내려왔다.
연락이 가기 어려운 변경의 작은 마을들에 경고를 직접 전하기도 하고, 참모장의 명령대로 적을 방해하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가신들은 주변의 작은 영지들에 사람을 보내 사람을 모았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이름으로 각 영주들로부터 수비군의 일부를 지원받고, 일반 영민들 사이에서 보상을 약속하고 노무자들을 모았다.
절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에서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고 이렇다 할 무기도 없는 무리는 의미가 없다.
단지 주변에서 나무를 베고, 마을의 울타리와 문짝을 징발하고, 크고 작은 바위를 옮겨 적의 도주를 방해할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라마엘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각 영주들은 주어진 의무 이상의 수비 병력을 보내왔고, 영주 본인이 직접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일반 영민들 역시, 금전적 보상에 혹한 경우도 있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처음에는 사람만 많으면 몇 분 정도면 치울 수 있는 큰 의미없는 통나무 더미에 불과했던 바리케이드가···.
로그포르 마을 부근에 이르러서는, 이건 성벽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와 밀도를 가진 거대한 잡동사니의 장벽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주변 지리에 밝고 노동에도 익숙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면서 작업 자체의 효율도 말도 못 하게 올라갔다.
아예 기사님들은 구경이나 하시다가 나중에 힘이나 보태달라고 하면서, 저희들끼리 일을 진행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절정은 인근 어촌에서 썩어가는 생선을 산더미같이 가져와, 그 기름을 뽑아 바리케이드를 적셨던 것이다.
아마 라마엘과 ‘기사님들’이 직접 지휘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기 때문이다.
생선기름은 냄새가 끔찍하고 불도 잘 붙지 않았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집요하게도 잘 타들어갔다. 전투 당일날 증명된 것처럼 말이다.
라마엘이 의외의 열성적인 지원을 받게 된 것은, 여기가 드 레뮤즈 남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주 라몽 백작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출정하여, 라솔의 침략자들을 대파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진작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소식을 듣고도 몸이 달아오르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병력 파견을 면제 받은 소영주나, 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하급 귀족들이 너도 나도 뛰쳐 나온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이 된, 에드메르 공작이 이끄는 오렌시아 기사단의 악행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로그포르를 비롯한 여러 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그 주민들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참혹하게 학살한 사건 말이다.
거기에는 가족이나 친척도 있었고, 사업이나 시장 거래를 통해 협력하고 얼굴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걸 말로 표현하기도 싫을 정도로 참혹하게 학살했던 사건을 주변 사람들이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결국 그 범인들은 라몽 백작에 의해 불구덩이에서 고통스럽게 타죽으며 죄값을 치렀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이번 전쟁이 그 사건의 연장, 복수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자진해서 라몽 백작의 소집령에 응해 구슬땀을 흘리고 사재를 털어가며 바리케이드 건설을 도운 것은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간발의 차이로 바리케이드 건설을 마치고 모두에게 피난하라 전했을 때, 라마엘은 깜짝 놀랄 정도로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자신들은 싸우러 모인 것인데, 어째서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변경의 소영주부터 평범한 소작농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난리를 쳐대는데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어느새 임시로 만들어진, ‘드 레뮤즈 남부 경비대’는 불타오르는 바리케이드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배치’되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제법 근사하고 멋지지만 시대착오적인 갑주로 무장한 기사가, 무기라고는 나무 막대기와 가죽 주머니에 잔뜩 담긴 투석 뿐인 농민병이 뒤섞인 괴상한 경비대였지만 말이다.
명목상은 혹시라도 적이 바리케이드를 뚫고 행군해오면 기습하겠다는 목적이었지만···.
억지로 벼락치기 경비대의 지휘관이 된 라마엘 드 레도쿠르로서는 이들을 이끌고 실전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전장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었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는 개인의 용기와 기마술, 창술과 검술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망상하던 얼치기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사각 밀집대형들이 격돌하고, 온갖 무기와 전술을 통해 철벽과도 같은 밀집 대형을 또 무너뜨리는 장면을 직접 경험한 그였다.
만약에라도 준비된 적을 상대로 이 벼락치기 부대가 공격한다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촘촘한 창벽에 막혀 허우적대는 사이, 측면에서 쏟아지는 일제사격의 화력에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어쩌면 제대로 교전에 들어갈 틈도 없이,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당해 무수히 많은 시체만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런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라마엘은 그들을 놔두거나 억지로 해산시킬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들이 ‘필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긴장감과 질서를 유지할 테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이런 잡탕 부대로라도 적의 후방을 공격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작된 ‘로그포르 전투’는 라마엘의 걱정을 단숨에, 시원하게 날려버려 주었다.
나무 중턱에 어정쩡하게 설치된 ‘지휘소’에서 전장을 내려다본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장려함 그 자체였으니까.
라마엘은 지금도 누군가 설명하라면,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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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 시간은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적을 서둘러 추격해온 아군 보병이 적의 후미를 감싸고, 기병들이 그 측방을 차단했다.
숲과 언덕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기병대의 모습은 라마엘 자신이 소속되기도 한, 드 레뮤즈 백작가의 기병대가 분명했다.
첫 공세는 소극적이었다. 후미쪽의 보병이나, 측방의 기병이나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적의 전력을 깎아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유난히 요란한 아군의 포격 역시 적진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부서진 나무 파편, 그리고 이따끔 치솟는 피안개가 포병이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그 순간.
평생, 임종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조차도 잊지 못하도록 망막에 새겨질 그 기병 돌격.
두 개의 강철 창이 적의 약점을 꿰뚫더니, 순식간에 적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이겼다! 이겼다고!”
“적이 쓸려나가고 있어!”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자신처럼, 나무에 올라 전장을 구경하던 손재주 좋은 병사들의 반응이었다.
벼락치기 부대에 기강을 기대할 수는 없는데다가, 라마엘 자신도 전장의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으므로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적진이 흔들리고, 기병과 보병이 혼성된 일부 정찰병이 강물로 들어간다.
분명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수심을 확인하는 것이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은 좁고 긴 몇 개의 대열을 이루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아니 시팔, 저걸 그냥 보내?”
“으아아아, 개새끼들!”
“기사님, 기사님! 이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답답한 마음은 라마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생뢰르반에서, 그리고 이곳 로그포르 전투에서 적을 두 번이나 깨부수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 앞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무리해서라도 지금 나서야 하는가.
아니, 소용 없다. 이제 불이 꺼져가는 바리케이드는 적에게 방해가 되는 만큼, 라마엘과 그의 벼락치기 경비대의 이동에도 방해가 된다.
설령 어떻게든 건너간다고 해도··· 기습 효과가 끝나는 순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강을 건너지 않고 남아있는 병력만 해도 이 열정만 앞선 허약한 부대를 박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감히 엘랑키아를 침략해온 적들을 이대로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말도 못하게 원통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지고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하늘은 엘랑키아의 편이었던 것인지···.
강을 건너는 적 사이에서 이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질서를 유지하며 강을 건넌 선두가 반대편 라솔 영토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그들이 물에 젖은 몸을 말리며 강 건너편에 작은 교두보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한복판을 건너던 보병 부대가 갑자기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꾸만 물살에 밀리 듯 하류 쪽으로 움직이더니, 상당한 숫자가 떠밀리듯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이제 반듯하던 행군 대형은 흔적도 없었다.
라마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거의 보병의 어깨에 가까울 정도로 빠듯한 깊이로 억지로 건너기 시작한 이상 당연한 결과였다.
앞서 건넌 동료들의 발걸음이 강바닥을 마구 파헤치고 부드러운 흙을 흐르는 물에 쓸려 보냈다.
게다가 질서를 유지하고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일부 기병을 보병에 섞어 강을 건너게 한 것도 패착이었다.
벌써 수백 명이 밟고 지나가 엉망으로 깎여버린 강바닥은 불안정해져서 넘어지기 쉬웠다.
패주하는 도중이라고는 하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기까지 든 완전무장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헛디디면 끝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건너고 있는 자리가, 정찰대가 그나마 얕은 여울이라고 찾아 놓은 탈출로였기 때문이다.
“구아아악!”
“살려, 살려줘!”
“떠내려간다, 조심해!”
어느새 손에 들려있던 장창과 화승총 등 무기들은 강에 던져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깊어진 강에서 거의 자맥질을 해가며, 간신히 강 건너편까지 도착한 이들은 겨우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수의 동료들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다 수면 밑으로 사라지는 꼴을 본 후속 병력들은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를 이끄는 장교들 역시, 마지막 생존의 가능성에서 이제는 동료들을 삼키고 유유히 흐르는 흙탕물로 들어가는 것이 꺼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행렬이 그런 꼴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대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요행히 강바닥이 매우 높아지는 모래톱에 올라서는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해 어쩔줄 몰라하는 부대도 나왔다.
조금 전까지 살 길이 보였다가, 다시 닫혔다.
거기다 바로 얼마 전, 생뢰르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적을 피해 도주하는 도중, 갑자기 나타난 불타는 바리케이드에 막혀 적에게 따라잡힌 상황.
···그런데 강만 건너면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으로 이어진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타라트라바 보병대의 자존심과 기강을 붕괴시켰으리라.
“뭐 하는 거야! 돌아와!”
“대열을 이탈하면 처벌한다!”
“멈춰! 멈추라고!”
악을 쓰는 소리가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던 라마엘과 휘하 경비대원들에게도 들려왔다.
수백 명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무기를 팽개치고, 무거운 철제 투구와 흉갑을 벗어 던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망설이던 이들이 대열을 벗어나 강으로 뛰어들고, 더 많은 새로운 동료들이 그 뒤를 따른다.
이들은 바로 얼마전 생뢰르반에서, 전투 초기에는 엘랑키아 군과 호각으로 싸우며 쏟아지는 포탄 앞에서도 꿈쩍 않았던 연대들이다.
하지만 거듭된 패배와 절망은 이 용맹한 타라트라바 청년들의 마음을 무너뜨렸고, 명예와 자존심을 잊게 만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타라트라바의 군기가 진흙탕 속에 나뒹군다.
아마도 그것은 부대원들이 처한 운명처럼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