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8. 승리자의 영광
어전회의의 내용을 전달하러 온 디타레 드 카울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마무리 되었지만··· 내전에 가까운 대규모의 군사 충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계실겁니다.”
내전에 가깝다니··· 가 아니라 그게 내전이지 뭐.
엘랑키아 전역에서 집결한 대군을 보내놓고 어? 뭐가 내전으로 비화 어쩌고냐!
···라고 따지고는 싶지만, 놀랍게도 공식적으로는 정말 그렇다.
트랑카벨 가문을 비롯한 블랑독 전역의 어느 가문도, 엘랑키아 왕실에 대한 반역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독립하고자 하는 시도도, 다른 군주를 섬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건 블랑독 연맹군과 함께 지냈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그리고 또 반대로, 엘랑키아 왕실 역시 블랑독의 어느 가문도 불충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를 근거로 처벌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엘랑키아 전역에서 2만 대군을 꾸역꾸역 모아서 보내놓고 ‘그런 적 없다’고 하자니 정말 눈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지만 말이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따져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군대는 어디까지나 주신교 법황의 성전 호소에 응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신실한 엘랑키아 신민 개개인’들의 모임이었지 국왕 폐하 나으리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침 뱉고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원래 봉건 사회의 규칙이란 것이 그렇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애매한 상황은 결코 트랑카벨 가문이나 블랑독 지방에 불리하지 않았다.
그런 큰 전쟁을 거쳐 놓고도 엘랑키아 왕실과 적대관계는 아니게 되었기에, 이전 질서를 회복하는 것도 빨랐다.
정의를 부르짖자면야 고향을 지키다 부당하게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며 복수의 군대를 일으켜 베르마유로 진격해 폭군의 목을 따고··· 하는 게 옳겠지만 말이다.
세상 순리라는게 어떻게 그리 맘대로 돌아가던가.
그게 가능하느냐는 둘째치고, 그런 일을 한다고 행복해지는 이는 블랑독에, 아니 엘랑키아 전체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카르카냑에서는 그렇게 잃어버렸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 아쥬흐가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겠지.
피난왔던 사람들도 지역에 따라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도 하고.
휴우··· 전쟁을 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큰 일이지만 수습하는 건 더더욱 큰 일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블랑독의 현 상황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을 기대하겠다 하셨습니다.”
어라···.
“왕실의 문장관과 기록관들이 파견되어 영토와 작위를 명확히 하고··· 필요하다면 승작이나 새로운 작위를 설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상은 어느정도 했지만, 그걸 지금 한다고? 아니 그보다 라솔과 싸울 신규 군 사령부 설치와는 무슨 상관이지?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입을 열었다.
“저도 질문좀 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에트 경.”
“제가 트랑카벨 가문에 고용된 몸이다 보니, 지금 말씀하신 내용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군 사령부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네, 거기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또 막힘없이 대답이 나온다. 이것도 준비한 내용이란 말이다.
이 정도면 어전회의하는 양반들 생각보다 유능한 최고 경영자들 아닌가 싶은데.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이 방침만 정해서 던져놓고는 ‘너희가 알아서 빠르게 잘 해라’ 따위로 부려먹는 무능한 인간들은 아니라 다행이다.
“현재 블랑독 지방은 엘랑키아 왕국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입니다. 이를 다시 질서에 편입하여 신규 군 사령부의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위 군주 권리를 가진 드 레뮤즈 백작가의 휘하에서 말입니다”
나처럼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이 나오자 라몽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정말 어지간히도 책임지기 싫은 모양이다.
흐음, 그건 그렇고 어전회의에서 머리를 잘 쓰기는 했다.
확실히 블랑독은 꽤 오랫동안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블랑독의 각종 영주들은 ‘관습법’ 이외에는 정통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말이다.
물론 봉건 질서에서 관습법만큼 강력한 게 또 없기야 하지만, 수백년 동안 제도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쌓인 관습법이라는 게 또 문제다.
당장 트랑카벨 ‘자작가’가 자작령만 4개를 가지고 있고, 어지간한 백작령 이상으로 커다랗고 부유하다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 사항이 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왕실에 의해 지위와 영토를 공인받고 싶어하는 귀족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왕실의 군대에 공격당할 위험도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잘 될까? 라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제도권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상위 군주에 대한 군역과 납세 등 각종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걸 과연 지금까지 자유롭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갑자기 안 내도 되던 세금을 내야 할때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누구나 알지 않는가.
여기에 대해 질문하자, 디타레 경은 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한다. 아니, 이 사람 기병 지휘관 아니었나? 완전 유능한 외교관이자 행정관인데.
“블랑독의 영주들은 이미 인력과 비용을 부담해 자위군 조직을 결성, 훌륭하게 고향을 지켜내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젠장··· 그랬었지. 지금 블랑독 연맹군이라는 조직이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 말이다.
지금 여기 데리고 온 트랑카벨 파견군도 엄밀히 말하면 블랑독 연맹군 소속이기도 하고···.
물론 트랑카벨 가문의 엄청난 자금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긴 하지만, 특히 인력 면에서 블랑독 타 지역 출신들의 공헌은 절대로 무시 못한다.
특히 후기에 편성된 신생 연대들은 많으면 절반 가까이가 비 트랑카벨 계열 지원병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블랑독 연맹군의 인력과 자원을 엘랑키아 방위력으로 쓰고 싶다··· 이 말이 아닌가.
흠···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절대 아니긴 하지만.
만약 블랑독이 안정화되어 통상적으로 산업 활동을 하고 인력관리도 할 수 있다면, 트랑카벨 가문에 의지하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힘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
분명 트랑카벨 가문도 실제로 보유한 영토와 세력, 경제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평화롭게 살던 시골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 총칼을 들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아시겠지만 블랑독 지역에는 한가지 문제, 종교적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아, 거기에 대해서는 어전회의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설마··· 여기까지도 이야기를 준비 해 왔나?
“엘랑키아 왕실은, 블랑독의 상위군주인 드 레뮤즈 백작가의 입장을 존중하며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그건··· 결정 사항이라고 봐도 될까요?”
“거기에 대해 확답을 드리는 것은 제 권한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전달받은 사항 그대로라는 것을 디타레 드 카울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이번 라솔과의 전쟁 직전,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정순파’에 대한 사면령을 내린 적 있다.
물론 트랑카벨 가문의 협력을 전제로 했던 조건부 사면령이기는 하지만, 나는 실제로는 그게 라몽 백작이 원하던 결과였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조건을 붙이고 꼼수를 부려 원래 의도를 왜곡하고 제한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라솔 왕국의 왕제와 종교 기사단을 함정에 빠뜨려 불태워 죽였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는 것이니까.
처음 이미지대로 복지부동한 인간으로, 영민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안정을 추구하는 자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
그걸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지금 디타레 경의 역할이 앞으로 있을 협의를 위한 사전 통보 및 이쪽 의견 확인이라고 생각한다면, 희망을 가지고 지켜봐도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왕실에서도 법황청에 맞서가며 파문을 각오하고 싸워 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다만, 향후에도 지금과 비슷한 이단 토벌 전쟁이 벌어질 경우, 참가하고자 하는 영주들은 한번 더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엘랑키아 자체를 상대로 싸우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으로는 한숨이 나오는 일이다.
만약에,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왕실에서 주도적으로 성전에 봉헌까지 해 가며 군대를 조직해 보내기 전에 제대로 이야기를 했다면 말이다.
아마도 엘랑키아 왕실은 블랑독 전체를 장악해 직할 영지로 삼을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차라리 그러는 대신 블랑독 현 주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자를 자처하며 한편으로는 협력을 구했다면 어땠을까.
블랑독은 명목상의 주군이 내밀어온 손을 잡았을까?
음, 다시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다. 순순히 잡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슬픈 일이지만, 세상에는 싸우고 피를 흘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봉합되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전쟁을 업으로 삼은 용병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최대한 희생을 줄이고 그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지금 상황도, 궁극적으로는 블랑독의 주민들이 결정할 사항이겠지.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서, 당사자이신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과 트랑카벨의 에트 경 두 분의 의견을 여쭈고 싶습니다.”
어느정도 의견 정리가 끝난 분위기가 되자, 디타레가 우리에게 묻는다. 의견이라··· 라몽 백작은 몰라도 내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흥, 왕실에서는 기어코 블랑독을 나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오?”
역시나 라몽 백작의 반응은 전혀 좋지 않다. 입가가 일그러진 기묘한 표정으로 이죽대는 말투.
“외람되오나··· 블랑독은 전통적으로 드 레뮤즈 백작가의 권역이 아닙니까?”
“따로 살림을 차려 산 게 벌써 400년이오, 400년. 이 정도면 이제 슬슬 풀어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말이지.”
계속해서 툴툴거리는 백작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그래 보이진 않아도 철저하게 귀족적인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몽 백작의 답변인지, 인상평인지가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된다.
자, 나는 뭐라 대답을 하는 게 좋을까.
“저는 지휘권을 위탁받은 일개 용병일 뿐이라, 의견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사안이 있으면 고용주에게 전달하고 판단을 맡길 뿐입니다.”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사실 딱히 할 말은 없다.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디칼리에서 세력 좀 있는 용병들이 고용주 도시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많이 봤다.
대체로 좋은 꼴로 끝나지 않는다. 보통은 고용주가 찔리거나, 개입했던 용병 자신이 찔리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아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디타레 경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그저 결정사항을 전달할 뿐인 입장이라고 말했으니까,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상황이다. 본업이 군인이라는 점도 같고.
“그래서, 두 번째 이유는 뭐요?”
라몽 백작의 물음이다.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기분이 꽤나 상했는지 퉁명스러운 말투이다.
이번에는 디타레 경이 잠시 머뭇거린다. 말을 고른다는 느낌은 받았어도, 항상 무슨 대답을 할지는 정해져 있다는 반응이었는데.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 내용은 엘랑키아 왕국의 안위와 연관된 중대한 기밀 사항입니다. 구원군 3천 명 전체에서도 저 밖에 모르는 상황입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우리는 차례대로 절대 외부에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그제서야 디타레 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엘랑키아 왕국은 또 다른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새로운 전쟁의 발발은 시간문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비입니다.”
아니 또 무슨 전쟁이야. 전쟁 못해서 환장한 인간들만 모여있나.
“그것이··· 이스키비르 강 유역을 지키는 신생 군 사령부 멤버의 선정을 명확히 하려는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디타레 경이 마지막 말을 하면서 내 쪽을 흘깃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