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48화 (348/556)

36-17.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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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일지 불행일지, 대단한 행사도 없었고, 심지어 뭐 특별한 식사 조차도 없었다.

음, 나도 성대한 축하 연회 따위는 몰라도,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는 건 기대했었는데 말이지.

기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외딴 곳에 따로 세워진 막사로 안내받았다.

주변에 평소보다 많은 호위병이 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확실히 논의 내용에 대해 보안을 유지하려는 모양이다.

“오셨습니까, 에트 참모장.”

드 레뮤즈 백작가의 책사,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가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정면의 상석에는 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중 가장 상태가 안좋아 보였다.

얼굴이 얼마나 창백하고 눈가만 시커먼지 병든 너구리가 생각날 지경이다··· 라는 실례 되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목례하자 백작도 목례로 답한다.

그 좌우에는 아까 인사를 했던 아인멜츠와 보병대장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 앉아있다.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은 남쪽에 남아 잔당소탕과 연락망 설치에 분골쇄신 중이라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한 것 같다.

라몽 백작이나, 세샤르 자작이나 평소처럼 뚱하고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고. 아인멜츠는 어딘가 좀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안내에 따라 테이블의 입구에서 가까운 면에 앉자, 왼편에 앉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한다.

앙비토 공작은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격으로서는 드 레뮤즈 백작가 이상이지만, 지휘권을 나눠 가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라몽 백작의 휘하이고, 마찬가지로 일군의 사령관인 나와 동격이었다.

다행히 라몽 백작과 앙비토 공작은 서로 적절하게 존중하고 있었고, 나야 뭐 알아서 조심하니까 이런 경우 흔히 생기기 쉬운 신분 문제나 지휘권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것만 따져도 연합 지휘부 상위 10퍼센트는 되지 않을까? 심지어 군주가 직접 이끄는 지휘부에서도 엉망진창 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앙비토 공작 곁에 있는 이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사였는데, 처음 보는데, 그냥 보기에도 신중하고 경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역전의 용사’라고 그림을 그린다면 딱 이 사람의 얼굴이 나오지 않을까?

부대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서서 한마디 하면 바로 부대 전투력이 오를 것 같은 전형적인 노장의 외모라고나 할까.

연합군 결성 초창기에 온갖 문제의 근원이었던 브레겔 남작인가 하던 인간에 비하면야 한결 나은 인선은 분명하겠지.

그리고··· 그 맞은 편인 내 오른 편에도 나처럼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다소 고집스럽게 생긴 청년이었다. 이 사람이 엘랑키아 왕실에서 보냈다는 사람일까.

왕의 칙사로 보기에는 좀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좀 어렵긴 하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같은 경우도 있었고.

“두 분께서는 초면이시겠지요. 에트 참모장께서 오셨으니,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사회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아인멜츠가 입을 연다.

“엘랑키아 왕실 근위기병대의 부대장을 맡고 계신 디타레 드 카울 경은 엘랑키아 왕실 어전회의의 결과를 전달기 위해 오셨습니다.”

엘랑키아의 군제나 법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현 국왕 다고베르 2세 휘하의 중앙군은 신분만 가지고는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한다고 들었다.

“또한 3천여 기의 지원군과 함께 오셨습니다.”

오호? 주둔지 북쪽에 낯선 부대가 있다는 보고를 들었었는데, 그게 국왕이 보낸 지원군이었어?

···이거 의외로 변경 영주들에게 맡겨놓고 중앙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구나. 솔직히 조금 원망했었는데.

그건 그렇고, 이 디타레라는 남자는 내세울만한 작위는 없는 하급 귀족인 모양이다.

봉건 사회에서 작위란 즉 딸린 영토의 세력을 말한다.

물론 작위와 세력이 비례하거나 일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거야 자작위에 불과한 트랑카벨 가문만 따져도 알 수 있으니까.

어지간한 백작 이상의 대영주 중에서도 카르카냑을 비롯한 블랑독의 4개 자작령 만큼 풍요로운 영지를 가진 가문은 잘 없을 테니까.

반대로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같은 경우는, 내가 듣기로는 왕실에 딸린 명예직에 가까운 작위라 그만큼의 세력은 없다고 들었다.

어쨌든 결국 작위와 영토라는 힘은 특히 군인에게는 배경이 된다. 단순 신분의 상하 문제를 떠나서, 병력 동원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군에 도움이 되니까.

어차피 누군가가 연대장을 해야 한다면, 500명의 보병을 추가로 동원 가능한 백작가의 아드님을 시키게 마련이란 이야기다.

그런 논리가 지배하는 신분제 사회에서, 이렇다 할 배경 없이 그것도 왕실 근위대 내부에서 직위를 얻었다는 것은 이 남자가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리라.

“디타레 드 카울이라 합니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귀하의 전술에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응? 무슨 소리지?

샹다메리에서··· 국왕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나?

아··· 하기는, 전투 마지막에 슈토르히가 포로로 잡았던 기병대의 지휘관이···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근위기병대장이라고 들었었는데.

···그럼 이 사람에게 나는 원수··· 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편한 관계는 아니겠다.

어느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다가, 얼마 후에는 같은 고용주 아래에서 싸우는 것은 용병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지마는 특정 군주를 섬기는 기사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겠지.

“블랑독의 트랑카벨 자작가의 대리 사령관이자, 현 드 레뮤즈 연합군의 참모장을 맡고 계신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십니다.”

“반갑습니다, 디타레 경. 샹다메리에서··· 귀경이 속한 기병연대의 기동 역시 훌륭했습니다.”

이건 내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다. 예비 병력이 모두 갈려나간 상황에서, 당시 그 기병대가 다른 선택을 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아마 거기에 있던 게 슈토르히만 아니었어도 결과는 좀 달랐을 수도 있겠지. 지빌링엔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테고.

이렇게 대답하는게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용병들은 이런 식으로 띄워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배울 게 많을 것 같습니다.”

디타레라는 이름의 젊은 기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적어도 불쾌해하지 않는 것 같기는 해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소개를 마친 상황인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정말 감사하게도 다고베르 2세 국왕 폐하께서는···.”

그 침묵을 깬 것은 이 자리의 호스트, 라몽 백작이다.

“변방에서 어려운 싸움을 거듭하는 우리 변경 주민들을 돕기 위해서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신 모양이오. 설명을 들어보지.”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정한 말투로 말했지만. 라몽 백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빈정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디타레 경은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선 저는 공식적으로 칙명을 전달하러 왔다거나, 협상 권한을 가진 사자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는 오로지 어전회의의 내용을 여러분께 전달하고, 의견을 듣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침착하지만 조심스럽고,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본인이 해야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전장에서도 저렇게 행동한다면 괜찮은 지휘관이겠는데··· 라고 직업병 같은 생각을 하고 만다.

“국왕 폐하께서는 라솔 왕국과의 최전선이 되는 이스키비르 강 유역을 담당하는 신규 군 사령부를 창설하고자 하십니다.”

신규 군이라고? 이게 뭐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기존에 설치된 군 사령부는 그룬발트와의 국경을 담당한 그랑다투아 군, 나우데사 연방과의 요새지대를 담당한 북부군, 그리고 여기 계신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의 서부군입니다.”

아··· 그런 개념이구나. 물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아인멜츠도 알고 있던 눈치인데··· 나만 상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정리하자면 이스키비르 강 주변에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하면, 까놓고 말해서 라솔 왕국과 전쟁이 터지면 신속하게 대응할 조직을 만든다는 이야기겠다.

당연히 근대적 상비군처럼 조직 전체가 군단을 이루고 대기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전쟁이 난 이후에야 부랴부랴 준비해서 병력을 끌고 나오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 부담이 크다.

설령 평소에는 자기 영토에서 일상 생활을 한다 해도, 비상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자기 역할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것은 아주 큰 어드밴티지가 된다.

가령, 이번 라솔과의 전쟁은 다행히 개전 시점이 어느정도 명확했기 때문에 빠듯하게나마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조짐 없이 갑자기 라솔 왕국이 침공해왔다면 이번과 같은 대응은 전혀 불가능했으리라.

드 레뮤즈 백작가의 가신들은 그렇다 해도 부지런히 병력을 모아 주군을 지키러 왔겠지.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짧게라도 훈련을 거치지 못한, 오합지졸 상태로 라솔의 정예군과 충돌하게 되었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두렵다. 드 레뮤즈 군의 결의와 사기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만큼, 그 결과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깝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내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예방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러운 일이네.

“어전회의에서 논의가 되던 당시에는, 아직 이스키비르 강 유역에서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황급히 신규 군을 조직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하, 총사령관 라몽 백작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명확하게 하려 했던 거구나.

라몽 백작의 리더쉽이 기정사실이기는 하지만, 왕실에서 이를 인정하고 명확하게 도장을 찍어 주는 게 나쁘지는 않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서부군의 앙비토 공작이 작위의 서열을 논하면서 사령권을 요구했다면 정말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디타레 경, 질문을 하고 싶소.”

“옛, 말씀하십시오.”

한참을 듣고만 있던 라몽 백작이 입을 연다.

“우리 엘랑키아 왕국이 라솔과 전쟁을 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군 사령부를 설치하려는 의도는 무엇이오?”

역시 라몽 백작의 질문은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나도 엘랑키아의 역사에 대해 그다지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라솔은 건국 이래로 가장 많은 충돌을 해온 상대였다.

실제로 지금과 같이 국경이 안정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전에는 인근 영주들의 상속 문제도 얽혀 거의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기존 체제에 맞춰 변경을 방어해왔다.

마지막 전쟁 이후 평화기가 지속되다 갑자기 전쟁이 벌어진 ‘비상’인 건 맞지만, 전체 역사로 따지자면 오히려 ‘통상’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왕실에서 갑자기 다른 정책을 요구해 왔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굉장히 조심해서 답변해야 하는 예민한 질문이라 생각하지만, 디타레 경은 의외로 주저없이 대답한다.

이건 분명히, 어전회의에서도 이런 질문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이겠지.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엘랑키아의 군신관계는 군주가 휘하 신하에게 죽으라 하면 죽는 척이라도 하는 절대적 상하관계는 아니다.

신하는 군주를 섬기기는 하나, 관습법에 의해 정해진 의무에 맞춰 이행할 뿐이다.

그 이상을 시키려면 명령만 내리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실권을 쥐고 있는 신하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미래의 대우에 대한 약속이든 말이다.

“우선··· 남부에서 최근 2년 간 벌어졌던 소란··· 내전 상황으로까지 비화될 뻔 한 남부 영주들 사이의 분란에 대한 정리입니다.”

디타레가 내 눈치를 보듯 흘끗 쳐다본다.

음··· 이건 내가 정신을 좀 차리고 들어야 할 문제다. 나는 자세를 고쳐앉고 그를 바라본다.

‘나는 들을 준비가 되었소’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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