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46화 (346/556)

36-15. 승리자의 영광

엘랑키아 남부의 건조한 초원을 한 무리의 기병들이 달리고 있었다.

잘 닦여 빛나는 철제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과, 비교적 경무장한 수행원들과 보조 기병대를 합치면 수천 기는 되어 보이는 상당한 숫자이다.

선두에 선 기수들이 들고있는 깃발은 다름아닌 엘랑키아 왕실의 깃발이다.

그들은 바로 얼마전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생뢰르반 마을의 북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었나 보군···.”

“아군이 승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이미 전투가 끝나고 시간이 흐른 전장은 승자들의 손에 의해 정리되어 어느정도 전투의 흔적은 지워진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수천을 넘어 수만의 병력이 둘로 나뉘어 죽고 사는 치열한 승부를 벌였던 장소이다.

그 흔적은 흩어진 시체나 병장기를 치웠다고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사들이 적의 공세에 죽어라 버티며 힘을 줘 무기를 휘둘렀기에, 들풀이 뿌리채 뽑히고 표층이 뒤집혀 뻘건 흙이 드러난 격전장.

오랫동안 무거운 중무장 기병을 태우고 대기했던, 기병 주둔지 특유의 묘하게 잘 정돈된 사각형의 공간.

반복되는 포격과 반동으로, 딱 화포의 폭 만큼 파고 들어간 대지의 흔적까지.

무엇보다, 여전히 전장에는 화약과 피 냄새가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베테랑 군인이라면, 이것만 보아도 대략적인 전투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디타레 경?”

“아, 으음, 무슨 일이지?”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드 레뮤즈 백작가 측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 그렇군. 이쪽으로 안내하게. 나머지는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이동할지 모르니 말을 쉬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대장님.”

그 격전의 흔적을 살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엘랑키아 기병대의 지휘관, 디타레 드 카울이 부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다.

“우리도 나름 서둘러 준비해서 왔는데··· 전투가 이미 끝났다니···.”

“뭐 라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일테니, 재침공을 해오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런 대패 직후는 아니겠지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콧대가 끝도 없이 높아지겠군요.”

“듣기로는 직접 이 전투를 지휘했다고 하니까요.”

“호오, 라몽 공이 그런 남자였던가요.”

휴식을 받은 디타레 휘하의 기병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당장이라도 전투에 투입될거라 생각하고 잠을 줄이며 달려온 지원군이다. 허나 이미 전투는 끝났다니, 아쉬움과 안도감이 그들의 입을 가볍게 만든 모양이다.

그들이 얼마나 정강한 정예들이고, 평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지휘관인 디타레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굳이 그들을 통제할 생각은 없었다.

“저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의 참모를 맡고 있는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라고 합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명령하시면 어디라도 달려가야지요. 저는 디타레 드 카울, 왕실 근위기병대의 부대장을 맡고있습니다.”

“오오, 다고베르 2세 폐하께서는 왕실의 중요한 기병대를 보내주셨습니까? 라몽 백작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나눈다.

디타레는 조금 놀랐다. 드 레뮤즈 가문의 대표로 나온 상대가 젊은 데다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 자신도 하급 귀족으로서 ‘과한’ 직위에 올라있는 사람이다. 상대가 ‘드 카울 가문의 작위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은 것만 해도 좋은 시작이다.

최근에는 불쾌한 기분을 잘 숨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작위는 아직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묘하게 일그러지는 명문 귀족님들의 표정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엘랑키아 군의 고급 장교들치고는 드물게도, 작위를 내세우지 않는 하급 귀족과 외국인의 만남이다.

“서둘러 온다고 노력했습니다만··· 전투가 이미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잔적 소탕까지···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다행히 왕실 기병대의 도움 없이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의 전투로 승패가 갈린 것입니까?”

“아군은 여기 생뢰르반 마을 부근에서의 전투에 이어, 이스키비르 강변··· 로그포르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적을 격퇴하였습니다.”

“흐음···.”

디타레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엘랑키아 북부 출신들은 남부 출신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딱히 선을 긋고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남부’는 ‘북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2만에 가까운 라솔 군이 강을 건넜다는 보고를 받은 엘랑키아 어전회의에서는, 최소한 전쟁이 내년까지 2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실리적으로도 위신적으로도 건국 이래의 8대영주 중 하나인 드 레뮤즈 백작령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때문에 부랴부랴 구원군을 편성하고 있었고, 디타레의 기병대는 그 1진이었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라솔 침략군은 이스키비르 이북에서 격퇴당했다는 것이다.

구원군 1진의 지휘관으로서 마지막 어전회의에도 참여했던 디타레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놀라운 전과였다.

“...그래서 최근 심한 가뭄으로 인해 이스키비르 강의 수위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아군은 이를 역이용해 적을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대단한 전술이군요.”

“디타레 경께서는 엘랑키아 남부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역시 북쪽 출신인 저에게는 너무 덥네요.”

“아 네··· 한 번 왔던 적이 있습니다.”

디타레가 남부 출신들을 얕보지 않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블랑독 이단토벌전쟁에서, 국왕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었다. 그것도 최정예인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 휘하의 기병 연대에서 분견대를 이끌었었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나 알듯 크나큰 참패. 연대장인 베리브 자작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으며, 휘하 병력은 지리멸렬하여 포로가 되거나 흩어져 도망쳤다.

소수의 분견대를 이끌고 지빌링엔 연대가 점거한 포대를 견제 공격하던 디타레가 이끄는 분견대 정도만이 남아 퇴각하는 아군을 호위했을 뿐이니까.

근위기병대 전체가 온 것은 아니지만, 근위기병대장 베리브 자작을 포함해서 근위대 장교들 상당수가 종군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상당히 컸다.

디타레 자신도 큰 충격을 받았고, 이런 어리석은 전쟁에는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혼자 결심했었지만.

이번에는 구원군으로서, 그리고 어전회의의 전령으로서 남부에 돌아오게 되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을 뵈어야 합니다. 칙령은 아니지만,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 전달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네··· 라몽 백작님께··· 물론 안내해드려야지요.”

주군의 이름을 들은 아인멜츠의 표정이 잠시 흐려진다.

대략 짐작은 간다. 라몽 백작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며, 이번 전투에도 억지로 나섰다는 것은 베르마유에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인간이 직접 전장에 나섰다니, 실제 지휘는 부하들에게 맡겼어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돌아온다! 아군이 돌아왔다!”

“진짜? 어어?”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부지런히 노획 물자를 정리하고 분류하고 있던 병사들이 신나서 떠드는 것이다.

“라솔 군의 패잔병 소탕전을 끝낸 아군이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호오, 빠르군요···.”

망원경을 꺼내 아인멜츠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분명히 멀리 남쪽에서 대군이 돌아오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데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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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가뭄이 심해서 다들 걱정이 많아요. 다행히 올해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요.”

“어떻게 해결했느냐?”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지, 전쟁에 대비한 비축 식량이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그룬발트나 주디칼리에서도 식량이 계속 공급되고는 있고요.”

“제 가격에?”

“...거의 세 배 가격이라서 분통이 터지네요.”

“허허허헛, 어쩔 수 없지. 상인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이제는 평화로운 거리도 낯설지만은 않은, 트랑카벨 가문의 거성 카르카냑.

그 영주관의 어느 방에서는 가주 아롱드 트랑카벨과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이 마주 앉아 다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에게도 모두 휴식을 준, 할아버지와 손녀딸만의 얼마 안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저수지를 늘리는 쪽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다행히 병기창의 장인들 소개로 건축기술자 분들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고요.”

“그거 다행이구나.”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가문의 중심을 맡고 있는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지만, 조금 피곤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가문은 물론 사실상 블랑독 전체 운영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 역시 생기넘치는 모습임에도 어딘가 지침이 묻어있다.

그래도 그 둘에게 이 시간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아실 녀석은 잘 지내고 있느냐? 이제 카르카냑의 자기 방 보다 병영의 막사가 편해졌을 것 같구나.”

“그럼요, 블랑독에 남은 연맹군을 잘 지휘해서, 치안 회복을 돕고 방어 계획도 재건하고 있어요.”

법황의 성전군이 마르사코르에서 말 그대로 불타서 사라진 이후에도, 블랑독에 대한 외부의 ‘성전’은 공식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제정신이 붙어 있는 자들은 법황군이 궤멸하면서 사실상 성전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지만, 안 그런 자들도 있었다.

뒤늦게 블랑독에 도착해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약탈에 대한 욕망이 상식을 뛰어 넘었는지, 종교에 대한 광기가 승패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갔는지···.

잊을 만 하면 변경을 침입해오는 자칭 ‘신성한 전사’ 무리는 골칫덩이였다.

지금도 수십 명에서 백 명 이상까지도 무리를 지어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데, 놔두었다가 더 크게 뭉쳐 군대를 이루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때문에 트랑카벨 영지군을 중심으로 한 병력이 이에 대한 요격에 나서,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변경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신성한 도적’ 무리의 준동은 잠시 경색되어 있던 블랑독과 그 주변 지역 영주들의 사이를 좋게 만들었다.

바로 이 멍청한 신성한 도적들의 어설픈 지리감각 덕택에, 블랑독 외부의 애꿎은 영지들이 여러 차례 약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랑독 계열 영주들과, 외부 영주들이 협력하는 일이 여러번 발생했고, 이는 잠시 끊어졌던 교류가 다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 어이없는 노릇이지만, 이 또한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아쥬흐는 생각했다.

“그리고··· 흠, 라솔과의 전쟁이 이제 끝났다고?”

“네. 두 번의 전투에서 아군이 승리, 남은 적은 강을 건너 돌아갔다고 해요.”

“흐음, 그랬구나.”

노회한 아롱드는 손녀딸이 왠지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사실만은 연결하는 와중에도 그 파란 눈에 생기가 돌아온 것을 놓치지 않았다.

“허허허, 내년까지 전쟁이 이어질지도 몰라서 고민하지 않았더냐? 다행이구나.”

“그러니까요. 군대는 원래 돈 먹는 괴물이지만, 국경 밖의 군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트 녀석 말이다.”

“음··· 네? 콘도티에레 에트에게 무슨 문제라도?”

“흐음··· 아니다.”

아쥬흐의 말투가 조금 쌀쌀맞아지는 것을 느끼며, 아롱드는 더 이상 손녀를 놀리지 않기로 했다.

얻게 될 단순한 재미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큰 행동, 상인으로서 절대 하면 안되는 행동이다.

“그··· 성녀 양반은 이제 좀 건강해졌고?”

“다행히도요. 하지만 여전히 말을 거의 하지 않아요. 하루종일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다고 해요.”

“거참, 못된 짓을 한 여자이긴 하지만 어찌 사람이 그렇게 망가졌는지 모르겠구나. 법황청에서는 돌려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그렇네요. 어떻게 이리 무책임할 수가 있는지.”

아쥬흐의 말투가 진짜로 쌀쌀맞아지고, 경멸이 섞인다.

주디칼리의 법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트랑카벨 가문에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포로들도 가족이나 영주들이 데려가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성녀 아스트로메다처럼 법황 직속인 고위 성직자는 몸값 협상을 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대체 얼마가 되어야 할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보다···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남부 세력 관계가 재구축되겠구나.”

아롱드의 말투에는 긴장이 섞여있었다. 아쥬흐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드 레뮤즈 백작령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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