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4. 승리자의 영광
장엄한 광경에,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지휘관은 물론 구경꾼이 아니다. 멀리서 보기에 멋진 장면은,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장병들의 목숨이 갈려나가는 참혹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성공적인 돌격 장면에서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남자라면 아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질병과도 같은 모양이다.
외곽의 방어선을 깨부순 기병들이 적진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제는 다소 무질서하게 방치되듯 서 있는 라솔의 보급 마차들과, 그 사이의 좁은 통로가 오히려 적 예비대의 이동과 전령의 연락을 방해하는 올가미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용감한 장교의 통솔 아래에 작은 규모의 방어 진지가 만들어지곤 하지만 대부분 소용 없다.
어차피 길은 사방팔방으로 뚫려있다. 막혔다면, 피해가면 될 뿐. 작은 방어선에 피어 올랐던 작은 용기가 순식간에 꺼져간다.
주로 측면이나 후방에서 기습당해 기병의 물결에 쓸려가서 말이다.
수천 단위의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에서 저런 적당적당한 급조 마차 방어선은 큰 의미가 없다.
포장마차 상단이 고립무원의 초원에서 소수의 도적떼를 상대로 버티는 소규모 전투라면 모를까···.
아, 물론 아군의 기병이 충분치 못하고, 포병 또한 없거나 호각이었다면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시간을 끄는 데는 도움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규모면에서 충분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숙련병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 저렇게 마차로 선을 긋고 라솔 보병들이 거기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차를 아예 뭉쳐놓아 통과 불가능 지역을 만드는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아마 저 보병들이 그냥 평지에서 빈틈없는 밀집 대형으로 우리 기병을 기다렸다면, 기병만으로 상대하려면 상당히 곤란했을리라.
포병의 도움은 받겠지만, 라솔의 숙련병들은 적어도 지금 날뛰고 있는 마부 없는 짐말들 보다는 포격에 침착하게 대처할 테니까 말이다.
“우측의 세샤르 드 레도쿠르 경과, 좌측의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에게 전령을!”
“옛, 콘도티에레! 전령 준비하겠습니다!”
“전령! 적의 중앙을 무너뜨려 전위와 후위를 분단시켰다. 무리한 공격보다 포위망 형성에 주력할 것!”
“전령! 적의 중앙을 무너뜨려 전위와 후위를 분단시켰다. 무리한 공격보다 포위망 형성에 주력할 것!”
최근 적군의 움직임을 보면, 적은 세력을 유지한 상태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장 병력 자체에 타격을 가하면 오히려 격렬하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적의 훈련상태나 기강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생각되니까.
하지만 포위망을 형성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더욱 절박하게 몰아 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의 중앙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 적이 양분되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만약에··· 분할된 두 덩어리의 적 중 하나만 집중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생뢰르반에서는 해가 지는 바람에 놓쳤었지만, 오늘은 아직 시간이 많다. 아직은 상황을 좀 더 보다가 판단을 내려도 될 것 같다.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강변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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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 비켜라! 반격해야 한다!”
“진정하십시오, 기사님! 이대로는 혼란만 더 심해집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전방에서 아군 보병이 무너지고 있는데 우리더라 구경만 하라는 말인가?”
타라트라바 군 기사, 리브리오가 보급장교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보급장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기병들로서는 분노하기에 앞서 조바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들은 방어의 핵심이다. 열세의 전력으로 넓게 친 방어선이니까. 어딘가는 뚫릴 수 밖에 없고 그 간극을 채워야 하는게 기동성 있는 기병의 임무이다.
상황에 따라 격파한 적이 물러서는 것을 그대로 쫓아 방어선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잘만 된다면, 공격측이라는 기세에 취한 적의 후방을 노려 통렬한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풀려난 짐말들이 날뛰며 만든 혼란은 기병들이 이동할 길을 막아버렸다. 아니, 이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마차 여기저기서 불이 피어 올랐고, 보병인지 인부인지 모를 자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혼란을 더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저 멍청한 짐승들을 죽여서라도 길을 내라. 안됐지만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아이고, 기사님! 그랬다가는 저 놈들이···.”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전쟁에는 우선 순위라는 것이 있네!”
“그게 아니라, 저놈들 덩치 때문에 오히려 길을 막아 버릴 것입니다요!”
“...으으으!”
그 자신이 기병이니 아주 잘 안다. 전투 중에 죽었거나, 덜 죽어서 날뛰는 말은 생각보다 통행에 크게 방해가 된다.
하물며 지금 날뛰는 놈들은 유난히 커다란 짐말들이다. 육중한 군수물자를 끌고 다닐 정도로 튼튼한 놈들이 흥분할대로 흥분한 것이다.
“차라리 일부 병력을 여기 남겨두고, 공작 전하를 구하러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여긴 전선의 중앙이지 않나? 여기를 뚫렸다가는 전군이 무너진다는 말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타라트라바의 병력을 지켜야···.”
분노하던 리브리오는 부관의 말에 잠시동안 입을 다물었다.
지금 부관의 말은, 후위인 라솔 군을 포기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벼락같이 화를 내며 쓸데 없는 말을 하지는 말라 했을 것이다. 어떻게 동맹을 저버리냐고 하면서.
하지만 상황이 이렇기에 솔깃한 것이다. 타라트라바 군은 전위 방향에 있고, 불타는 바리케이드만 치울 수 있다면 기동로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남겨진 라솔 군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라솔 군 단독으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보유한 중기병이 없다는 것이다.
생뢰르반에서도 그랬다. 주공을 맡았으면서도 충격병력이 부족해 타라트라바의 기사 1천 기를 빌려 썼을 정도였다.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보조대 소속인 경기병 수백 기와, 할콘 남작의 영 못믿을 기병대가 전부인 것이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저에게 몇개 중대를 주시면 함께 남겠습니다. 어차피 멍청한 짐말들이 만든 혼란 때문에 적도 당장은 넘어오기 힘들 겁니다.”
“으음···.”
마차로 만들어진 엉성한 방어선을 적이 뚫고 들어오더라도 산발적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걸 뭉쳐있는 기병 전력으로 한꺼번에 덮치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결국에는 뚫릴지 모르지만, 그건 적이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화폐를 한참 낭비한 이후가 될 것이다.
“음··· 좋다. 우리는 위기에 처한 공작 전하를 모시러 간다! 5개 중대가 남는다.”
“맡겨주십시오, 리브리오 경.”
“아니, 남는 병력은 내가 직접 지휘한다.”
“예? 아니, 리브리오 경 그것은···.”
“물론 상황을 봐서 합류하겠다. 지금은 공작 전하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다!”
부관과 다른 참모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의 젊은 지휘관을 바라본다.
타라트라바 공국의 봉신들 중,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 출신인 청년 귀족 리브리오는 뼛속까지 귀족이고 기사였다.
아무리 전술적 합리니 비상 상황이니를 따져도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전투는 군사적 충돌에 앞서서 타라트라바 공국과 라솔 왕국 사이의 중요한 외교적 문제이기도 했다.
타라트라바 군이 책임을 회피하는 추태를 보인다면, 이는 향후 주군의 입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상황이 상황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유력 가문의 후계자로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리브리오에게도 있었다.
“물론 여기서 죽겠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봐서 반드시 합류하겠다. 어서 병력을 나눠 출발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리브리오 경!”
“어서 이동해!”
라솔 - 타라트라바 연합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중기병이 자리를 벗어나 전위 방향으로 이동한다.
지휘관인 리브리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상대적으로 초라해진 휘하 병력을 향한다.
“재미없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우리는 타라트라바의 기사니까.”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리브리오 경!”
“고맙다.”
생뢰르반 전장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기동성 덕분에 다행히 기병들은 그럭저럭 병력을 온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리브리오가 이끄는 병력은 절대로 무의미한 전력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수백 기 이고, 방어선을 마구 무너뜨리며 접근하고 있는 엘랑키아 군의 기병은 거의 2천 기에 가 깝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한편, 전위 방향으로 이동하는 타라트라바 기병대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기병대가 있었다.
할콘 백작의 기마 용병대였다.
“...말을 타고 건널만한 여울이 있는지 확인해라.”
“예, 대장.”
그들도 크게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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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난다. 상류쪽으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현재 전장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에 처한 것은 단연 후위를 지키는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 휘하의 라솔 군이다.
마주한 드 레뮤즈 보병대의 공격에 밀려 자꾸 후퇴하고 있었다.
“저런 멍청이들에게!”
퀸토 변경백이 부드득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적이 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엉성한 공격이다. 분명 마주한 적은 적당히 농부들을 긁어 모았을 뿐인, 평범한 엘랑키아 돼지들이 분명했다.
수적으로 다소 불리한 상황이나, 이 정도라면, 설령 1.5배수의 적과 싸우더라도 호각으로 싸울 자신이 있었다!
그게 보병끼리의 싸움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보병이 아닌 다른 병과였다.
적의 화력은 꾸준하고 또한 집요했다. 보병 미신에는 포탄이 한 번 떨어졌던 장소에는 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포병대는, 전투가 시작된지 한참 지났는데도 사격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정말 집요하게도 때렸던 데를 또 때리고 있었다.
베테랑 보병들이 쏟아지는 포탄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진짜 포탄이 무섭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포탄의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고, 죽는 것은 아군 전체의 극히 일부이며, 이게 두려워 소란을 떠는 게 더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자기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자기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라솔의 가장 용맹한 장병들, 바로 옆에서 동료가 피떡이 되어 그 피를 뒤집어 써도 복수를 결의할 뿐 꿈쩍도 안할 이들이 두려움에 덜고 있었다.
빌어먹을 적 포대는 그다지 멀지도 않다. 그런데 아군이 반격할 포가 없고, 역습에 나설 기병도 없다는 것을 아니까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마음 놓고 포탄을 쏴대고 있었다.
자꾸 피해가 누적되는 전방 중대들이 퇴각을 건의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병력이 절반 가까이 줄어 너덜너덜해진 부대들이다. 더 방치하면 아예 붕괴하여 부대로서는 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
좀 더 버티려면 공간을 확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자꾸 눈이 강으로 간다. 평소보다 바닥이 많이 드러나 있는 상태를 보면, 어떻게 걸어서 건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타라트라바 군은 몰라도, 탈출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휘하 병력이 거기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최악의 경우··· 어쩔 수 없다면···.
“변경백 각하! 중앙이, 마차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뭐? 벌써?”
“타라트라바의 기병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습니다! 이건··· 배신입니다!”
“흠···.”
소식을 전한 참모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마차 방어선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력이 모인 전위와 후위에 비해 정면이 좁았고, 잠깐 동안은 적을 묶어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무너지기 전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도 있다 생각했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럴 틈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일지도 모르지.
한숨이 나온다.
“지금은 동쪽, 타라트라바와의 연락로가 완전히 막혔나?”
“지금은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군, 그럼 좀 전에 보냈던 전령은 무사히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할콘 남작은 아직 있나?”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만··· 벌써 절반은 물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분명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도망치려는 게 분명합니다!”
분노와 슬픔, 절망으로 엉망인 참모와 달리, 퀸토 변경백의 표정은 평온하다. 마치 그래도 할 일은 다 했다는 표정.
“...전투를 계속하며 동쪽으로 조금씩 퇴각한다.”
“옛,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 하얀 천을 찾아오게.”
“하얀··· 천이요?”
“그래. 뭐 침대 시트든, 깨끗한 천막에서 잘라내든지 말일세. 클 수록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