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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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들 뭐 하는 거지?”
프리스마라 기마 용병단의 단장, 코바르 리메니에디는 적의 기묘한 움직임을 보고 당황했다.
“어어, 절로 가면 안 되는데···.”
“저리 가면 라몽 백작님인가 하는 그 허여멀건 도련님네 영지로 가는 게 아닌가요?”
프리스마라 연대는 소수의 정찰대가 교대하며 적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밀착이라고 해봤자 정말로 달라붙어서 감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물가물한 평지 저 편이나 언덕 실루엣 위에서 적을 끊임없이 살핀다.
이는 물론 충분한 안전거리를 두는 목적도 있지만, 절대로 ‘적에게 들키지 않는다’라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너희가 무엇을 하건 우리가 보고 있다’라는 인식을 적에게 심어주고, 초조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크다.
적 수십기가 끊임없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데, 병력을 내보내면 후다닥 도망쳐 버린다.
모르는 상태에서 기습하면 모를까, 평지나 오르막에서 이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도저히 추격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 직후에 또 어디선가 기마 정찰대가 나타나 감시를 계속한다. 심지어 아까 쫓아낸 놈들과 같은 놈들인지 다른 놈들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물며 기병 전력이 부족한 라솔 군으로서는 대응할 방도가 없다. 아예 포기하면서 볼 테면 보라고 방치하는 수 밖에.
어차피 이정도 대군의 움직임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기도 하고.
그렇게 가까이에서 라솔 군의 속을 성공적으로 긁고 있던 프리스마라 기병대였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예상과는 너무 달라서 지금 곧바로 보고를 해야 할지, 좀 더 움직임을 확인하고 보고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아군을 속이려는 기만 작전은 아닐까요?”
“그래서 고민이야. 지금 괜히 보고했다가 쓸데 없는 정보가 되는 건 아닐까?”
“움직이는 척 하고 나중에 뒤통수 치는 거. 이거 대장님 특허 아닙니까, 특허.”
“어허, 뒤통수라면 우리 훌륭하신 콘도티에레도 만만치 않지.”
“전쟁 접고 사기꾼 하셔도 많이 버시겠습니다.”
직위에 상하는 분명히 있으나, 격의는 없다. 원래 용병들이 그런 면이 있지만, 프리스마라는 유독 심한 편이다.
아마도 기마 용병대이다보니, 보병에 비해서 편성이나 진형이 유동적이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란히 행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단장인 코바르의 털털한 개인적인 성향도 크게 영향을 미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격의가 없다고는 해도 일을 대충 한다는 것은 아니다. 코바르 본인도, 간부들도 진지하게 흙바닥에 지도를 그려가며 논의를 시작한다.
“여기가 저기 이스키비르 강이고··· 여기가 얼마전에 우리가 싸웠던 생 어쩌고 마을입니다.”
“도망쳤으면 얼른 강이나 건널 것이지··· 왜 강변을 거슬러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지?”
“글쎄요, 원래 목적인 드 레뮤즈 백작령을 침공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드 레뮤즈 백작이 라솔 국왕의 동생을 죽여서 촉발된 전쟁이라 하니까요.”
“와, 이 녀석 그거 다 기억하고 있었냐, 똑똑하네. 그러게 그런 이야기 들은 거 같기는 하다 처음에.”
“그런데 왕창 깨진 다음에 병력도 반토막나서 뒤늦게 간다고요?”
실 없는 이야기가 다소 오가기는 했으나, 분위기는 진지하다.
그들의 눈 앞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강변을 따라서 상류 방향으로 이동하는 라솔의 대군이 보인다.
아무리 생뢰르반 전투에서 패배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지만, 이제는 무질서한 패잔병의 몰골은 아니다.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편제를 갖춘, 당당하고도 정연한 행군대형.
안쪽에 부상병을 포함한 보급부대가 행군하며, 바깥쪽으로는 전투 부대가 행군하며 그들을 보호한다.
그것만 보아도 결코 강물에 길이 막혀 갈 곳 몰라 무작정 상류 방향으로 이동하는 상황은 아니다.
산산히 흩어져 도망치던 적은 어느새 강변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나름의 세력을 회복하였으며, 몇 개로 나뉘어져 있던 병력을 하나로 집결해 질서정연하고 행군하기 시작했다.
결코 전투를 포기하고, 갈 곳 없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움직일 뿐인 패잔병의 모습이 아니다.
“...꽤 쎈 놈들이군. 원래 이스키비르 강을 지키던 정예군이라고 했나?”
“네, 거기에 저 멀리 타라트라바 공국에서 온 병력이 합쳐진 군입니다.”
“타라트라바 군은 별 것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건 트랑카벨의 보병들이 정신 못차리도록 후드려 팬 다음에 우리가 덮쳤으니 그렇지. 음··· 지금 우리만으로 덮치라면···.”
코바르가 망원경을 꺼내 적진을 이리저리 살핀다.
분명 길게 늘어진 행군대형이기 때문에 기병이 습격하기에는 좋은 형태이다.
전투에서 손실한 병장기가 많은지 평소라면 훨씬 빽빽했을 장창 대열도 숫자가 좀 적어 보인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화승총의 숫자도 평소의 완편에 비해서 적겠지. 그 뿐 아니라 전투 직후 보급품의 일부도 분실했을 테니 화약도 결코 여유롭진 않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프리스마라 연대가 일시에 기습하면 일거에 대열을 무너뜨릴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정 도면 휘하 병력이 집결하면 한 번 해볼만 하지 않은가도 싶다가도···.
유리하지 않은 점이 눈에 뜨인다.
우선 숲이나 언덕 같은, 적의 행군로에 쉽게 접근하도록 시야를 가려줄 지형지물이 거의 없다.
아마 적은 프리스마라 연대가 자신들을 노리고 돌격을 시작하는 순간, 정확히 기병의 규모와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기병으로 기습할 때 가장 좋은 점은, 소리와 기척으로 적이 ‘기습 당하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숫자와 방향을 모르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프리스마라 특유의 ‘아라라라라라!’ 외침은 적의 마음 속에 상상도 못할 공포심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도구’이다.
적이 마음 속에 한껏 공포심을 쌓아두면, 프리스마라 기병이 무더기로 돌입해 그걸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대열 또한 무너지니까.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게 힘들 것 같다.
물론 시각적으로도 시야를 가득 채운 기병의 돌격이 공포를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의 숙련되었다면 그 짧은 시간 또한 대열 정돈에 사용하겠지.
이겼고 대활약을 했다지만, 생뢰르반에서 프리스마라 연대가 지불한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잘 준비된 라솔의 보병 밀집 대형에 정면으로 돌입하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런 숙련된 라솔 보병의 일제사격을 정면으로 맞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돈을 받은 만큼 승리를 위해 헌신은 하겠으나,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할 정도는 아니지.
게다가 적의 행군 대열이 지나치게 강변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는 적에게 강을 등지게 하여 강제로 배수진을 치게 하는 점도 있겠지만, 일단 적진을 돌파하거나 우회한 기병들이 돌아 나올 공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다.
기병이라는 것은 멈추는 순간 전술적 가치가 확 떨어진다. 공격을 마친 전열이 어서 공간을 내 줘야 후열의 충격력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고.
좁은 공간에 잘못 몰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갇혀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의 부하들이라면 알아서 잘 빠져 나올 거란 생각은 들지만···.
“코바르 대장님, 저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왜?”
“라솔 놈들 발 빠지는 걸 보니까, 저기는 강변이라 모래가 섞여 지반이 무른 모양입니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말발굽이 모래에 파묻힐 겁니다.”
오호, 그 생각은 또 못했다. 확실히, 물가에서 기동할 때는 지면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정 반대로 물이 차는 진창인 경우도 마찬가지지.
말과 기병은 매우 강하고 유용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많고, 여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본연의 역할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지면 상태가 고르지 않거나, 무른 경우가 큰일이다. 자칫하면 말을 잃을 뿐 아니라 기병 자신도 크게 다치기 쉬우니까.
‘그래서 사령관은 직접 전장 상태를 밟아 봐야 하죠’
콘도티에레 녀석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그 덕분에 몇 번인가 전투에서 이득을 보기도 했다.
원래 늪지대건 흙 섞인 모래붙이건, 발자국 생기기 전에는 평범한 지면이랑 별로 차이가 안 나니까.
이건 적도 어느정도는 이를 감안하고 행군 루트를 짰을 것 같다.
분명히 기병 상대하는데 이골이 난 놈들이다.
“퇫!”
바닥에 침을 뱉는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다 보니 입에 더러운 침이 고이기도 했지만, 용의주도한 적장을 생각하니 괜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바르 리메니에디 자신도 각종 상황에서 보병 부대를 털어 먹으며 출세한 용병이다. 그러니 자신도 나름 이골이 났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보병과 기병 모두가 서로 이상적인 상황에서 부딪친다면···.
역시 유리한 쪽은 보병이다. 유리한 지형에서, 효율적인 밀집 대형을 갖춘 보병 연대는 철벽과도 같아서 기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
기병의 숫자가 좀 더 많아도, 극단적으로 두 배 가까이 된다고 해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다. 설령 무너뜨린다고 해도 그 와중에 발생하는 피해를 생각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가능성이 크겠지.
물론 지금 적군이 완벽한 상태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패한 것 치고는 사기가 높고 기강도 잡혀있다. 분명 평균 이상으로 강한 정예군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후, 공세는 포기한다. 우선 보고부터 올리도록 하지.”
“좀 더 살펴보다 보고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우선 보고를 올리고 새 정보가 있으면 정정 보고를 올린다. 그리고 그 녀석, 콘도티에레라면 알아서 이상한 보고는 걸러 듣겠지.”
코바르는 그 미덥지 못하게 생긴 청년 사령관을 떠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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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마라 연대가 보낸 전령이 도착한 후, 사령부는 조금 시끄러워졌다.
공교롭게도, 현재 추격군의 주력이 드 레뮤즈 영지군이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적의 잔존병력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향한다니 걱정이 되지 않을리가 없었다.
“콘도티에레··· 적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글쎄··· 뭔가 목적이 있을 텐데.”
첼레스티나의 질문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적이 분명 하류 방향을 향해 행군할 것으로 생각했다. 바다 쪽으로 나가야 라솔 해상 전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알기로 라솔 왕립 해군의 규모는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엘랑키아 왕가는 해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다.
그러니 이를 중간에 막을 가능성은 높지 못했다.
사실 이스키비르 강에 띄운 소수의 하상함대 역시, 이 심리적인 간극을 찌른 아이디어였다.
라솔의 대형 선박은 이스키비르 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없었다. 하지만 엘랑키아 선박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으므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한 소형 무장 갤리선은 강 위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물론 라솔도 금방 대응을 할 테니 잠깐 동안이겠지만.
하지만 바다로 나가면 다르다.
라솔 잔존병력 전군이 수송선을 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병력과 중요한 군수 물자를 지원 받으면 버티기 훨씬 쉬울 것이다.
엘랑키아 측도 여유가 무한은 아니니, 결국 대치하다가 진이 빠져서 철수하고, 적은 유유히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하지만 적은 반대로 행동했다.
“적은 공백 상태인 레뮤즈 성을 침공하려는 게 아니겠소이까!”
“진정하십시오, 세샤르 경. 여기서 직선거리로 레뮤즈로 향한다고 해도 우리가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드 레뮤즈의 신하 된 자로 적의 폭거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소!”
“물론입니다. 저희 트랑카벨 가문 역시 드 레뮤즈 영지의 수호를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드 레뮤즈 영지군의 보병대장이자, 충성스러운 가신인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힌다.
지휘부를 갈팡질팡 혼란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적은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도 속 시원하게 적의 의도를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다.
“적은 아직 강변을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륙으로 들어온다면 우리가 더 빠릅니다.”
“흐으음···.”
세샤르 자작은 불편한 모양이지만 일단 진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불안한 것은 이해가 간다. 왜냐면 나도 불안하거든.
“아버님! 참모장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라마엘? 네가?”
“예, 지금 군을 나눌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제가 먼저 드 레뮤즈 영지로 돌아가 소식을 전하고 할 수 있는 방어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흐음···.”
세샤르 자작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또 하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는 그 아들, 라마엘 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드 레뮤즈 영지는 대군을 동원하긴 했으나, 변경 영주들의 병력이나, 지방 경비대 등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을 야전군으로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거점 방어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이걸 맡겨야 한다면, 지금 군 내에서 이렇다 할 지휘관 보직이 없으면서도 나름 중요 가신의 장남이라는 라마엘 소자작이 적절한 인물이긴 하다.
논의는 레도쿠르 자작과 몇 차례 눈빛을 나누는 것으로 빠르게 끝냈다. 아들이 장하지만,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하다··· 아버지의 눈빛이지만 이의는 없어 보였으니까.
“...저도 라마엘 경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가서, 드 레뮤즈 영지에 알려주십시오.”
“옛, 바로 동료들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지금 적이 향하는 방향에는··· 로그포르 마을이 있습니다.”
로그포르 마을? 나로서는 처음 듣는 지명이다. 설마 거기가 레도쿠르 가문의 영지인가.
“라솔 놈들이 처음으로 불태운 마을입니다.”
“아.···”
“다시는, 다시는 라솔 놈들이 드 레뮤즈를 침탈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음, 믿는다, 라마엘!”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유난히 힘이 들어간 모습으로, 라마엘이 몸을 돌려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