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36화 (336/556)

36-5.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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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의 엘랑키아 서부군 기병대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언덕 위의 라솔 군 진영의 반응은 대혼란이었다.

“...왜 물러나는 거지?”

마티오 가엘 데 프라가도, 코루냐 연대장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버려진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만든 코루냐 연대를 포함한 라솔 군의 주변을 빙빙 돌던 엘랑키아 기병들이 떠나고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행군 대열을 새롭게 갖추고, 소수의 정찰병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보면 지휘체계가 어그러지거나 사기가 떨어져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전황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보다 방어가 튼튼하니 당해낼 수 없다 생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설마 총병 매복이 들킨 것인가.”

“적이 천리안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 있겠나.”

“혹은 공격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지쳐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졸려서 판단력이 흐려졌을 때 실수하는 것을 기대했는데··· 흐음.”

어쩌면 졸려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마티오 연대장 자신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쫓아와서 최후미인 자신들을 따라 잡은 엘랑키아 기병대이니, 반드시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르는 엘랑키아의 기사님들이니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돌입해올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분배해서 적을 끌어들인 후 근거리 일제사격으로 큰 타격을 입히고, 근접전으로 달려들어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한 번 지엽적인 견제 공격을 반복하는 병력을 뺐을 때는 드디어 총공격이 오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적이 빠르게 병력을 수습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좀 무리해서라도 약점을 보여줘서 공격을 유도했어야 했나?”

“적장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데 걸리겠습니까. 썩어도 엘랑키아 기사들인데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 뚫리는 척 하다가 정말로 뚫려서야 창피해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지···.”

조금 안심이 되어서인지 연대장과 참모 사이에서는 농담이 오간다.

라솔의 군인은 나이나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막연하나마 엘랑키아 기사의 돌격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라솔 왕국이나 그 봉신국들에도 기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중무장 귀족 기사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지형이 복잡하고 평지가 적다는 특성 상, 결코 기병의 숫자가 많을 수 없었다.

당연히 양성의 문제도 있고, 한꺼번에 기병 대군이 활동할 만한 전장도 많지 않았고. 심지어 적장이 기병을 쓰기 어려운 지형으로 이동해 버리면 힘들게 키운 기병의 역할이 확 줄어버리니까.

그런 상황인 라솔 군이 간혹 만나야 했던 엘랑키아의 기병 돌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전투력과 실적에 자신감을 가진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 연대들 조차도 그렇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엘랑키아에 대한 라솔의 패배는 결정적인 순간에 구름처럼 평원을 뒤덮고 몰려오는 엘랑키아의 기사들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으니까.

선대의 군사적 전통을 존중하고, 갈고 닦아 강군으로 거듭난 보병 중심의 라솔 군인 만큼, 그런 인식을 머리속에서 지우기 힘들었다.

무릇, 선입견이란 배우고 나아가는 자들에게 가장 큰 적 중 하나니까.

엘랑키아 군의 체질이 조금씩이나마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에는 아직 근거나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바로 어제, 서로 무수한 피를 흘리며 결국에는 뚫어내지 못했던 철벽과도 같았던 트랑카벨 영지군 제10 연대의 강함 보다도.

선배들의 전적에서 배워온,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단의 전설의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까.

“적은 추격대의 선봉일 테니, 여기 더 머무는 것은 위험하겠군. 철수 준비를 시작하게.”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혹시 적이 기습을 위한 거짓 퇴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공격해오면 싸워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하핫, 그렇군요. 10분 후 이동 준비 완료하겠습니다.”

“좀 더 쉬면 좋았을 텐데. 병사들이 고생이 많군.”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것에 비하면 이동 중에 공격당하면 아무래도 더 피해는 크겠지.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건이 좀 좋지 않다고 물러설 것이었으면 검천사의 이름을 달지도 않았을 테니까.

“멀리 남서쪽 숲 방향에 기병대가 보입니다.”

“뭐? 설마 우회한 적인가?”

그럴 리가. 방금 적은 북쪽으로 퇴각했다. 악마의 힘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정 반대편에서 갑자기 튀어 나올 수 없다.

설마··· 이것을 노리고 처음부터 병력을 나눠 놓았던 것인가? 그렇다면 왜 이런 어정쩡한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내서···.

마티오 연대장의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아, 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 검은 복장이나, 깃발을 보면 할콘 남작의 기병대로 보입니다.”

“...그 기마 용병대 말인가?”

일단 적이 아니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방금 도착한 것인가? 숲에 계속 숨어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왜, 지금?

“이동 준비는 멈추지 말게. 적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알겠습니다. 퇴각하는 데 아군 기병의 호위를 받을 수 있다니 다행이군요.”

“그래···.”

확실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로 다른 병과가 협력하면 단순한 병력 수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하니까.

하물며 적 기병에게 위협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도 무리해서 퇴각해야 하는데 아군 기병이 합류한다니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구만.”

분명 그래야만 할 텐데, 머리속에서 불쾌한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할콘 남작의 기병대는 어제의 전투에서, 아니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 엘랑키아 영내로 침공해온 직후로 계속 그랬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믿음직한 동료로서 어깨 옆을, 그리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냐라면 모르겠다.

만약에 저들이 한참 전부터 매복하고 있던 것이었다면.

코루냐 연대의 지휘부가 버려진 마을에 자리 잡고 낙오병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할 무렵부터 매복하고 있었다면.

적으로 부터 뿐 아니라, 아군으로 부터도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면?

만약 적의 공격으로 부터 코루냐 연대와 패잔병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모습을 드러내 도와주었을까?

섣부르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 불쾌했다.

“기병대 방향에서 소수의 기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령으로 보입니다!”

“알겠네.”

그나마 한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할콘 남작의 기병대는 자신들의 몸값이 가장 비싸지는 순간에는, 분명히 전장에 나타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 몸값 비싸지는 순간 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내가 직접 만나보겠네. 이동 준비는 계속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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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두컴컴한 주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잠시 후에야, 내가 자고 있었고, 자는 동안 누군가가 천막의 차양을 내려 빛과 소리로부터 차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참.

새벽부터 추격 부대를 위한 재편성을 마치고, 천막에서 보급품 상자에 기대어 잠을 청한 것은 해가 뜨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먼저 강제로 쉬도록 보낸 첼레스티나와 교대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내 삶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꿀 같은 낮잠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아직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 자다가 깨어 보니 해는 중천에 출근 시간은 한참 지나있었다는 끔찍한 경험은 다시 할 일은 없겠지. 그렇게 문제가 되면 누군가가 두들겨 깨울 테니까.

나는 천막 입구에 드리워 고정된 천을 젖히고 나갔다. 바쁘게 움직이던 참모와 호위병들이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인사한다.

“일어나셨습니까, 콘도티에레?”

“혼자 쉬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너무 일찍 일어나신 건 아니십니까?”

병사들은 제대로 된 잠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로 다섯 시간 이상은 쉬었으리라. 장교들도 규정에 따라 교대로 휴식하도록 명령했다.

첼레스티나를 포함한 참모 장교들 역시 교대로 쉬었다. ···각자 분야라는 것이 있다 보니 좋든 싫든 불려 나와서 일을 한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겠지만.

저 멀리서 뭔가 지시를 내리던 첼레스티나가 나를 보더니 뛰어온다.

“콘도티에레!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오?”

“내가 얼마나 잤지?”

“지금··· 겨우 한 시간 남짓 주무셨는걸요? 그러면 안 돼요···.”

“이상하게 개운한데··· 이미 잠이 깼는데 뭐 어떡하겠어.”

생각보다 적게 잤는데도 몸은 가뿐하다. 나중에 잠 은행에 대출 이자를 왕창 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일단은 쓸 수 있을 때 써야겠지.

어쨌든 생각보다 일찍 일어난 덕에 여유가 좀 생겼다. 출격인 정오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 남았으려나.

“내가 자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

“네에, 콘도티에레!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고, 병사들도 잘 쉬고 있어요. 이 땡볕에서도 정신 없이 자는 걸 보면··· 좀 안쓰럽긴 하네요.”

“...병사들의 헌신에 신세를 지고 있구나.”

바로 어제 목숨이 오가는 전선에서 종일 싸운 병사들의 일부는 지붕도 없이 흙바닥 위에서 자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휴식시간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추격한다고 뛰쳐 나갔던 노브··· 노브리크 자작의 기병대가 무사히 철퇴했다고 해요!”

“그거 다행이네! 고집을 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말을 잘 들은 모양이네.”

“네에··· 그게, 실은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앙비토 공작님이 직접 가셔서 멱살 잡고 끌고 오셨어요오!”

“며, 멱살을?”

“앗, 멱살은 농담이고요. 그래도 직접 가셔서 데리고 오신 것은 맞아요.”

“호오···.”

그렇게 된 것인가.

솔직히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긴 했었다.

물론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앙비토 공작의 애매한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다 생각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서부의 영주와 그 가신들을 살려서 돌아오는 것은 매우 중요했던 데데가, 1천 명의 엘랑키아 기사라는 것은 결코 우습게 볼 전력이 아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듣고 독단행동을 한 사고뭉치들이지만, 향후 남서부 전선, 라솔과의 국경을 지키는 드 몽파르지에 공작 산하에서 든든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그걸 통해서 앙비토 공작이 허수아비 사령관이 아니라 실제로 군령을 발하고 지휘하는 존재임을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걸··· 내가 직접 말 하기는 좀 어려운 면이 있었다.

내가 참모장이고 연합군을 이루는 일군의 사령관이라고는 하지만, 트랑카벨 자작가의 대리 사령관과, 엘랑키아 건국시기부터 내려오는 명문 공작가의 주인과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가서 ‘너희 부하 일이니, 네가 직접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음, 다시 생각해도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한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서 말하더라도 하급자가 건의할 법한 내용이 아니다.

설령 그 행동의 결과가 많은 이득으로 이어지더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 이후, 앙비토 공작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사령부를 떠났고, 명령도 없이 출격한 부하를 잡아 돌아왔다.

음음, 이런 적극적인 사령권 활용은 나쁘지 않다.

본인도 어제 전투로부터 밤을 새서 굉장히 피곤했을 테고, 신분이나 역할로 봤을 때 호사스러운 막사에 자러 들어가도 말릴 이는 하나도 없었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어제의 전투에서도, 패배를 예감하고 안전한 후방으로 퇴각을 권하는 가신의 건의를 거부하고 병사들 사이에 남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모자에 뚫린 총알 구멍이나 온 몸을 더럽힌 시커먼 화약 연기 찌꺼기도 설명이 된다.

결국 이 세상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이다.

최소한의 존중이 있기에 함부로 귀족이 함부로 평민을 죽이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은 맞다.

그렇더라도 공작 전하의 목숨과, 일개 보병의 목숨을 같은 선 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상식’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병사들이 바로 뒤에서 독전하는 사령관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다.

이 전선은 패배할 정소가 아니다.

평소의 용기에 그 확신을 한 조각 얹어주는 것만 해도, 겁쟁이를 불굴의 용사로 만들 수 있다.

고귀한 신분의 사령관이란 그런 존재이다. 분하지만, 그냥 용병 나부랭이인 나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알기에, 라몽 드 레뮤즈 백작 또한 실신하는 순간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오로지 의지로만 버틴 게 아니겠나.

이거 참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앙비토 공작이나, 라몽 백작이나 ‘군인’으로서는 아직 미숙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남의 위에 군림하는 자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으음, 이거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가 되는 젊은 귀족들은 오랜만이네. 용병 나부랭이인 내가 그들 곁에 계속 붙어 있을 수는 없을테지만 말이다.

현 상황은 그냥 봐도 알겠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존중받는다 느끼고 있으며, 그들의 사령관을 믿고 따르고 있었다.

···아마 그래야 할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돌진해오는 적 기병의 앞에서 마지막까지 총을 조준하고, 쏟아지는 포탄 속으로 뛰어 들면서.

다소 이율배반적인 말이지만, 그 두 사람 덕분에 내가 싸우기 쉬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이 말을 하는 건 무례한 행위겠지. 그래도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

“좋아, 그럼 예정보다 좀 빠르게 정찰을 보내 볼까?”

“네에, 병사들을 깨울까요?”

“앗···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음, 아니 30분 정도 있다가 보내자.”

전장에서 수면은 소중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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