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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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속행’
근거리에서 적진을 살펴본 결과, 현실적으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한 서부군 기병대 전방 지휘관들에게 전달된 것은 기대했던 공격 중지 명령이 아니었다.
“정말인가? 노브리크 자작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인가?”
“그,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제가 직접 자작님께 확인 받았습니다!”
애꿎은 전령을 닥달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하는 수 없이 지친 군마를 달래며 공격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순간, 견디기가 더 힘들어진다. 자신들은 승리했으며, 전과를 확대해야 한다는 흥분감에 취해있는 동안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패잔병이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로 완강한 적의 방어에 부닥치자마자 달라졌다.
이틀째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 배는 고프고 군마는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는 ‘패잔병’이라고는 해도 자신들이 한 번 졌던 상대, 라솔 보병이 아닌가. 심지어 패배시킨 것도 자신들은 아니다.
자신들이 불명예스럽게 패주하여 후방에서 재편하는 사이, 출처도 모를 멀리 변방 출신의 군대가 적진을 포위하여 붕괴시켰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러나 저러나, 자신들이 뱉은 말이 있고 내려온 명령이 있다. 공격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다섯 걸음 더 가까이 접근해 사격한다!”
“적을 최대한 끌어내라!”
“예엣!”
“간다! 엘랑키아 기사의 힘을 보여라!”
타타탕! 타타타타탕!
다행히 적이 가진 탄약의 양이 많지는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엘랑키아 기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라솔 방어선에 가까이 다가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타탕!
“으윽!”
하지만 이는 적의 사격에 또한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노출이 된다는 것이다.
라솔 군은 탄약이 부족해서 그런지 소수의 명사수에게만 화약을 집중해서 반드시 명중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만 발사하고 있었다.
타탕, 타타탕!
“커헉, 맞았어!”
“겁 먹지 마! 화력은 이쪽이 강하다, 밀어 붙여!”
타타타탕!
약점을 노리며 빙빙 도는 엘랑키아 기병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아무리 적이 장창의 숫자도 적고, 화기의 숫자도 적은 쭉정이 방어선이라고 해도,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밀집해서 굳건히 버티는 보병 대열에 돌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설령 엘랑키아 중기병들처럼 키도 크고 튼튼한 군마에 올라, 철갑으로 온 몸을 두른 입장이라 해도 그렇다.
돌격에 성공하려면 사전에 성립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가까이에서 총격을 집중하고 돌격을 위협하며 적이 대열을 스스로 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근거리 사격을 뒤집어 쓰며 동료들을 잃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완전 무장한 적 기병이 돌입해 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시달리던 보병들은 돌발 행동을 하게 된다.
때로는 자기 위치를 버리고, 몇 걸음만 나가면 닿을 것 처럼 가까이 있는 적 기병을 때리러 가거나.
때로는 공포에 질려 무기까지 팽개치고 무조건 후방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적진을 흔든 이후에야 중기병의 장기인 충격력을 보여줄 수 있다.
물론 이쪽도 동등한 희생을 감수하며 준비된 적 보병 대열의 정면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해당 돌파가 승패에 직결된 중요한 경우라면 그럴 수 있다. 서부군 기병들 역시, 그런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기꺼이 적의 창날에 찔릴 위험을 각오하고 정면으로 돌입할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저 흔해 빠진 패잔병 토벌전, 기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아가며 이겨내야 할 결정적인 전투도 아니고.
거기에 정신적, 유체적으로 지친 몸, 군마도 말을 잘 듣지 않고 반응이 느리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몸을 사리는 것도 당연했다.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후방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휘부는 속이 탄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가! 적은 패잔병,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적의 기세를 올려주는 꼴이 아닌가!”
“...적 방어선이 생각보다 견고한 모양입니다.”
“엘랑키아 영웅 기사들의 후예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은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 자포자기한듯, 의기소침한 참모 장교들은 그런 지휘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공격이 지지부진하다면, 이 이상할 정도로 흥분한 기병대장도 고집을 부르지 않고 퇴각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긍정적이지 않다.
물론 이를 악물고 현 병력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면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서부군 기병대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는 것 또한 자명하다.
지금 상대하는 적이 그만한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고집을 부릴 정도로···.
“내가 직접 나서겠다! 후위대는 나를 따르라!”
“자작님! 위험합니다!”
“지금 중요한 게 무엇인가? 승리의 영광인가, 그저 붙어있을 뿐인 내 목숨인가?”
“그런 문제가···.”
핏발 선 눈으로, 노브리크 자작은 소리를 버럭 지른다. 핏발의 이유는 이틀째 자지 않고 싸우고 있어서일지, 이성을 잃고 극도로 흥분했기 때문일지.
그는 원래 이런 무모한 지휘관은 아니다. 애초에 기병 지휘관이 무모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참모들은 지휘관의 낯선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노브리크 자작은 기어코 할 생각인 것일까!
대장이 나서는데, 참모가 후방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부디, 여기서 죽어야 한다면 제발 전투라도 이길 수 있도록···.
복잡한 분위기가 지휘부를 감싸는 동안, 멀리서 전령의 외침이 들려온다.
“전령! 앙비토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전령입니다!”
“또 전령인가! 회군을 알리는 명령인가?”
“아, 아닙니다 대장님!”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운 노브리크 자작의 대답에, 전령을 가져온 장교가 깜짝 놀란다.
“전령! 본관, 가는 중. 기다릴 것! 이상입니다!”
상상도 못한 내용에, 노브리크 자작 뿐 아니라 참모들까지 기겁했다.
그 사령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공작이 최전방 중에서도 최전방인 여기까지 온다고?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 차는, 먼저 왔던 전령의 대답에 노브리크 자작이 ‘전장에 나선 기사는 대의를 위해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는 법’ 운운하며 거절 의사가 전달된 이후 다시 보낸 전령이 아니다.
분명, 먼저 보낸 전령의 명령이 거부당할 것을 감안하고 본인이 직접 출발하겠다고 앞서 보낸 것이다.
“...앙비토 공작께서는 어디 쯤 오고 계시다고 하는가?”
“전령의 말에 따르면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고 계셔서 바로 뒤에 이어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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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하는 것 없이 매 사냥만 하고 다닌 덕에, 말 타는 것 하나만은 남들 만큼 하게 되었다.”
얼마나 빠르게 달려온 것인지, 땀투성이가 되어 주저앉기 직전인 말에서 내리며 앙비토 공작이 말했다.
그를 호위해온 20여 명의 수행원과 호위 기사들의 몰골은 훨씬 안되어 보였다.
그들의 말은 말 그대로 거품을 물고 있었고, 거친 기마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 수행원들은 바닥에 구토를 하기도 했다.
앙비토 공작 역시 얼굴이 땀으로 번질대고 있었으나,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어차피 그의 몰골은 화약 연기 속에 하루종일 있었던 덕에 원래 엉망이었으니까.
“노브리크 자작은 어디 있는가!”
“여, 여기 있습니다.”
참모들을 이끈 기병대장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이 서둘러 달려온다.
드 몽파르지에 가문은 서부군의 사령관을 맡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도 엘랑키아 서부에서 가장 중요한 가문이다.
주로 서부의 영주 출신들이 대부분인 서부군 장교들이 깍듯이 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군사적으로는 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말이다.
“오는 길에 귀경이 보낸 전령을 받았네. 노브리크 기병대장은 어찌하여 본관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지?”
앙비토 공작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묻는다. 말투 또한 평온하여 조금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생뢰르반의 전장을 떠나 허겁지겁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분명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터인데···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는 한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
“저, 전방에서 적을 접한 지휘관으로서의 판단 또한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작 전하.”
“흐음···.”
“국왕 폐하의 명을 받아 라솔 토벌을 명 받은 저희, 영광스러운 엘랑키아 기병대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호오, 승리하기 직전이었다는 말인가.”
앙비토 공작은 정말로 흥미롭다는 듯, 여전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언덕 위의 작은 마을 주변에 배치된 적의 방어선을 올려다 본다.
현재는 사령관인 앙비토 공작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공격이 중지된 상태로, 일부 선견대가 언덕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정도였다.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도대체 앙비토 공작의 태도만 봐서는 그 생각을 읽을 수 없다.
대화의 전개를 봐서는, 마치 전방 지휘관인 노브리크 자작의 말에 설득당한 것으로도 보인다.
실제로 지금까지 앙비토 공작의 사령관으로서의 행동은 그러했으니까. 건의가 올라오면, 귀경의 뜻대로 하라는 대답을 할 뿐이다.
노브리크 본인도 그리 느꼈는지, 좀 더 자신감을 찾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한다.
“적을 대파하였다면, 추격전이 이어져야 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 드 레뮤즈 사령부는 이에 대해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추격을 결심했는가, 귀경은?”
“그렇습니다, 전하. 이번 추격전에서의 승리야말로, 우리 서부 귀족들의 명예를 더욱 빛나게 할 중요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흐음···.”
노브리크 자작의 열변을 들은 앙비토 공작은 생각에 잠겨 턱을 쓰다듬는다. 겉으로 보아서는, 상대의 장광설에 설득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추격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참모장인 트랑카벨의 에트 경에게 들었네. 정오가 되면 휴식과 재편성을 마치고, 추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귀경이 이렇게 나선 탓에, 그 추격군에서는 우리 서부군 기병대가 빠질 수 밖에 없어졌네.”
“하, 하지만 저희는 이렇게 앞서서···.”
휘하 기병대장의 반박을, 앙비토 공작은 고개를 거칠게 저어 끊었다.
“귀경들은 제발 서로의 얼굴을 살피기 바라네.”
“어, 얼굴 말씀입니까?”
“본관이 보기에, 귀경들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과 같네.”
“....”
노브리크와 참모들, 주변의 다른 호위병들까지도 피곤에 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본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
“게다가 노브리크 자작, 귀경은 본인이 있어야만 할 위치를 버렸네. 이를 책임감 있는 기사의 행동이라 할 수 있나?”
“기사가··· 있어야 할 장소는 언제나 최전방···.”
“음음, 그게 아니야.”
두 번째 말을 끊긴 노브리크 자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직 어제의 전장, 생뢰르반에는 서부군 기병들이 많이 남아있네. 이곳에 이끌고 온 1천여 기 이외에도 귀경이 책임져야 할 장병들이 있지 않은가?”
“아···.”
이번에야 말로 말문이 막힌다.
실제로 그랬다. 엘랑키아 왕국군은, 그리고 서부군 사령부는 엄연히 지휘체계와 서열이 있는 군사적 조직이다.
단순히 귀족 전사인 기사 개개인이 모여 모인 협의체 따위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과 임무가 있는 하나의 조직이란 말이다.
노브리크 자작은 허상의 의무를 위해, 당장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본관의 생각에 말일세, 우리 서부군이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은 ‘있어야 할 위치에 없었다’라는 것일세.”
대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앙비토 공작의 다소 지저분하지만 여전히 단정한 얼굴에 살짝 찡그러진 표정이 나타난다.
“우리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돕기 위해 전장에 섰네. 우리는 전군의 우익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임무를 지키지 못했네.”
“....”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서부군이 버리고 떠난 자리를, 멀리 블랑독에서 온 보병들이 지켰다네. 몇 시간 동안이나 말이야. 이들은 싸울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 귀족이나 기사 출신도 아니네.”
앙비토 공작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싸울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 귀족’들은 아무도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지 못한다.
“대부분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나선 평범한 농부 출신이라 들었네. 하지만 그들이 우리가 막아내지 못한 적을 멈춰세웠다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그들이 대신 흘렸다는 말이야!”
갑자기 목소리고 올라가자 주변에서 움찔한다. 계속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평이하게 말하던 앙비토 공작이 갑자기 감정을 실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던 상황에서 할 말은 없네. 그 때문에, 마지막까지 홀로 분투해 결국에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참모장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나, 실신하는 그 순간까지도 사령부를 떠나지 않은 라몽 백작에게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네.”
“....”
“내 생각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게 된 불명예를 인정하고 직시하는 것 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각하네. 제발, 더 이상 오명을 늘리지 말아주시게.”
“...알겠습니다.”
지독한 표정이 된 기병대의 지휘관과 참모들이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조아린다.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 국왕 폐하께 위임받은 사령권에 따라, 귀경의 임무를 해제하겠네.”
“...알겠습니다.”
“서부군 기병대는 향후 본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지휘에 따르도록 한다.”
“옛,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