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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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기병 지휘관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께서 보내오신 전과들입니다.”
“전과라니···.”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데리고 온 수행원들이 뭔가를 우르르 내려놓는다.
수행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나에게 질문이 있냐는 듯 공손한 자세로 서서 인사한다.
“라솔의··· 깃발과 투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참모장님.”
“노브리크 자작이란 분이 이걸··· 가져오셨다고요? 직접?”
“새벽에 출전하신 이후, 전령을 보내 앙비토 공작 각하께 보내오셨습니다.”
“본인은 돌아오지 않았고요?”
“옛, 전령은 ‘오명을 반납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을 전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옆에서 첼레스티나도 작게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물론 군기를 노획한다는 것은 대단한 전공으로 치부된다. 그야, 군기란 스탠다드, 부대의 ‘상징’이며 ‘기준’이다.
적과 교전해서 군기를 노획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적을 섬멸하거나, 전면적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건 하급 부대 단위나, 일개 병졸들이 자랑할 일이지 전군의 일익을 담당하는 상급 지휘관이 할 행동은 아니다.
하물며 중요한 작전 행동중에 일부러 전령까지 보내서 과시하듯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전투 중 과도한 전리품 집착은 군사재판에서 중형이 내릴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위니까.
그나저나 이거 큰 일이 났는데.
“혹시 노브리크 경을 따라간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설마 기병대 전체가 따라갔나요?”
“아닙니다, 참모장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1천 명이 조금 넘는 숫자가 따라갔습니다.”
“흐음··· 서부의 대귀족 가문과 그 가신들 위주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앙비토 공작의 수행원은 절반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란 표정을, 나머지 절반은 ‘역시 다들 짐작하는구나’ 라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안 봐도 뻔한 노릇이지.
누구나 자존심이 있고, 자부심이 있다. 특히나 좋은 가문에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귀족님들은 더 할 것이다.
하물며 엘랑키아의 전통 귀족들은 말에 올라 창을 휘두르며 영토를 지킨 군사 귀족의 후예들이 많다.
그런데 중요한 전투에서 이렇다 할 전과 없이 적에게 낚여 돌격에 실패하고, 종국에는 전멸 위기에 다른 아군에게 구원받아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후에도 재집결에 실패해 전장을 이탈했다가, 전투가 다 끝난 후에야 돌아왔으니···.
하물며 동등한 존재라 생각한 적도 없었든, 저 멀리 남동쪽의 촌구석에서 온 자들이 주역이 되어 전투를 이겼다는 소식까지 들었을 테지.
귀족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 자들이 모여 피곤함도 무릅쓰고 적을 추격하겠다고 뛰쳐 나간 것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대략적으로는 예상이 가능하다.
“...역시,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보기에도 노브리크 자작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 맞는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뜬금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빈정거림이겠지만, 이 양반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 분명하다.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까.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전장은 뛰어난 기사 개인의 무용으로 전세가 뒤바뀌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옳거니, 맞는 말이네.”
“이처럼 일부터 저지르고 사후 통보 형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공작 전하의 지휘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지상군은 거대하고 정밀한 기계나 다름없습니다. 철저한 지휘 및 보고체계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반론을 말하기로 했다. 군의 규모가 커지고 전장이 넓어질수록 사령관의 시야는 상대적으로 좁아진다.
이번 전투만 해도 결국 나는 전장의 모든 국면을 컨트롤하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던가.
“...모두 이 몸이 어리석어서 생기는 일이다. 귀경의 말을 들을 수록, 얼마나 부족한지를 자각하게 되는군.”
“그,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금방 시무룩해지는 앙비토 공작을 보며,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 대귀족이지만,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고 지식이나 감성도 충분히 나눌 수 있을것 같다.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문의 업 때문에 과중한 역할을 강요당한 것이겠지. 평화시라면 게으르지만 선량한 군주로 칭송받지 않았을까.
아무튼 군사에 대해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이 ‘열성적인 대귀족’에게 쓸 시간이 많지 않다.
“저, 앙비토 공작님 죄송합니다. 지금은 노브리크 자작과 그 추종자들을 구하기 위해 제가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시게, 트랑카벨의 에트 경. 나 역시 노브리크 자작에게 전령을 보내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전하겠네.”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자고로 사령관을 속이고 튀어 나간 군대가 사령관의 말 한마디에 돌아오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그래도 노브리크 자작의 행동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금 정말로 피곤해질 일은, 앙비토 공작이 노브리크 자작의 독단전행을 용인하고 감싸는 것이다. 그 순간 현 연합군의 지휘체계는 박살이 나고 말 테니까.
그게 아니란 것만 해도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지만, 간략한 목례로 인사를 생략하고 바쁘게 지휘부로 이동한다.
“저기 콘도티에레, 그냥 큰 코 다치게 놔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운 좋게 공이라도 세운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고요오···.”
빠른 걸음으로 바짝 붙어있는 첼레스티나가 심통이 난 말투로 말한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
다 이긴 상황에서 일거리를 늘리는 일부 귀족들의 독단적 행동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좋든 싫든 확실한 것은, 그 자들이 엘랑키아 남동부 방위를 앞으로도 책임져야 할 가문 소속이라는 사실이야.”
“네에··· 생각해보니 그렇네요오.”
“어떻게든 무사히 구해내면 그만큼 우리 입지는 강해지겠지.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어떻게든 첼레스티나를 달래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해본다.
최소한 별 가치도 없는 중대급 부대의 깃발이나, 중하급 장교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투구 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챙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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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가자!”
“달려라! 라솔 놈들 꽁무니를 쫓아라!”
노브리크 드 다푸아 자작을 따라간 ‘서부군의 정예 기사대’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장이었던 생뢰르반 마을 부근에서 라솔과의 국경인 이스키비르 강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적은 완전히 무너져 도망치고 있었다. 추격 임무를 기병이 맡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이삭줍기라도 하듯이, 손쉽게 도망치는 적을 쓸어 담으면 될 뿐이다.
이미 전날의 전투에서 하루 종일 혹사당한 군마의 체력을 배려해서 마음껏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실제로 이미 패잔병 무리를 몇 개나 격파했다. 감히 신성한 엘랑키아의 영토를 침범해 으스대던 라솔 놈들이 공포에 질려 거미새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모습은 짜릿했다.
“노브리크 경! 정찰대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우전방에 200명 정도의 패잔병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설 정도의 일은 아니다! 위치는 기록해 두었다가 향후 사령부에 전령을 보낼 때 함께 전달하도록.”
“옛, 알겠습니다!”
추격 초기에는 흩어진 잡병들도 쓸어버리며 기세를 올렸지만, 이제는 그런 정도의 표적은 성에 차지 않는다.
최소한 연대급, 가능하면 그 이상의 대어를 낚아야 한다.
적장에 대해서는 대략 알려져 있었다. 전쟁 전에 수집한 정보와, 아침에 포로를 신문한 내용이 일치했다.
이스키비르 강변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라솔의 변경백.
그리고···.
라솔 국왕의 주요 봉신국인 타라트라바의 공작.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것만이 실추된 서부 귀족 연합의 명예를 높이고 오명을 반납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방에 패잔병들이 다수 보이지만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상대할 필요 없다. 정찰대는 보다 원거리를 정찰해 적의 움직임을 탐지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병졸들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엘랑키아는 건국의 시대 부터 기사의 나라이다.
당연히 막강한 기병대가 전쟁의 주역이다. 그런 만큼, 이번 전투에서도 가장 정통성을 가지고 숫자도 많은 노브리크의 기병대가 전황을 이끄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게 하필 라솔 놈들의 농간에 빠지는 바람에···.
그 후로 연이어 벌어진 추태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었다. 노브리크의 기병 뿐 아니라, 서부군 전체가 공포에 질려 전선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했던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전투가 패배로 끝났으면 모를까.
정신없이 도망쳐서 흩어진 부하들을 간신히 수습하고 있던 와중, 승전보를 들었다.
비록 전통 있는 대귀족이라고는 하나, 군사적 경험은 전혀 없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군대와 그의 외부 가신 집단인 블랑독의 군대가 라솔 군을 무찔렀다고!
블랑독이란 무엇인가.
최근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척박하기로 유명한 변경의 황무지라는 말 밖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산 포도주만은 제법 쓸만하다던가.
그런 촌구석에서 끌고 온 군대이니, 그 꼴이 가관이었다.
요행히 그럭저럭 기강은 잡힌 모습이었으나, 전군의 절반이 형편 없는 용병 나부랭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기병의 주력은 흉하기 짝이 없는 근본 없는 이민족의 옷을 입은 한 무리였다.
엘랑키아의 기병이란 모름지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중장갑을 걸치고 늠름한 군마에 올라 대륙을 호령하는 존재이다.
도저히 말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작달막한 털투성이 짐승에 괴상한 옷을 입고 설치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전쟁의 주역을 빼앗겼다니, 족보를 따라가다 보면 엘랑키아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드 다푸아 가문의 주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치욕은 한순간이다. 새로운 전과를 쌓기만 한다면, 서부 귀족들의 용맹함은 다시 엘랑키아 전체에 전해질 것이다.
노브리크 자작은 창을 든 손에 힘을 줬다. 물론 그 역시 권총을 가지고는 있으나, 역시 엘랑키아의 기사라면 무엇보다 창을 잘 다루어야 한다.
새로운 승리의 영광은 그의 창 끝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니까.
“노브리크 경!”
멀리서 가벼운 차림의 정찰병이 숨가쁜 외침과 함께 달려온다.
“가까운 마을 근처에 적의 대병력이 집결해 있습니다! 그 수는 최소 1천 이상!”
“오오, 확실한가?”
“옛, 마을의 토담 너머로 보이는 깃발을 보았을 때, 최소한 연대급 부대로 보였습니다. 패잔병들의 집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수고했다!”
튼튼한 군마와 갑옷을 살 형편이 안되는 향사나 평민 출신은 이런 식으로 귀족 기사대에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실한 정찰병이니 향후 포상이 있을 것이다.
“목표가 결정됐다! 전 기병, 집결하여 마을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흠··· 이 마을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게··· 쿠앙트뢰라는 이름의 마을입니다.”
“쿠앙트뢰라···.”
어디서 들어봤더라. 최근에, 정확히는 이번 출병 이후로 들어본 것 같은데.
참모 중 한명이 노브리크 자작의 생각을 읽은 듯 부연 설명을 한다.
“이번 결전이 있기 전에, 루젱 백작님 지휘 하의 연대가 적과 교전했던 곳 근처입니다.”
“아하, 그렇군.”
서부군의 훌륭한 보병 지휘관이지만 너무 걱정이 많은 게 흠인, 루젱 드 마로텍스 백작이 적 기병에게 공격당했던 그 마을이다.
그때도 루젱 백작은 적을 격퇴하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었지. 블랑독의 볼품없는 기병대가 그들을 지원했다던가.
그렇다면 기병이 유리한 전장이라는 뜻이다.
비록 전날 종일 싸우고, 제대로 쉬지 못해 피곤한 상태일지라도 엘랑키아 건국 영웅들의 적통인 기사대가 패배할 리가 없다!
“저 앞에 마을이 보입니다, 노브리크 경!”
“좋아, 적정은 직접 살피겠다. 귀관은 여기에 남아 대열을 정돈하고 공격을 준비하라.”
“옛, 알겠습니다!”
부대 전체가 중간중간 잠시 휴식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피로 때문인지 행군 대형이 다소 무질서한 점은 아쉽다.
허나, 적을 앞둔 엘랑키아의 기사도가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번 라솔 군은 보통 부대가 아니라고 한다. 연대마다 이름이 붙은, 그것도 감히 주신을 섬기는 검천사의 이름이 붙은 정예 부대라고 한다.
그 부대를 섬멸하고, 본대의 집결 위치를 알아낸다면 수공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동하자!”
자부심 강한 엘랑키아 기사들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한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