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4.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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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레뮤즈 백작가의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전장을 우회하고 있었다.
따당! 타타타탕!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전장에서는 간간히 총성이 들린다. 양군이 가까워질 때마다 서로를 견제하고 쓰러뜨리기 위해 총병들이 발사하는 것이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가는 초원에는 어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속절없이 내리는 땅거미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감히 엘랑키아의 영토, 드 레뮤즈 백작님의 영토를 침범한 라솔 침략자 놈들은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사실 그의 머리속은 두가지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길고 괴로운 하루였고, 영웅적인 싸움을 거친 병사들은 너무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
소베트르가 이끄는 드 레뮤즈 기병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희생’이란 위험을 감수하고 동료들을 잃은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당장 기병대의 군마들만 해도, 거의 하루종일 중무장한 기사들을 태우고 있었으며, 최소한 2회 이상 돌격을 수행했으니까.
이번에 추격대를 꾸려 데리고 온 후위 기병들이 탄 군마들도 상태가 좋지는 않다.
지금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참모장에게 받은 임무는 미리 달려가 적의 퇴각로를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번 돌격이나 적극적인 추격전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는 회의적이었다.
위에 탄 기사의 사기가 아무리 왕성하더라도, 체력을 소모해 다리가 후들거리는 군마까지 의지만 가지고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조금만 더 버텨라!”
그렇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했다. 소베트르의 추격대는 속보 정도의 속도로 아군의 후방을 돌아 이동하고 있었다.
“살려보내지 마라!”
“전진! 이 전투는 신성한 복수전이다!”
그들의 좌측으로는, 어느새 전장에 돌아온 서부군의 병력이 적의 측면을 들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소베트르가 보기에, 그들의 공격은 그렇게까지 효과가 없었다.
한 번 무너진 병력을 다시 수습해 전장으로 되돌아온 수완은 대단하지만, 안타깝게도 엘랑키아 서부군 보병과 라솔 보병의 기량 차이는 현격했다.
자신이 경험해온 전장과는 ‘격’이 다른 싸움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가운데,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아까 후방 공격을 하며 보았던, 블랑독의 군대와 라솔 군의 예봉이 격돌했던 싸움이 다시 생각난다.
‘한계까지 기량을 갈고 닦은 양측 보병이 만나 서로 양보 없이 싸우면 저렇게 된다’ 라는 깨달음에 가까운 감정이 생겼다.
게다가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무너진 혼전에서도, 정확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자기네 대신 ‘더 위험한 이웃 연대를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던 용병 연대의 지휘관까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기병대가 아니라 평범한 보병대를 이끌고 잇었다면, 그런 치열한 전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혼란 속에서 똑바로 전투를 차리고, 현재 가장 중요한 국면을 파악해 지휘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전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보유한 전력을 사용해야 할 기병대장이다.
휘하 전력은 무려 2천 기의 기병, 라몽 백작님이 믿고 맡겨주신 백작령의 최정예들이다.
말 그대로 전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기병대장으로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의 직접적인 전술 지시나, 기특한 용병 지휘관의 조언이 없었다면 이만한 병력을 썩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자각하게 된다.
자신은 실패한 노인네에 불과하고,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을 낭비한 멍청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남들이 시키는 일이라도 잘 해보자고 말이다.
전장에, 주군과 영지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소베트르 경! 전방에 기병대입니다! 숫자는 1천 이상!”
절망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조심스럽게 전황을 살피던 그에게 전위에서 보고가 들어온다.
“기병대라고? 적인가?”
“그,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정찰대는 깃발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전령은 말 끝을 흐린다. 보고가 확실하지 못하고 호통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어둑어둑한 전장, 적의 규모를 막 확인한 정도의 거리에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라는 건 힘든 일이다.
“내가 가보겠다!”
소베트르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두로 나아간다. 피아 식별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까.
뒤늦게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이 각성한 이 노기사는, 최소한 이런 중요한 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서 있었다.
“무장을 보면 중기병은 아니군.”
“옛, 아마 라솔 군의 경기병대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모여선 모양새를 보아하니 적 역시 이쪽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경계는 하고 있지만, 이쪽을 완전히 적으로 인식하진 못한 것인지.
그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적 역시 한꺼번에 전장에서 병력을 빼서 후방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일테니까.
적으로 여기고 공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저들이 트랑카벨 파견군 소속인 프리스마라 기병대일 위험도 있었다.
좌익 끝에 배치된 병력이긴 하지만, 그들이 우익의 적을 몰아 붙이면서 적 후방까지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 아니던가.
“...적이다.”
“그, 그렇습니까?”
잠시 숙고한 끝에, 소베트르는 판단을 내렸다.
적진에 기병창이나 유사한 깃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 기병의 복장에 망토 등 천을 많이 쓴 옷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
프리스마라 기병이라면, 아무리 여라차례 전투를 거듭하면서 창을 소모했더라도, 저렇게 짧은 무기만 들고 있을리는 없었다.
게다가 기묘하게 자락이 길고 통이 넓은 이국의 옷을 입은 그들에 비해, 적은 아무리봐도 몸에 단단히 고정되는 복장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전투 초기에 서부군 기병이 교전했던 적 경기병대가 분명했다.
비록 노인이라 불릴 나이에 이른 소베트르지만, 시력과 체력만은 자신있었다. 이 또한 그가 가진 자질 중 일부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속보로 전진, 만약 적이 아니라 판단되면 다시 명령을 내리겠다.”
“그, 그건 위험합니다, 소베트르 대장님!”
“정말 위험한 건 아군을 쏘는 것이지! 우선 전위는 횡대 대형을 갖추게!”
“알겠습니다!”
믿음직한 드 레뮤즈의 정예들은 빠른 속도로 횡대로 늘어선다. 본격적인 돌격 대형은 아니지만, 충돌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충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습이다.
“전진!”
적도 아직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우선은 전위부대만으로 접근한다. 최악의 경우 역습을 당하겠지만, 이쪽은 총기가 장전된 상태에 갑주를 갖춘 중기병이다.
그 정도의 위험을 두려워해서야, 갑옷을 입고 군마에 올라 전장에 나선 이유가 없다. 잘 풀린다면, 말 그대로 기습에 성공하는 것이다!
“일부가 다가옵니다···.”
“모두 주의하게. 명령 없이 사격하지 말고.”
“옛!”
소베트르 자신도 권총을 꺼내 들고 적진을 바라본다. 적의 일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바로 다음 순간, 소베트르는 확신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철판을 박은 조끼가 희미한 저녁 빛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이런 형식의 복장은 엘랑키아 소속의 기병 누구도 하고 있지 않다. 하물며 프리스마라에도 없다.
결심을 내리고 총을 든 팔을 뻗는다.
“적이다, 사격 개시!”
“쏴라아!”
타탕, 타앙! 탕!
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탕! 따당!
갑작스러운 사격 명령에, 한 발 늦게 일제사격이 터져나온다.
드 레뮤즈 기병대는 부끄럽게도 보유한 총기의 숫자가 적은 편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트랑카벨 가문 소속의 기병 일부가 함께 하고 있었기에 화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저녁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 가까이 다가왔던 적들이 말에서 픽픽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가자 드 레뮤즈! 나를 따르라!”
“돌격! 돌격!”
“돌격! 드 레뮤즈!”
소베트르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가자, 아직 적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드 레뮤즈 기병대가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나간다.
탕! 타탕!
눈 앞의 적이 산발적으로 반격해오지만, 이미 늦었다.
다가갈수록 확신이 선다. 저들은 라솔의 기병대이다!
“으아아아아아!”
놀란 표정으로 말을 돌리는 적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말을 몬다. 기동성을 가진 병력이 여기 머물고 있다는 것은, 뭔가를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것을 빼앗는 것이, 아마도 소베트르가 이끄는 추격대의 오늘 마지막 임무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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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광! 뻐엉!
이제 전장은 완전한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어둠 속에서 발사되는 야포의 화염이 더더욱 치명적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이자, 남쪽 포위망을 사실상 지휘하고 있던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적의 위치를 기억해두고 행군 속도를 역으로 계산하여 예상 위치를 노리는 식으로 포격을 지휘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이다.
이제 자칫하면 어둠 속에 적이 있을 장소로 예상해서 포를 쐇다가, 아군의 머리 위에 떨어질 위험이 너무 컸다.
게다가 슈토르히에서 파견한 포수들을 제외하면, 프리스마라 기병대 소속의 임시 포수들은 숙련도가 너무 낮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어두운 장소에서 하는 일은 실수하기 쉬운 법이 아닌가.
오히려 지금까지 오폭이나 자폭 사고가 없었던 게 기적이다. 원래 전문 분야가 기병인 프리스마라 포수들은 충분히 잘 해주었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사격 중지!”
하지만 이제 너무 위험하다. 자칫하면 아군을 쏠 수도 있고, 혹시라도 포대가 후퇴중인 적에게 공격당하기라도 한다면 다 이긴 전투에 불필요하게 희생을 늘릴 수도 있다.
“슈토르히 포수들은 본대로 복귀하고, 프리스마라 연대 역시 화약을 챙겨 철수하도록 전해줘. 모두 정말 잘했다!”
“전달할게요, 대장!”
안타깝게도 완전한 포위망 형성은 실패했다. 애초에 너무 과한 것을 기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야전에서 보병 사각 대형 끼리의 추격전이란 것이 원래 이렇다.
서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힘싸움 하는 데나 적절하지, 한쪽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미리 가서 퇴로를 막는 게 아니라면 결국 놓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밀집 대형을 풀고 가봤자,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적의 돌파력을 막을 수는 없다.
적을 완전 붕괴시킨 게 아닌, 적이 힘을 남기고 퇴각하게 만든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아군 기병대가 적 기병대를 쫓아내고 퇴각로를 제한했으며, 서부군과 드 레뮤즈 보병대가 양 측면에서 적을 엄습했기에 상당수는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적의 상당수를 잡아두지는 못했으리라.
슈토르히 연대 정면에는 산개 대형으로 도전해온 적들의 적지 않은 시체가 널려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슈토르히 연대 입장에서 정말로 무의미한 공격이었지만··· 이는 다른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지연전이었다.
게다가 산개 대형이면서도 기강을 유지하고, 오랜시간 슈토르히 연대의 시선을 끌었다.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작전이었다.
총알받이로 내보낸 그저 그런 병력이 아니라, 소수로도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는 정예부대가 맡은 임무였던 것이다.
비록 적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만큼 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대체 저 어둠속에서 퇴각하는 적이 어느만큼의 힘을 남기고 있는지 말이다.
이미 승리로 끝난 전투에서 도박을 하고싶지는 않다. 루트비히는 적이 도전해오지 않는 이상, 이 이상의 공세는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끔 길 잃은 적병이 공포에 질려 배회하다 포로로 잡히는 게 아니면, 서슬 퍼런 슈토르히의 정면에 일부러 나타나는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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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 전령입니다!”
“어디서 보낸 전령인가?”
“참모장,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보내셨습니다!”
“오오, 어서 이리 주게!”
드 레뮤즈 백작가의 늙은 집사, 드레피니는 서둘러 전령이 내미는 두루마리를 받아든다. 내용을 먼저 읽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라몽 백작님께 에트 경이 보내는 전갈입니다! 아군, 생뢰르반 마을 부근에 침입한 적을 격퇴, 이후 날이 밝는대로, 이스키비르 강까지 적을 추격할 예정!”
늙은 집사의 눈가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이겼습니다! 라몽 백작님, 이겼습니다! 드 레뮤즈의, 엘랑키아의 승리입니다!”
“으음···.”
이 전투의 명목상 총사령관이며, 승장의 명예를 얻어 마땅한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슬쩍 고개를 돌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드레피니를 바라본다.
“...잘했군. 하지만 아직 적이 많이 남지 않았나?”
“그래서 에트 참모장이 날이 밝는대로 추격하겠다고 합니다! 분명, 오늘처럼 또 승리하고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마치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늙은 집사를 바라보며, 라몽 백작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거··· 잘 됐군. 모두 수고···.”
다음 순간, 라몽 백작의 모습이 말 위에서 사라졌다. 그대로 오른편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축 늘어진 주군의 몸을 받아든다.
“아이고! 아이고오··· 백작님! 전투가 끝날 때까지 말에서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배, 백작님의 몸이 차갑습니다!”
“어서 마차로 모셔라! 큰일이다!”
“네엡!”
다행히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표정은, 그렇게 괴로워 보이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