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30화 (330/556)

35-53.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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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들이 바쁘게 전장 여기저기를 오간다.

“전령! 네그라타 연대에 원하는 만큼 전진하도록 위임! 탈출하려는 타라트라바 군을 압박하라!”

“네에, 전령! 네그라타 연대에 전진 권한 위임! 탈출하려는 타라트라바 군을 압박할 것!”

“좋아, 그대로 전해줘!”

“네에, 콘도티에레!”

적장이 주 전선 유지를 포기하고, 전장에서 전군을 탈출시키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드 레뮤즈 백작가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승리했다.

명백한 승리임에도, 아직 전투는 전략과 전술적 두 가지 점에서 끝나지 않았다.

첫번째로, 지금까지의 전투들과 달리, 이번 전투는 블랑독이라는 지역의 트랑카벨이라는 지방 정권이 주역이 아니다.

드 레뮤즈 백작가,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 그 외에도 엘랑키아 남부의 크고 작은 가문들이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전투이고.

때문에 내 마음대로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정할 수 없다. 애초에 전략적 목표가 사전에 협의되지도 않았다고나 할까.

당장 연합군 구성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라솔의 대군이 국경인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 목전까지 다가오는 상황에서 ‘전투에서 이긴 다음 상황’ 따위를 느긋하게 논의하는 꼴을 봤다가는, 분명 귀족 양반들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엘랑키아 내륙으로의 침공을 기도한 적의 대군을 격퇴하고,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았다··· 는 점에서 1차적 목표는 달성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방어전이기에 오히려 그냥 보낼 수 없다.

엘랑키아의 영토는 언제라도 찔러보고, 불리하다 싶으면 병력 빼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엘랑키아의 가신이나 주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휘권 일부를 위임받은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 정도는 챙기는 것이 맞다.

그러고보니 딱 전투에서 이긴 순간 자기 역할은 다 했다며 여유 부리는 용병들도 있기는 있구나··· 보통 그런 놈들은 오래 못 가지···.

왜, 품삯가지고 장난치기로 유명한 주디칼리 짐꾼들도, 멀리 떠났다가 객사해서 고향 돌아가는 시체 옮길 때는 장난 안 치듯이 말이다.

아무튼 라솔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었다 할지라도, 일단 국경 넘어온 침략군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그냥 용인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두번째 이유, 전술적인 문제가 부각된다.

적은 ‘패배’를 인정했다. 모든 공세를 포기하고 병력을 뺀다는 건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호락호락 ‘전멸’당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격이 거듭해서 좌절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패배를 인정하고 병력을 물린다는 판단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만큼 절망 속에서도 냉정한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있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골치아프다.

불굴의 의지니 뭐니 하는 정신론 타령하는 머저리들은 부대가 행동 불능에 빠질 때 까지 공격을 계속한다.

이러다 패배가 결정된 경우, 지칠대로 지친 부대는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적장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머저리는 아니다.

한계가 오기 전에 공격을 중단하고 병력을 수습했다는 것은···.

그만큼 싸울 힘을 남겼다는 것이며, 그 힘을 써서 포위망에서 탈출하겠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골치 아픈 노릇이지.

“지빌링엔 연대에서 전령이에요! 본인들도 추격에 나서고 싶다고 하네요!”

“으음, 허락할 수 없어. 지빌링엔과 제10 연대 모두 희생이 너무 커. 게다가 아직 남아있는 적 후위도 있잖아.”

“네에, 현재 위치를 지키라고 전할게요!”

“으음··· 그래.”

기세가 넘쳐 먼저 공세를 청해오는 요청을 반려하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만약 이 전장이 바둑이나 장기 같은 추상전략게임의 반상 위라면 승패가 갈린 시점에서 전투는 끝났겠지.

하지만 현실의 적군은 포위당한다고 호락호락 전멸당해 주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

애초에 지금 ‘포위망’은 개념적으로 달성되기는 했지만, 물리적으로 완전히 적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서쪽의 라솔, 동쪽의 타라트라바는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남쪽 어딘가로 탈출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틀어 막기 위해 아군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런 상황이 오자, 드 레뮤즈 보병대의 낮은 숙련도가 포위망 형성을 힘들게 한다.

아니,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번이 첫 출전인 부대들이 아닌가. 지금까지 잘 싸워줬고 자신들의 역할을 다 했지.

갑자기 횡대에서 종대로 바꿔 빠른 속도로 행군해 적을 앞지르라는 것은 신병들에게는 과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들을 놔두고 트랑카벨 파견군만 앞서 보내자니, 오히려 포위망이 느슨해질 테고 말이다.

거기다가 서쪽에서 뒤늦게 몰아치고 있는 서부군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야··· 특히나 라솔 군이 증오스럽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알겠지만 저렇게 몰아붙이기만 해서야 아직 싸울 힘이 남은 적에게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적을 남쪽에서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전장을 크게 우회해 돌아온 슈토르히 연대와 프리스마라 기병대의 일부, 그리고 그들이 노획한 포대 정도일까.

그들이 완전히 적을 차단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들을 최대한 이용해서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드 레뮤즈 기병대, 소베트르 경께서 출격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전령을 보내셨어요!”

소베트르 경에게는 기병대의 일부를 재편해서, 추격전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기동 전력을 만들어달라고 요 청했었다.

방금까지 적과 교전했던 부대들은 병력 희생도 그렇지만 병력 소모가 너무 커서 당장 적극적인 추격이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계속 전장에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해온 기병대장의 판단이 너무도 중요하다.

“소베트르 경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언제라도 출격해서 적의 후퇴를 방해해달라고 요청해!”

“네에, 콘도티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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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탕! 타당!

“쏘고 나서 곧바로 물러나!”

“어차피 적도 바로 추격해오지는 못한다.”

“쏴라!”

타타타탕! 타타탕!

코루냐 연대장 마티오 가엘 데 프라가도는 전군의 후휘에서 부하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연대장님, 여기까지 오시면 위험합니다!”

“지금 엘랑키아 천지에 안전한 데가 어디 있겠나. 너무 나서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으··· 알겠습니다.”

역시나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 연대, 퇴각하는데도 칼같이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쏴라!”

타타탕, 타탕! 타당!

적 경기병 무리가 다가오자, 소대 하나가 견제 사격을 퍼붓는다. 명중하지는 않았지만 적이 얼른 물러선다.

화약 낭비같아 보일 수는 있지만, 약점을 찔러보는 적에 대한 견제는 필요하다. 비록 상처 입은 맹수지만, 약하게 보이면 곧바로 물어 뜯길 테니까.

“화약! 화약 가져왔어!”

“많지는 않으니 우선 두 개씩 분배해! 화약이다!”

연대장인 마티오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중대 단위, 소대 단위에서 이미 부대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분명 어떤 상황에서도, 상관의 지휘가 없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 하며 최후까지 싸우겠지.

···지금 적 포위망 속에 남겨져 탈출을 포기하고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는 테라얀 연대처럼 말이다.

“적은 공격해오지 않는군.”

“그만큼 호되게 당했었는데, 더 싸우고 싶지는 않겠지요!”

“얌전히 보내주면 좋겠지만···.”

마티오의 말에, 중대장이 호승심 가득한 말투로 대답한다.

분명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코루냐 연대는 그만큼 잘 싸웠으니까. 적도 몇 차례나 거듭된 공격에는 진저리를 쳤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쪽 편한대로 생각해줄지는 의문이었다.

“잠시 사령부에 전령을 보내고 오겠네. 후위를 잘 부탁하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연대장이 지나가자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가볍게 인사하며 길을 비켜준다.

날개 꺾인 검천사 연대 병사들은 여전히 투쟁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하다.

이토록 용감하고 멋진 병사들에게 패배를 경험시키다니, 자신은 실로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그가 연대장이다. 나중에 어떤 책임을 지든, 지금은 이 적진 한가운데에서 부하들을 안전히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신께서 이대로 보고만 계시지는 않을 것···.”

“...무슨 소리야 또?”

“...의 영광이 가호하는 유일한 왕국, 라솔에 빛이 있을것이라!”

패배를 인정하고, 살아남기 위해 퇴각하고 있는 부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열정적인 외침이 어디선가 들리고 있었다.

검천사 연대에 눈치 없는 종군 사제라도 있었다는 말인지.

“저건 대체 누구지?”

“아, 알아보겠습니다!”

“아닐세, 내가 직접 가보지.”

마티오는 대열을 유지하느라 바쁜 중견 장교들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직접 소리의 진원지로 가보기로 정했다.

병사들이 만들어주는 길을 따라 조금 이동하자,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누군가가 보였다.

“여러분은 주신의 적자, 검천사의 이름을 받은 위대한 전사들이니, 이대로 전장을 떠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도다!”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정신 나간 종군 사제는 아니었다.

“분명 이름이··· 위그나시오였던가.”

장광설의 주인공은 비쩍 마른 기사,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종교 기사단의 생존자였다.

오렌시아 기사단. 라솔에서는 워낙 유명하고 세력이 큰 종교집단이나 군사집단이었기에 마티오도 당연히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 단장으로 있었지만··· 얼마 전 엘랑키아에 성전을 하겠다며 넘어갔다가 함정에 빠져 전멸했던 그 기사단이다.

결국 이 전투의 원인이기도 했고··· ‘너희 때문에 졌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모두가 포기한 상황에서, 검의 대리인은 앞장서 나서지 않았던가! 검천사의 장병들아!”

오렌시아 기사단의 생존자이자 재무관, 위그나시오 올리메 데 트라가제토의 연설은 핏대를 세우며 점입가경이다.

대체 시체처럼 말라버린 그의 몸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이, 기사 양반. 그만두시오. 우리는 패배했고, 사령관 명령에 따라 퇴각하는 중이오.”

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마티오가 나서 그를 말린다.

허나, 위그나시오는 광기로 번득이는 눈으로 그를 잠깐 바라보았을 뿐, 장광설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아아아!”

오렌시아의 마지막 기사는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과 함께 검을 뽑아 치켜들었다.

···하지만 반응은 없다.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병사들은 그의 장광설에 심취해 듣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다만 순차적으로 퇴각하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코루냐 연대 병사들의 공허한 눈이 그를 바라볼 뿐이다.

“주신을 위하여! 주신의 가호에 왕국에 있으라아!”

“어어? 잠깐!”

싸늘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그나시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멀리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말릴 틈도 없었다.

“으아아아! 오렌시아의 성녀여 우릴···.”

탕, 타탕! 타앙!

스무 걸음은 달려갔을까.

적진에서 하얀 화약 연기가 몇 개 피어오르나 싶더니, 비쩍 마른 종교 기사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허공에 기괴한 그림자를 남긴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선지자인 자기의 뒤를 따라서 라솔 병사들이 구름처럼 돌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코루냐 연대의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모두 이동한다! 엇, 연대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아, 아닐세, 잠깐 소란이 있어서.”

명령이 내려지자, 일제히 후방으로 물러난다.

위그나시오의 시체를 수습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일에 부하들을 위험에 빠드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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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퍼엉!

“이거 미안하군요. 프리스마라의 형제들은 전문 포수가 아니라, 통제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력 지원을 계속 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허헛, 적이 몰려오면 곧바로 꽁무니를 뺄 기세지만요.”

슈토르히 연대를 이끌고 있던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프리스마라 연대의 지원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아직 정확한 상황을 연락받지는 못했지만, 적이 퇴각하려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재집결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동안 꾸준히 포격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지금처럼, 슈토르히 연대 혼자서 동떨어진 상황에서는 말이다.

“연대장 대리, 대열을 넓힐까? 울타리처럼···.”

“흐음···.”

또 다른 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가 의견을 물어왔다. 어쨌든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적을 압박하는 대열을 갖추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었다.

“아니, 이대로 사각 대형을 유지하도록 하지. 이제 와서 제대로 포위망을 갖추기에는 늦은 것 같아.”

“하지만 콘도티에레께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크레시미르의 말에, 루트비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들은 본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령부와 전령을 주고받기 곤란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루트비히는 존경하는 콘도티에레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아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날이··· 곧 어두워 질 거야. 무엇보다 아군과의 교전을 조심해야 할 시간이 올지도 모르지.”

“아···.”

남달리 치열하고 길었던 혈전의 끝에,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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