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2.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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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탕!
“전진 앞으로! 천천히 몰아붙여!”
“라솔 놈들이 도망친다!”
불과 1분 사이에 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기세등등하게 주도권을 잡고 있던 라솔 보병대는 순식간에 수세로 돌아섰다.
공세 위주의 선형, 산개형 전투 대형은 빠른 속도로 방어에 유리한 사각형의 대형으로 변경되었고, 적과의 거리를 두며 물러서기 시작한다.
그만큼 빈 자리를 기세를 되찾은 엘랑키아 보병대가 접근해온다.
무질서한 돌격에 의한 추격은 아니다. 그러기에, 라솔 군은 여전히 질서정연하고, 함부로 덤빌 수 없는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둘러 후퇴하는 라솔 보병들을 바라본다.
아군과 적군이 뒤섞이는 혼란. 어디까지가 안전한 거리인지 감이 오지 않는 어려운 시기이기에, 자신은 활약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아직 ‘한 발’이 남아있으니까.
타타탕! 탕! 타탕!
지연전을 펼치며 마지막으로 사격을 하는 라솔 보병들이 보인다. 거기에 슬그머니 끼어든다.
“어이, 우리는 이제 퇴각할거야! 자네는 용병인가?”
“...상관하지 마시오.”
“이제 끝났어! 퇴각 명령이 내려왔다고!”
누가 뭐라던 이젠 대답하지 않는다. 나브리치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총을 겨눈다.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라솔 총병들도 순차적으로 퇴각한다. 그들로서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한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겠다.
나브리치오와는 다르게 말이다.
이제 곧 적이 여기까지 몰려들겠지. 나브리치오는 담담하게 화승을 확인하고, 입바람을 훅 불어 불씨가 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미리 노리던 상대를 바라본다. 표적은 진작부터 찾아놨었다.
저 자가 ‘콘도티에레’인지는 모른다. 허나, 계속 적 보병들 후방에서 말을 타고 왔다갔다 하며, 전령의 보고를 듣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설령 그가 ‘블랑독의 콘도티에레’가 아니라도 상관 없다. 저 정도면 충분히 가치있는 표적이리라.
“물러선다! 헛되게 죽지 마라!”
“이스키비르 너머에서 만나자!”
“어이, 거기 총병! 물러나라니까?”
주변의 라솔 보병들이 속속 물러난다. 대열을 포기한 무질서한 패주는 아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힘과 여유를 남긴 후퇴.
눈 앞에서 썰물 빠지듯 라솔 군이 퇴각한 이 때.
조금 있으면 엘랑키아 군이 그 빈 자리를 채울 것이다.
완만하게나마 비탈진 지형.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접근해오는 적의 선두 대열.
이 모든 게 말에 탄 표적을 분명하게 노릴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지금, 나브리치오와 표적 사이에 방해물은 가장 적은 상태이다.
위태롭지만, 어쩌면 오늘 최고이자 최후의 기회이겠다.
어차피 남은 총알은 단 한 발이니까. 화상이 심한 피부에선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이 사격이 끝나면 재장전도 할 수 없겠지.
“너 이 새끼!”
옆에서 또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 빨리 다른 아군 따라서 퇴각이나 하라고.
이 최후의 한 방,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예정대로, 남달리 긴 총열 끝의 가늠쇠 위에 표적을 올린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
퍼억!
“끄으으윽!”
한동안 고통을 잊었던 줄 알았던 팔뚝에서,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
빠칵!
바로 다음 순간 그롬콜리의 목숨과 바꾼 최후의 총알이 허공을 향해 헛되이 발사된다.
“끄아아악!”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나브리치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군다.
전장의 바닥은 수 없이 밟혀 표층이 벗겨지고 피가 뿌려져 질척질척하다.
그 서슬에 왼 팔을 감쌋던 붕대가 벗겨져 끔찍한 피부가 드러난다. 시뻘건 속살과 시퍼렇게 죽은 살이 번갈아 보인다.
허나 통증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그 왼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통증으로 아찔해지는 시야 속에서, 나브리치오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는 상대를 바라본다.
피가 점점이 뿌려진 흉갑을 걸친, 평범한 복장의 보병이다. 어깨에 두른 가죽 끈이나, 손에 들고 있는 화승총을 봐서는 총병으로 보인다.
어차피 전장, 서로 다른 편으로 만난 이상 죽고 죽일 각오 정도는 되어있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이 자는 자신을 ‘라솔 군’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저 분노와 혐오로 가득한 눈은, 누가 보아도 나브리치오 개인에 대한 원한을 가진 것이다.
대체 왜?
“숨고 싶었으면 이런 긴 총은 들지 말았어야지!”
“허으으, 크윽!”
상대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몸통을 내리찍는다. 두 번째 찍을 때, 우드득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조각나는 게 느껴졌다.
“누구··· 너, 누구···.”
“트랑카벨의 얀 고티에다! 감히 콘도티에레를 노려? 빌어먹을 새끼가!”
“허윽!”
종일 거듭된 전투에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녹초가 된 몸이었지만 어디서 나온 힘이었을까, 얀이 온 힘을 다해 걷어차자 나브리치오의 몸이 뒤집힌다.
“네 놈 총소리는 전부터 듣고 있었다!”
“크흑, 커허억!”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며, 나브리치오는 납득했다.
사냥꾼은 언제나 자신이 노려지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자신은 너무 안일했다.
이만큼 기량을 길러 더 멀리서 노릴 수 있으니, 더 이상 적은 없다 생각했다.
그롬콜리의 이마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마지막 한 발이라는 주박에 묶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집착하다가 총알도 아니라 분기탱천해서 뛰쳐나온 총병에게 붙잡혀 죽지도 않았겠지.
물리적으로 남들보다 긴 총열도··· 멀리서 저격수의 위치를 확인시키고 말았던 모양이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나는 생각이 이것 뿐이라니.
피투성이가 된 시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얀이라는 이름의 사신. 의식이 점점 멀어져간다.
가족들은 아무도 그립지 않지만, 형님만은 한 번 보고싶었다. 무사히 법황청에 도착하셨을까.
무엇보다도···.
죽는 순간 알게 된 지식을 아무에게도 전달하지 못하고 죽는 게 아쉬웠다.
“뭘 봐? 저리 꺼져!”
피투성이가 된 나브리치오의 시체 위에서, 얀이 외친다.
그를 바라보던 라솔 군의 후미가 움찔하면서도 멀어져간다.
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일 것이다.
고생하던 마지막 공세가 실패하고, 후퇴를 시작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퇴각하지 않겠다며 그 자리에서 적진으로 총을 겨누는 용병이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멀지 않은 적진에서 적병 하나가 불 맞은 황소처럼 튀어나와서는 덤벼들었다.
한쪽이 빠지고, 한쪽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순간, 총병과 총병이 드잡이질을 하며 한쪽을 피떡으로 만드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퇴각하는 아군의 최후미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라솔 보병들 입장에서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으리라.
그렇게 라솔 군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 전장으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대열이 다가온다.
“어이, 자네 왜 그랬어?”
“위험하잖나! 이 자는 누구지?”
아군 입장에서도, 얀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 자는 적의 저격수입니다.”
“저격이라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돌아와, 설명하는 얀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 자가 우리 연대장님을 쐈고, 콘도티에레를 노렸습니다!”
실로 개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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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로군.”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사령관은 힘없이 양 팔을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가 보는 앞에서, 하류 주둔군 소속 네 검천사 연대의 날개가 꺾였다.
지금 생각해도 코루냐 연대의 마지막 공격은 아름다웠다. 이 혼란 속의 질서는 적의 방어선을 깊이 타격했고, 거의 무너뜨릴 뻔 했다.
더 이상 적에게는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전투는 불리했지만, 적의 후방을 장악했다는 시점에서 승리의 무게추를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한 끗 차이, 적은 수가 없다 생각했던 국면에서 새로운 수를 창조해냈다. 그야말로 자신이 외통수에 몰리는 기가 막힌 수였다.
운인가?
물론 운도 중요했겠지.
하지만 운 뿐만은 아니다. 자신도 군인이고, 일군을 이끄는 사령관인 이상 잘 알고 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지휘와 배치.
그리고 전장에 선 병사들이 1인분 이상의 역할을 하도록 평소에 조련한 것 까지도 사령관의 역할이다.
그 점에서는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보지 못했던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부터 아드리아니 참모장의 지휘를 받아라!”
“옛, 사령관 각하!”
아드리아니 참모장은 마지막까지 공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 대신, ‘만약의 경우’ 병력을 최대한 살려서 도망칠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이제 거기 맞춰서 병력을 빼내기만 하면 된다.
“테라얀 연대는··· 퇴각이 어려울 것 같다는 전갈입니다.”
“...그렇군.”
가장 북쪽에 있었던 데다가, 보병과 기병의 공격을 앞뒤로 동시에 받았던 테라얀 연대는 퇴각을 시도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설령 퇴각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전 병력의 일부받게 받지 못하리라 생각해도 전군의 후위를 자처하려는 것이겠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지금은 나머지 3개 연대라도 살려서 이스키비르 이남으로 퇴각해야 한다.
“타라트라바 군에게도 전령을 보내라.”
“옛, 변경백 각하, 어떤 내용으로 보낼까요?”
“아군의 측면을 지켜줘서 감사한다. 후위는 우리 라솔이 맡을 테니 먼저 남쪽으로 향하라! 이상이다.”
“옛, 곧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타라트라바 군이 전선을 포기했다면, 지금쯤 라솔 군은 완전히 포위당했을 것이다.
적 후방을 노리는 게 아니라, 당장 활로를 찾는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 점에서, 동맹군에게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쿠웅, 쿵! 콰광!
퍼엉, 펑! 쾅!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저 남쪽에 한 놈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기세로 서슬 퍼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적 보병 연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병력을 살려서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려면, 좋든 싫든 저들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이제 막 퇴각을 준비하고 있는 라솔 군 후방을 노리는 포격이 매섭다.
대체 적은 포병대를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방치한 아군 야포들을 재배치한 것이라면···.
전투가 이렇게 길게, 치열하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다. 전투 초반이 지나면, 더 이상 포대는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엘랑키아와의 전투는 항상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만난 적은 그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보병도, 기병도 말이다.
막강한 엘랑키아 기병에 비해서 보병은 돼지 무리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은 라솔 군 모두가 공유하는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네 검천사 연대가 상대했던 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강했다. 존중할만한 전쟁 전문가들이었다.
그 사이에 엘랑키아 군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라솔과 엘랑키아는 역사가 이어지는 내내 계속해서 싸워왔다.
자신은 엘랑키아 군에 처음으로 패배하는 라솔 사령관도 아니다.
분명, 앞으로도 싸움은 계속 될 테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누군가 다음 사령관에게 전달해야 했다. 반드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력을 최대한 살려서 돌아가야 한다. 이들이 경험했던 중요한 사실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
“공격! 공격!”
“우와아아아아아!”
“살려서 보내지 마라!”
갑자기, 새로운 소음이 전장을 뒤흔든다.
“무슨 일이지 또?”
퀸토 변경백의 물음에, 참모가 팔을 크게 허우적대며 외친다.
“적의 좌익, 초전에 붕괴했던 적이 돌아왔습니다! 몽파르지에 공작의 군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녀석들이 있었지.
잊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그 놈들이야말로 ‘엘랑키아 돼지’라는 편견에 너무도 어울리는 녀석들이었는데.
어쩌면 적은 아군을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일이 꼬이려니까, 조금 더 천천히 돌아왔으면 서로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퇴각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