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1.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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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 티에레라고?”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그 단어는 지난 성전, 엘랑키아 남부에 법황의 대군이 출정했던 전쟁에서 많이 들어봤었다.
그의 고향인 주디칼리에서 상급 용병 지휘관을 뜻하는 그 단어를, 왠지 블랑독의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부를 때 쓰는 모양이었다.
그 단어를 적진에서 외쳐대고 있었다. 설마 적의 우두머리가 이 전선에 나타났다는 이야기인가?
“저 자식들 뭐라 외치는 거지?”
“다시 기세가 살아나는 것 같은데···.”
“신경 쓸 필요 없다. 대열을 유지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손을 쉬지 마라!”
라솔 보병들은 특별히 그 외침에 반응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닥친 문제가 더 크다 느끼는 것이겠지.
나브리치오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들은 아직 ‘그 외침’을 들어본 적 없으니까.
···그리고 불타는 숲 속에서 짐승처럼 추격당하는 공포를 느껴본 적 없을테니까.
서둘러 총을 들어 상태를 확인한다. 조금 전 적의 반격으로 파트너인 그롬콜리를 잃고 구르듯 이동하는 과정에서 총이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까.
일자로 곧게 쭉 뻗은, 장인이 직접 깎아낸 육각형 총열은 통상보다 훨씬 긴 길이를 자랑하며 조금의 왜곡도 없이 완벽하다.
바닥을 긁다시피 도망치던 와중에도, 다친 팔로 보호하며 움직인 덕에 더러워지기 쉬운 총 옆면에도 까만 그을음 외에 망가진 흔적은 없다.
충분히 길이가 남은 화승에 붙인 불이 꺼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아직 마지막 총탄, 동료인 그롬콜리가 절명하기 전 장전해 주었던 최후의 한 발이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화문을 열고 방아쇠를 당긴다면, 즉시 그 최후의 총알이 발사되어 나브리치오가 노린 표적을 명중시키리라.
“새로운 명령이다! 창병 집결!”
“창병 집결, 창병 집겨얼!”
“서둘러!”
전선에 변화가 생겼는지, 라솔 보병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브리치오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다른 목표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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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라!”
타타타타타탕!
바람을 타고 화약냄새와 함께, 전장의 후끈한 열기조차 느껴지는 듯하다.
전장에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게 얼마만인지, 어깨를 나란히하고 바짝 붙어선 병사들의 대열이 손에 닿을 것 같다.
우렁찬 함성소리가 뒤를 잇는다.
“끝까지 밀어붙여라! 드 레뮤즈!”
“드 레뮤즈!”
마지막 충격부대로서 쐐기를 박은 건 라마엘 드 레도쿠르 소자작이 이끄는 드 레뮤즈의 기사들이다.
새로이 전술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아직은 총기 사용이나 철저한 거리재기 등 신규 전술에 익숙하지 못한 옛 시대의 기사들이다.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혼전이 어울릴것이다.
올라갈대로 올라간 병력 밀집도, 양측의 거리가 짧아 대열 유지나 재장전도 어려운 상황에서 무질서하게 이어지는 백병전.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며, 돌격대를 편성해 쐐기로 꽂아 넣은 것, 가늘고 긴 기형적이지만 대담한 진형을 선택한 것.
솔직히 전술적으로 놀라운 결정이다. 적장은 그만큼 경험도 많고 센스도 있으며, 이 전장을 잘 파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심히 싸웠던 병사들이나 그 장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다.
허나 우리 연대장급 지휘관들에게 여기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겠지.
그럼에도 잘 싸우다 부상을 입고 후송된 제10 연대의 기즈 드 콜롬브 연대장이나 지빌링엔 연대의 에르만 슈피리 연대장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물론 현재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는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에게도 말이다.
솔직히 놀랍다. 때마침 예비대를 투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수백 명이지만, 숙련된 라솔 보병들이 아군 후방으로 잠입해 잘 싸우고 있는 드 레뮤즈 보병대의 후방을 기습하는 꼴을 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방치하면, 수백 명은 천 명 이상으로 늘어나 이를 막기 위해 새로운 후방 연대를 투입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지.
적은 잘 했다. 내가 타라트라바 군을 상대하는 전선에서 싸우며 신경을 못 쓰고 있는 동안.
하지만 이제 끝났다.
막 아군 대열이 돌파된 순간 나타난 엘리스토프 중대장의 추격기병들은 적의 기세를 끊어 놓았으며, 라마엘 소자작의 기병대는 말 그대로 적을 갈아버렸다.
“여기는 엘랑키아다!”
“끅, 끄으윽!”
“몰아붙여라!”
보병간의 싸움은 무엇보다 자리 싸움이 중요하다.
적절한 자리를 점유하고, 적절한 대열을 갖추며, 지치거나 부상한 병력과 예비 병력을 교체시키는 것이 전선을 유지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력의 숫자와 규율이 동시에 중요한 것이다. 병력의 숫자는 질량이고, 쉽게 적에게 밀리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한편 적 대열을 부수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 논리 아래에 짜져있던 보병간의 대열에 드 레뮤즈 기병대가 쏟아져 들어가며 싸움의 ‘규칙’을 부숴 버린다.
여기 저기서 대열이 마구 무너지고, 전방과 후방이 의미 없어진다.
잘 싸우던 부대가 분단되어 지휘관은 명령을 내릴 부하를 잃고, 병사들은 구심점을 잃고 혼란에 빠져 제멋대로 움직인다.
200기 정도의 기병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전력이다.
허나 지휘관인 라마엘 드 레도쿠르처럼, 명문 가문에서 자라며 잘 배우고 훈련받은 엘랑키아 귀족 기사들이 훌륭한 군마에 탄 정예 기병이다.
게다가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장이다. 군사귀족의 후예들로서 싸움에 나서는 입장이 각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한참동안 고착되어 있었던 전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제 공격과 수비가 반대가 되었다.
아군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잘 버텨주었으니, 나로서는 그들의 부담을 한시라도 빨리 줄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전투를 완전히 끝낼 의무도.
“첼레스티나, 타라트라바 군은 아직 버티고 있어?”
“네에, 콘도티에레! 정말 질기네요오···.”
“무리하지 말라고 한 건 내 방침이니까. 굳이 궁지에 몰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승패는 여기서 가르게 될 거야.”
“네에! 다른 명령을 내리실 게 있나요, 콘도티에레?”
“아직은 없지만. 곧 루트비히가 올 때가 되지 않았겠어?”
“네에··· 아? 아아!”
괜히 트랑카벨 파견군의 병사들이 타라트라바 군을 몰아 붙이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영역을 좁히고, 적의 후방으로 통하는 우회로를 열었다.
이제 곧, 전장의 절반을 가로질러 적 후방에 루트비히가 도착할 것이다.
슈토르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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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준비가 안 됐나요?”
“아하,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슈토르히 대장 양반. 우리 포수들은 포를 쏴 본 적이 몇 년이나 돼서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려요.”
“그래서 우리 슈토르히 포수들을 파견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어허,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노릇노릇 잘 구워지지, 급하다고 장작만 더 넣는다고 음식이 완성되나?”
“으음···.”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전장을 살핀다.
사실상 슈토르히 연대의 연대장 대리를 맡고 있으며, 전투 초기에는 좌익군 전체의 지휘까지 위임받았던 그이다.
당연히 지금 자신이 맡은 우회 기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수치화에 익숙하다.
정확한 정보, 즉 전장에서 특정 지점과 특정 지점과의 거리, 아군과 적군의 상황, 지면의 상태 등을 알면 거의 오차 없이 작전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분명, 그가 경애하는 콘도티에레도 비슷한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명백하게도, 슈토르히 연대는 이번 우회 기동 성공에 들어갈 ‘최소 시간’을 넘긴지 한참 지났다.
그들과 협력을 하고있는 프리스마라 연대의 기병들이 늑장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 앞에서 사람 좋게 웃고있는 프리스마라 연대의 중대장은 오히려 초조해하는 루트비히를 힐난하며 기다리라고만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리는 것은 이해한다.
비록 적진의 후방을 통과한다지만 교전을 거치며 이동만 하면 되는 슈토르히 연대와 달리, 프리스마라 기병들은 추가적인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마라 기마 용병대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진, 슈토르히와 몇 번이나 협력을 했던 훌륭한 군인들이다.
그들이 시간이 걸린다 하는 건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갑자기 줄여달라 해도 줄이지 못할 것이다. 그걸 분명 알고 있고 믿고는 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트비히가 안절부절 못하자 상대방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허허, 슈토르히의 대장님이 약속 시간 엄수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신다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슈토르히에는 약속 시간 이행이 불가능한 길치가 한 명 있어서, 저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허허헛, 소문은 들었습니다. 거, 누구나 잘 하는 일과 못하는 일이 있는 법이 아니겠나요?”
프리스마라에서 파견된 중대장이 껄껄거리며 웃자, 주변의 슈토르히 용병들 역시 이어서 웃음을 터뜨린다.
물론, 첼레스티나의 끝내주는 길치 속성은 전혀 비밀스러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다 해서 슈토르히의 총병 선임 중대장이자, 콘도티에레의 가장 신임받는 부관을 우습게 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 때, 프리스마라 기병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온다. 다급한 표정이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 말에서 뛰어내리듯 서두르는 태도를 보아도 그들이 일을 대충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일부러 느물거리며 루트비히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같던 파견 중대장의 눈빛도 날카롭게 변한다.
“포대의 이동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옳거니, 왔구만! 슈토르히 대장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프리스마라 연대의 협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저희 연대의 진격에 맞춰 포격을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거야 물론이지요! 우리 프리스마라가 끝내주는 축포를 선사해드리리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슈토르히, 준비!”
루트비히가 휘하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잠시 풀려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빠릿하게 변한다.
“1분 후, 계획대로 적의 후방을 공격한다!”
“예엣!”
“콘도티에레께서는 우리가 왜 늦나 궁금해 하시겠지? 우리가 괜히 늦은 게 아니라 충분히 준비 되었다는 것을 보여드려야 한다!”
슈토르히 연대가 작은 규모의 보병 대열로 나뉘어, 전방을 향해 엄청난 살기를 뿜어낸다. 마치 인간과 무기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날처럼 말이다.
전체적으로 비스듬한 사선진을 갖춘 슈토르히 연대의 대열은 평범한 야전에서 힘싸움을 하기 위한 대열로 보이지는 않는다.
“슈토르히 대장 양반! 신호를 주시오, 포격은 언제 시작하면 되겠소?”
“우리 연대가 진격 나팔을 불고, 30초 후에 부탁드립니다!”
“접수했소! 믿어 주시게!”
루트비히는 연락장교와 미소를 주고 받았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전장의 베테랑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교감이었다.
저 멀리, 말에서 내린 프리스마라 연대가 방열한 상당히 많은 숫자의 야포들이 보인다.
그 포들은 다름 아닌, 전투가 격화되면서 전장 여기저기에 방치되었던 라솔 군의 야포들을 프리스마라 기병들이 긁어 모은 노획 장비들이었다.
“슈토르히, 앞으로!”
“앞으로오!”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다소 조용하던 전장에 다시 울려퍼진다.
프리스마라의 연락 장교 중대장이 손가락을 꼽으며 30초를 세는 것을 보며, 슈토르히는 부대의 선두로 이동했다.
그들이 이번 전투를 끝내는 마지막 일격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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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어째서 퇴각하는 건가?”
“모, 몰라요,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다고요.”
“라솔 군은 끝까지 돌파해서 승리하는 게 아니었나? 아직 힘이 남았지 않은가!”
“이거 놔요, 젠장!”
“으으윽···.”
충동적으로 젊은 장교를 붙잡고 외치던 나브리치오를 밀치며, 라솔 장교는 퇴각하는 부하들에 합류했다.
피투성이 붕대를 끌어안고 신음을 흘리는 나브리치오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으나, 젊은 장교의 동정심은 거기까지가 끝인 듯 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갑자기 라솔 군이 썰물 빠져나가듯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브리치오는 믿을 수 없었다. 라솔 군은 그가 평생 보아온 어떤 보병들 보다도 강했다! 엘랑키아 군 보병 따위는 그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그 유리한 전장에 의존하면서, 나브리치오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연대장급 중견 지휘관을 포함해서, 그가 명중시킨 적은 오늘만 열 명 가까이 된다.
특히 초반의 전투에서, 아마도 중대장이나 유사 직급으로 보이는 적을 네 명 연속으로 쓰러뜨렸을 때는 짜릿했다.
엘랑키아 군은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라솔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때를 놓치지 않은 공세는 적진을 붕괴시켰으니까.
그게 여기서 갑자기 멈추더니··· 이제는 도망치고 있었다.
적은 그리도 강하다는 말인가.
강한 것은 엘랑키아 군인가, 혹은 이단자들의 군인가.
마르코사르 언덕에서, 이단자들의 군대에 밀려 도망치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당시에도 도저히 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법황의 정예들은 몇 차례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배했었다.
그런데··· 여기서마저.
아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기회, 최후의 한 발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크으윽···.”
통증을 느끼며 어깨에 걸쳤던 총을 다시 양 손으로 잡는다.
어지러이 도망치는 라솔 보병들이 나브리치오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핀다. 모두 빠르건 늦건 후방으로 향하는데, 커다란 총을 들고 홀로 거슬러 올라가는 총병이라니 눈에 띄일 법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전장이 혼란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어쩌면 혼란스럽기 때문에 더 기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