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7. 생뢰르반 전투
“괜찮으십니까!”
“대장님? 대장님!”
후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말에서 내린 총기병 대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방금 들렸던 ‘빠칵’ 하는 탁한 총성이 또 한명의 아군 장교를 해친 모양이다.
얀 고티에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더 이상 희생자를 늘릴 수는 없다.
“큭, 커억!”
“괜찮으십니까, 대장님!”
“으으으···.”
···하지만 의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얀은 놀라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괜찮다, 흉갑은 뚫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흉갑을 벗고 육안으로 확인을···.”
“모두 위치로 돌아가라!”
“분명 적이 노리고 쏜 겁니다··· 조금 뒤로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하며 사방을 살피는 제31 정찰 연대의 기병들 사이에서, 검은 갑옷의 기사가 천천히 일어선다.
천운이다.
적의 총탄은 분명 ‘명중’했다. 하지만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의 흉갑이 총탄을 튕겨낸 모양이다.
필요하면 적 총병이 기다리는 화망에 노출될 수도 있고, 장창 밀집대형의 정면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총기병들이다.
때문에 다른 어느 병종보다도 흉갑과 투구만은 튼튼하게 챙겨 입는다는 말은 들었다. 특히 흉갑은 보병 갑주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무게와 튼튼함이라던가.
그렇다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방탄 성능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리와 각도, 그리고 하늘이 내린 운이 적절해야 ‘튕길 수도 있다’ 정도의 방어력이다.
···이는 몇 번이나 적 중기병의 투구와 흉갑을 관통해 말에서 떨궈 본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견이니 확실하다.
정말로 천운이 분명하다.
“전투 중이다. 소란 떨지 마라.”
“하지만 대장님···.”
“귀경들의 말대로 조심하겠다. 승전보를 가지고 카르카냑으로 돌아갈 때 까지는 죽을 수 없으니까.”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로베르 연대장은 검은 갑옷을 툭툭 털더니 멀쩡하게 일어선다. 부하들이 감탄할 정도로 의연한 모습이지만,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까지는 피하지 못한다.
두터운 흉갑이 총탄을 막아주었어도, 그 무지막지한 충격력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분명 갑주 안쪽은 최소한 피멍이 들었을 테고, 어쩌면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분명 몽둥이로 힘껏 두드려 맞은 이상으로는 아플 텐데, 저렇게 티도 안 내는 것은 보통 사람의 인내력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게 자신의 일이다··· 라고 얀은 생각한다.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적진을 살핀다.
하지만 마땅한 저 벼락맞을 적 저격수를 찾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단서와 추측되는 가능성을 정리한다.
적은 최소한, 저 후방에서 말에서 내린 총기병들을 지휘하던 로베르 연대장을 저격할 정도로는 가까이 있다.
당연히 일순간이라도 직선으로 시야가 보였으리라. 총탄은 곡선으로 날아가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만 연대장이 그 위치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노릴 수 없으니까.
다음으로는 희미해진 머릿속을 짜내서, 과거 카르카냑에서 받았던 특별 사수 교육에 대한 기억을 되돌린다.
당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를 비롯한, 고참 연대의 총병 중 실력이 괜찮다 평가받은 이들은 지휘관 추천으로 특별 교육을 받았었다.
카르카냑에서 있었던 이 교육의 교관은 다름 아닌 트랑카벨 영지군 장병들 모두가 기억하는 거한의 명사수, 모리츠 디트마르 폰 뮌타우젠이었다.
‘평범한 경량 화승총이나 표준 화승총으로, 평사수가 50~80미터, 숙련사수가 80~100미터를 쏜다면 명사수는 120미터, 심지어 훈련을 받으면 140미터를 맞출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말은 쉽게 120, 140미터지, 복장의 색깔도 잘 구분이 가지 않는 거리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는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힘들겠지.
게다가 지금은 어느 방향으로 선을 긋든, 100미터라는 거리 안에 치열하게 전투 중인 아군과 적군이 가득한 혼란한 상황이다.
누구일까.
누가 쐈고, 이번에는 누구를 노리고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탄다. 먼저 전몰한 전우 드라소 비타의 소유였던 중화승총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적이 또 옵니다···.”
“아군을 돕는다! 제31 몽세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젠장, 화약 좀 빌려줘!”
정신을 다른 데 쏟고 있어서 그런가, 전투의 소음이 마치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물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얀 자신도 그 전투 중에 있었다. 단순 참가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지금은 팔자에도 없는 혼성 부대 지휘관 자리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오로지 아군을 노리는 적의 저격수를 색출해내는 임무만을 받았다.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찾아낸다고 해도, 어쩌면 자신이 노릴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고, 가까운 적에게 총알이라도 한 방 박는 게 낫지 않을까.
별 생각이 머리속을 다 스치고 지나간다.
자신은 기껏해야 그냥 흔해 빠진 총병 소대장일 뿐이다. 평균적인 사수에 비해 조금 더 잘 쏜다는 자각은 있지만, 압도적으로 특출난 것은 또 아니다.
적 근접 보병들이 밀고 들어와, 총을 재장전할 기회도 없이 도끼를 휘두르던 무렵보다도 더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사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맡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그저 최전선에서 빠져나와 좀 더 편하고 안전한 후방에 있고 싶었을 뿐은 아닐까?
더럭 겁이 난다.
자신이 겁쟁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겁을 먹는다.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지금 현재 얀에게는 그 자괴감이 기름때처럼 달라붙어서는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빠칵!
또 다시 들리는, 전장의 다른 소음과는 비교되는 명백하게 탁한 총성.
그걸 들은 순간, 얀의 머리속은 표백이라도 된 것 처럼 원래대로 돌아간다.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대신해 익숙해진 몸뚱아리가 먼저 행동하듯 말이다.
“어디··· 어디냐···.”
누가 맞았는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방향까지는 알 수 없으나, 탁한 총소리의 ‘느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현재 적의 위치는 직전의 사격 위치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은 안전한 장소에서 사냥감을 노리고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핏발 선 눈으로 깜빡이지도 않으면서 적진을 바라본다.
모든 병사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가까운 무언가에 신경이 팔려 있다.
그렇지 않은 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100미터를 훌쩍 넘는 원거리에서 노리는 적이다.
포병이 아니고서야, 주변의 다른 동료들과는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예 다르겠지.
자신이라면 어떤 일을 할까, 어떤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을까.
“어···.”
드디어 눈에 들어온 위화감.
자신이 목적하는 상대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한 특이점이다. 분명, ‘표적’으로 이어주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얀은 천천히 중화승총을 받침대에 고정하고 적을 노린다.
그의 손에 들린 중화승총에는 한 발의 총탄이 장전되어있다.
원래라면 진작에 가까운 적진을 향해 발사했어야 할 총탄이다. 이런 순식간에 목숨이 오가는 난전 속에서 숙련된 총병의 발사속도는 무시무시하니까.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전장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총탄은 미래로부터 빚진 값진 총탄, 반드시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해야만 하는 납덩이 이상의 무언가이다.
타앙!
마음이 결정된 이상, 행동은 빨랐다.
평소보다 좀 많이 거리가 먼 표적을 가늠쇠 위에 올리고, 조준을 안정시킨 후, 방아쇠를 당긴다.
요란한 총성에 뒤이어 충격이 어깨를 때린다.
이건 명중이다.
가끔 컨디션이 좋을 때 드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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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으윽···.”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붕대로 감싼 양 손을 펼친 채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사격시의 충격으로 손바닥이 쓸려 온통 피와 진물이 흘러나와 붕대가 시커멓게 젖었다. 붕대 안쪽에 어떤 지경일지 상상하기 두려울 정도의 고통이다.
하지만 잠시 참자 척추가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도 차츰 잦아든다.
이단자들을 벌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통증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라는 입장은 물론 아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분명 델 로카라소 가문은 독실한 주신 신앙을 가진 집안이고, 그의 친형은 법황의 특사로 나설 정도로 유력한 추기경의 수석 보좌주교를 할 정도로 고위 성직자이다.
하지만 자신은 신앙심 비슷한 것은 쥐똥만큼도 없는 인간이다. 어쩌면 자신이야말로 이단, 혹은 불신자로 처벌받아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신앙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복수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물론 형의 복수, 자신의 복수 등 블랑독의 이단들에게 복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찾아가서 사생결단을 낼 정도로 원한에 찬 것도 아니다.
아무리 이단들이지만, 전부 쳐죽이겠다며 군대를 꾸려 쳐들어간 것은 법황청 측이 아닌가. 얌전히 목을 내놓고 기다릴 리가 없지 않냐는 것이다.
나브리치오가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는 것은 좀 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자신이 평생 갈고 닦아온 기술이 짓밟혔다는 기묘한 불쾌감 때문일지.
“...나으리, 이게 마지막 장전입니다요. 약속은 꼭···.”
“알았다. 걱정 마라.”
“필요하면 제가 대신이라도 할 테니까, 지금은 손을 꼭 챙기셔야 합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명심하지.”
“어휴, 나으리···.”
그의 가장 충실한 종자이자 파트너인 그롬콜리가 마지막으로 장전된 총을 내민다.
최후의 세 발.
첫 발은 새롭게 나타난 중장병 무리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검은 갑옷을 노렸다.
명중, 허나 그롬콜리의 관측에 의하면 흉갑을 관통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좋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지만, 평소보다 화약을 좀 더 채운 자신의 저격에 명중당한 인간이 멀쩡할 리는 없다.
신체적으로 살아남았더라도, 당장은 평범하게 전장에서 싸우기 힘들 정도의 공포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둘째 발은 격렬하게 라솔 군의 창병 진입을 막아내는 적 창병 사이에 꽂아 넣었다.
역시 명중, 옷깃에 빛나는 장식을 붙인 적 장교는 뒤에 선 동료에게 핏자국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적의 대열이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이게 반복되면 분명 적은 약체화 될 것이다. 처음으로 라솔 군의 앞을 가로막았던 엘랑키아 보병 연대처럼 말이다.
마지막 한 발. 이게 이 전장에서 나브리치오가 존재했음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기왕이면 가치 있는 표적을 노렸으면 했지만···.
예를 들자면 적군의 맹주로 알려진 드 레뮤즈의 백작이라거나.
혹은···.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라고 불리는 적장이 있다는 것은 마르사코르 전투 이후 파악하고 있었다. 별볼일 없는 촌구석 자작 가문의 용병 지휘관이나, 몇 차례나 성전군을 위기에 빠뜨린 지장이라던가.
만약에 자신에게 그 자의 얼굴과 복장을 알려주고 그 100미터, 혹은 120미터 안에 데려다 준다면 반드시 명중시킬 자신이 있다.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까지 거물을 노릴 기회는 이제는 없다. 마지막 한 발, 후회하지 않을 상대를 노리자. 그만큼 거물은 아니더라도, 당장 효과를 발휘하고 라솔 군을 도울 수 있는 상대를···.
“적 창병 내부의 지휘관은 보이지 않나?”
“빈 자리를··· 다른 자가 채웠습니다요, 젊은 장교인데···.”
“그럼 그 자로 하지.”
“예에, 바람은···.”
그롬콜리는 둘둘 만 두꺼운 종이로 적진을 보고 있었다. 망원경 정도는 아니지만, 사격 거리 정도를 바라볼 때는 이 간단한 간이 망원경이 더 유용할 때도 있으니까.
나브리치오는 묵묵히 총을 세우고 기다린다. 총에 닿은 손바닥에서는 타는듯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억지로 눌러 참는다.
어차피 마지막 한 발, 한동안은 팔을 쓸 수 없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다.
“그롬콜리?”
“....”
“표적은 아직인가?”
철퍼덕.
“...그롬콜리? 크롬콜리!”
대답이 없다 싶더니, 적진을 관측하던 그롬콜리의 몸이 바닥에 쓰러진다. 구겨진 망원경 대용의 종이 관이 흙바닥에 나뒹군다.
“무슨··· 크흑!”
통증을 참으며 그롬콜리의 몸을 뒤집는다. 정확히 눈썹의 사이에, 총알 구멍이 뚫려 있다.
“여기서··· 어떻게?”
그롬콜리는 일격에 미간을 관통당해 사망했다.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미간을 관통했다는 것은 정면이라는 이야기이나, 사격시의 화약 연기조차 보지 못할 정도의 먼 거리이다.
누군가가 나브리치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노리고 있었다.
“...복수해주마, 그롬콜리.”
나브리치오는 곧바로 이동한다. 미안하지만 슬픔에 잠길 틈이 없다. 자신이 살아남고 복수를 하고, 애도는 그 다음이다.
그롬콜리가 마지막으로 장전해준 총알이 담긴 총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말 그대로 ‘최후의 한 발’이다. 어차피 자신의 손 상태로는 다시 장전이 가능할지도 알 수 없으니까.
“후방! 후방이다!”
“적 기병 급습! 창병! 창병 앞으로!”
갑자기 후방이 시끄러워진다. 총을 들고 상체를 낮춰 이동하려던 나브리치오의 눈이 커진다.
그가 본 것은 라솔 보병대의 무방비한 후방을 유린하는 엘랑키아의 기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