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23화 (323/556)

35-46.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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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윽!”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장전을 마친 화승총의 마지막 단계를 위해 격철을 당기다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츠렸다.

청동으로 만들어져 불 붙은 화승을 물고있는, 마치 불을 뿜기 직전의 용 주둥아리를 형상화한 멋들어진 격철에 나브리치오의 진득한 피가 묻어난다.

“아이고, 나으리! 이거 어쩝니까?”

옆에서 장전수 및 관측수 역할을 하고 있던 저격 파트너 그롬콜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호들갑을 떤다.

“조용히 해라. 별 일 아니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별 일이 아닙니까? 엄지손가락이 숟가락으로 퍼낸 것 처럼 파였는데요! 아이고, 아이고 우리 나으리 이걸 어째!”

온통 붕대로 감싸인 나브리치오의 팔은 여기저기 진물이 베여 얼룩이 져 있고, 격철 모서리에 찍혀 움푹 파인 엄지손가락에서는 시커먼 피가 흐른다.

“라솔 군의관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으리? 회복중인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물러져 있는데, 과하게 움직이면 다시는 팔을 못 쓸 지도 모른다구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다시는 블랑독의 이단자들과 싸울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고, 다시 없기는요! 저 자식들 기세 보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얌전하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요! 그럴 기회가 왔는데도 손이 망가져서 총도 못 쏜다면 더욱 억울하지 않겠나요?”

“....”

그롬콜리의 진심 어린 조언에, 나브리치오는 말 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정순파 이단 토벌 성전의 마지막 전투, 마르사코르 언덕에서 탈출하다 화상을 입은 까닭에 단순한 움직임에도 격통을 동반하는 엉망진창인 손.

그 와중에도 정확하게 조준하고 사격을 이어가는 나브리치오의 의지는 대단하나, 의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자신의 상전이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제가 장전 뿐 아니라 격철 내리기도 하겠습니다요. 필요하면 조준도 할 테니까, 이번 발 까지만 쏘고 빠집시다, 네?”

“...세 발.”

“세 발이요? 세 발 째에는 나으리 손가락이 분질러 질지도 모릅니다요!”

“부탁이니 도와주기 바라네, 그롬콜리.”

“어휴···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아이고오··· 진짜 못 말리겠네요, 나으리는. 알겠으니 가 봅시다! 딱 세 발이요! 네? 세 발!”

“...고맙다, 그롬콜리.”

사실상 강제이긴 했어도 조력자의 동의를 받은 나브리치오는 장전이 마무리된 화승총을 집어든다.

장거리 사격을 상정해 총열을 더 길게 뽑은 이 특별 제작 무기는 당연히 평범한 총기에 비해 더 무겁다.

붕대 아래 쪽, 불에 데인 상처에 무게가 실리자 말 그대로 ‘타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이미 익숙한 통증이다.

잠시 후 통증이 참을 수 있을 정도로는 가라앉자, 개머리판을 견착하고 뺨을 얹어 조준한다.

전투 진행 상황이나 전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나브리치오지만, 그가 지금 있는 이 전장에 전체 전국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며 각종 편의를 봐 주었던 우노스 연대의 중대장도, 마지막 출전에서 전사했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동안 세운 전공이 있어서 여전히 우노스 연대의 라솔 장교와 병사들은 나브리치오에게 신경을 써 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공세가 실패한 이후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은 느끼고 있다.

그렇게나 힘과 자신감이 넘치던 라솔의 우노스 연대이다. 초장에 엘랑키아 군의 방어선을 부수고 길을 열 때만 해도 이미 승리는 따 놓은 듯이 굴었으니까.

물론 전방 장교와 중견 지휘관들을 저격해 적 연대가 기능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나브리치오의 전공이 없기는 하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적을 밀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던 자신만만한 베테랑들이 지금은 지칠대로 지친 패잔병 몰골이 되었다.

그리고 선봉을 다른 아군에게 교대해주고 패배감에 찌든 눈에 일말의 희망을 담아 전장을 지켜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나브리치오의 실력이 빛을 발해야 할 때다.

이기는 아군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패배하는 아군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 명사수가 해야 할 일이다.

“적진의 바람 방향이나 세기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라솔 군이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모양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요, 아군이 맞으면 큰일이니.”

“고맙다, 그롬콜리.”

적진에서 펄럭이는 깃발이나 옷자락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사수에게 전달하는 것은 관측수의 중요한 일이다.

이번 적진에서는 대체 무슨 일인지 적 중 지휘관급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마치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도적이나 폭도 무리라도 되는 듯 말이다.

초기 엘랑키아 보병대를 공격할 때, 화려한 복장을 하고 뭔가 떠들면서 지휘하던 자들을 노려 쏘면 됐었다. 손쉬운 표적이었고, 효과적인 표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어째 그런 손쉬운 표적이 없었다.

장교급도 일반 병사와 같은 복장을 해서 그런 건지, 혹은 이미 라솔 군의 첫 공격에 지휘관과 장교들이 쓸려 버려서 그런 것인지···.

그래서 찾아낸 표적이 연대 깃발을 든 기수였다. 위치를 찾기는 쉬웠지만 도드라지는 표적은 아니라 조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몇 명인가 기수를 쓰러뜨렸으나, 저 빌어먹을 놈의 깃발은 쓰러지는 꼴을 보지 못했다. 곧바로 근처의 다른 놈이 기수 자리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기수 저격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 정도로 효과가 없는데, 한정된 사격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해서이다.

앞으로 남은 총알은 세 발.

걱정해주는 그롬콜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한 약속이기는 하지만, 기회가 제한된다 생각하니 초조해진다.

나브리치오는 가늠자 너머로 적진을 주의깊게 살핀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벼락치기로 만들어진 방어선이라 해도, 질서가 없는 건 아니다. 저 너머 어딘가에 저 질서를 조직하고 있는 지점이 있으리라.

그리고 분명, 그 지점을 쏘아 맞추면 저 질서는 허물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으리, 저기요, 저기 중대 깃발 우측에 새로 온 갑옷 입은 기사들 보이십니까요?”

“음··· 보인다.”

“저 가운데 까만 갑옷 입은 인간이 있습니다요.”

“흠···.”

그롬콜리의 말대로였다.

가늠자 너머의 좁은 세상만 보는 사수에 비해, 맨 눈으로 적진 전체를 살피는 관측수의 시야가 훨씬 넓은 게 당연하다.

나브리치오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를 천천히 가늠쇠 위에 올렸다.

주변의 다른 기사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계급이 높은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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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파파팍!

“크윽!”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근처 어딘가에 적이 쏜 총탄이 명중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린다.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고 혹시 어딘가에 맞은 건 아닌가 살피게 된다.

아까는 흉갑에서 요란한 금속 때리는 ‘따앙!’ 소리가 들리고 진동까지 느껴져 꼼짝없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걱정과 달리, 흉갑에는 전투 내내 생긴 긁힌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마치 구슬치기라도 하듯, 총탄이 튕겨낸 돌 조각이 흉갑을 때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명중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는 했으나, 정말로 오줌이라도 쌀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늘 하루종일 이러고 싸웠는데도 여전히 무섭다는 말인가. 왠지 억울한 생각마저도 드는 얀이다.

“힘을 내! 힘을 내라 빈더갈렌!”

얼떨결에 사망한 연대 기수에게 깃발을 넘겨받아,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기수가 된 지빌링엔 용병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정면에서는 라솔 군의 새로운 창병 밀집 대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이 빌어먹을 놈들은 무슨 쌈짓돈처럼, 어딘가 숨겨두었던 병력을 계속 꺼내서 보내오고 있었다.

이것만 막으면··· 이것만 막으면··· 이게 마지막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싸워왔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고, 그것도 끝이 아니고, 그것 조차도 마지막은 아니었다.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초반부터 주변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태반이 쓰러졌고, 이제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얀의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트랑카벨을 위해 피를 흘려라아!”

“으아아아! 돌겨억!”

“피 흘리는 흑곰, 앞으로오!”

정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반짝반짝한 라솔의 새 창병 대열을 측면에서 비스듬히 밀고 들어가는 무리가 있다.

다름 아닌 이웃한 지빌링엔 연대에서 보내준 빈더갈렌 중대의 병사들이다. 이 작은 돌격대의 선두는 장창에 비해 짧지만, 난전에서 더 유용한 도끼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얀은 지빌링엔이라는 나라나 거기 사는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빈더갈렌 중대 소속 용병들의 말에 의하면, 자기네는 장창 대열을 부수는 데 전문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룬발트의 황제가 대군을 보내 지빌링엔 지방을 복속시키려 했을 때, 압도적인 숫자의 장창 대군을 보내왔다고 한다.

정면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지빌링엔 민족은, 대신 더 짧지만 익숙한 도끼창을 들고 사각 대형을 비스듬한 측면에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맞서 싸워 결국엔 이겼다고 하고.

지금 그들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식들 뭐야!”

“커헉, 막아라!”

“왕국에 주신의 영광있으라!”

“돌격! 멈추지 마!”

하지만 허를 찔린 라솔 군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지지는 않았다. 대열이 무너지고 적의 접근을 허락한 상황에서도 무기를 바꿔가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애초에 숫적으로 열세인 쪽이 정공법을 사용하는 대군을 상대하는 ‘기책’에 속한다. 초기의 기세를 잃어버리자 지빌링엔 용병들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다.

처음부터 숫자가 적었으니, 기세가 멈추자 역으로 포위당한다. 용맹했던 지빌링엔 용병들이 속절 없이 쓰러져간다.

타앙!

얀이 할 수 있던 일은 그저 장전된 한 발을 사각 대형 안쪽으로 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부디 적 중 누군가가 맞았기를 빌고, 그로 인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진 빈더갈렌 중대의 동료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 덕에 적 밀집 대형의 전진은 분명 느려졌다. 게다가 측방에서 밀렸기에 대열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상태.

분명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주 방어선이 받아야 할 충격력은 감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하고 이대로 둘 수도 없다.

“주 방어선이 교전을 시작하면 바로 두 걸음 전진한다!”

“예엣!”

“아군의 어깨 위로 사격한다! 욕심 부리지 말고, 적의 흉갑을 노려!”

“알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금 지원 왔던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의 하마 총기병들이 장전된 권총을 가지고 최종 방어선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함부로 접근한 적의 선두는 온통 몸에 총알 구멍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수적으로 적이 너무 많다. 그리고 눈 앞의 적이 전부라는 확신조차 들지 않는다.

아마 어딘가에는 더 많고 쌩쌩한 적의 지원이 대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공포마저 든다.

설령 그렇다 한들 뭐 어떤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적이 올 수 있다. 그래도 제10 카르카냑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얀은 장전을 멈추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빠칵!

“어?”

분명히 들었다. 낯설고 탁한 총소리.

그토록 기다리던 그 총 소리이다.

장전하던 화승총을 내버려두고, 얀은 등 뒤로 손을 뻗는다. 그가 원래 사용하던 것과 같은 중화승총이다.

전투 중반에 적에게 사망한, 그의 소대원이자 후배, 그리고 오랜 친구였던 드레소 비타의 시체 옆에 고이 놓여있었던 총이다.

“...잘 쓰고 돌려줄게.”

만약 적에게 저격수가 있다면, 사거리가 길고 탄도가 안정된 중화승총이 필요하니까.

굳은 손으로 새 총의 격철에 불 붙은 화승을 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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