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5. 생뢰르반 전투
2개 중대의 총기병대가 보유한 막강한 화력, 충격 병력으로서의 위력은 도보 상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서로 보유한 화기는 이미 다 써버린지 오래라, 엉켜서 백병전 중이던 양군에 한쪽만 막강한 화력이 추가된 것이나 다름없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적군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무너졌던 트랑카벨 파견군 측의 방어선이 조금씩 질서를 되찾는다.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창병 대열이 다시 나란히 서자 선이 그어진다. 상처투성이에 녹초가 된 병사들의 입에서 다시 희망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재장전! 아군을 근접지원한다!”
“모두 재장전! 혼전에 들어가지 마라!”
혼전에 정신이 없는 아군 보병들에게는 미안한 일일지 모르지만, 이대로 총기를 모두 소모하고 혼전에 들어가 봤자 의미가 없다.
그저 좀 더 잘 무장된 중보병보다는, 여력이 있을 때 권총의 화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분명, 제10 연대의 아군에게도 그 쪽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의 지원군이다!”
“제31 연대가 왔다아!”
대신 장교들이 지원군이 도착했음을 소리를 질러 알린다. 물론 이 외침은 적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양쪽이 서로 위험하다면 그 효과는 극대화 되리라.
로베르는 자신도 재장전을 서두른다. 방금 탄환을 발사해 뜨겁게 달구어진 권총에 스패너를 박아 태엽을 감는다.
치륜식 권총은 이렇게 감겨 고정된 태엽의 힘으로 돌아가는 마찰 바퀴를 이용해 불꽃을 일으키는 식으로 발사하기에, 화승은 필요 없었지만 보다 복잡한 재장전 과정이 필요하다.
“연대장! 연대장 계십니까!”
“자네는 누군가? 아니··· 자네 괜찮은가? 상처가···.”
“제 피는 아닙니다! 제31 몽세나의 연대장님이 계시다면 시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아, 저는 제10 카르카냑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라 합니다!”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는 자신을 찾아온 총병 소대장 얀과 만났다.
“자네··· 정말 괜찮은가?”
스스로도 몇 번이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적 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입을 수 있다 각오하고 있던 로베르가 보기에도 소대장 얀의 몰골은 심각했다.
그의 흉갑과 투구를 포함한 상체에는 누군가 양동이로 뿌리기라도 한 것 처럼 온통 피투성이였다. 왼쪽 소매는 누가 잡아 찢었는지, 한쪽만 맨 살이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에는 도끼를, 왼손에는 화승총을 쥐고 있다.
도끼는 전문적인 전투용이 아닌, 벌목용의 평범한 물건으로 핏덩이와 흑갈색 머리카락이 붙어있어 이 치열한 전장에서 그냥 살아남은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한편 반대편의 화승총은 ‘원래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됐는지, 총열을 받치는 목제 부위가 깊게 파여있어 제대로 사용이 가능한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심하게 맞았는지 뺨이 부어 올라 있었지만··· 그 눈빛은 또렷했으며, 절도있는 경례를 잊지도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연대장님, 적 중에 저격수가 있습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저격수 말인가?”
“옛, 기즈 드 콜롬브 연대장께서도 그 저격수에게 저격당한 것 같습니다!”
불길한 말을 듣자마자, 두 명의 총기병이 슬쩍 나서며 몸으로 그들의 연대장을 반쯤 가린다.
“어떤 징후가 있었나? 귀관의 말을 뒷받침할 이유가 있나?”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소리 입니다!”
“소리?”
“독특한 발사음이 있습니다! 전투의 소음 중에 그 소리가 들리면··· 아군 장교나 기수 등, 중요한 표적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소리···.”
기병대를 이끌기 때문에 권총밖에 사용하지 않는 로베르지만, 뛰어난 사수 중에는 소리에 예민한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현재 콘도티에레의 부관인 첼레스티나라는 여자 교관 역시도 그랬다.
사격 교육 중 ‘화약 연기로 시야가 가려지면 표적에 명중하는 소리로 명중 여부를 알 수 있다’라는 기상천외한 말을 했었던가.
기병 후련생들을 이끌고 참여한 로베르는 물론, 교육 받던 훈련생들도 기겁했었고··· 콘도티에레는 ‘몇몇 특별한 명사수들 아니면 그것까진 어렵다’며 웃으며 말해주긴 했지만···.
무서운 것은 교관 첼레스티나는 정말로 자기가 쏜 권총의 탄착음을 듣고 명중 여부를 가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 수준이 높아서 로베르나 훈련생들이나 아무도 따라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무룩하던 첼레스티나의 ‘이 편리한 걸 왜 못하지···’라는 표정이 기억난다.
어쨌든, 눈 앞의 이 총병 소대장도 비슷한 과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혹은, 격렬한 전투 와중에 정신이 나갔거나 말이다.
“귀관의 건의를 받아들이겠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요점만 설명 부탁하네.”
지금은 이 얀이라는 이름을 가진 총병의 정신이 온전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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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적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거나, 도발을 받아들여 전투를 시작하는 행위를 ‘전단을 연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전투의 끝단을 잡고 펼친다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둘둘 말린 전투를 펼쳐 시작한다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세상 거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말려 있는 것을 펼치는 것 보다 펼쳐져 있는 것을 도로 수습하는 게 훨씬 어렵다.
전투도 당연히 그렇고 말이다.
“콘도티에레! 네그라타 연대가 접수한 포로의 숫자가 1천 명을 넘었다는 전령이에요!”
현재 아군의 좌측, 트랑카벨 파견대가 적을 밀어붙이며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첼레스티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보고한다.
연달아서 올라오는 긍정적인 보고 덕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물론 나도 그렇기야 하지만.
“뭐 1천? 허어, 그 정도면 전투 지속에도 방해를 받겠지만 적은 방어선 유지가 불가능하겠는데?”
“네에, 그런 모양이네요오! 드 누아 연대나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 쪽에도 항복하는 자들이 슬슬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까···.”
“역시 그런가··· 타라트라바 측 지휘관은 어서 전장을 떠나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겠네.”
“네에, 에헤헤헤, 그렇겠네요오?”
타라트라바 군이 흔들리다 못해 투항병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더 이상 전장에 내보내서는 안 되는 상태의 ‘패잔병’들로 억지로 대열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타라트라바 군이 처음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지. 오히려 초반에 수적으로 열세인 트랑카벨 파견군을 공격해올 때는 위기의 순간도 없지 않았고.
나름 트랑카벨 영지군에서 뽑혀온 정예 연대들이 아닌가. 그들이 아무리 총탄을 쏟아내고, 치명적인 각도로 포탄을 쏴도 파도처럼 몰려오던 적들이다.
결국 몇 차례 패배를 경험하고 전의를 상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졌기에 저런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타라트라바 공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내적 결속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국가 사정에 대해 박식한 드 레뮤즈 사령부의 아인멜츠가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은 없겠지.
원래 ‘불안한 동맹’ 상태인 군대는 이기는 동안은 잘 나간다. ‘이기는 동안’은 말이다.
한 번 이기는 기세를 잃으면 이런 꼴이다. 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빠르게 와해되는 콩가루 군대.
뭐 그걸 바로 뒤에서 뒤쫓으며 이득만 보는 나도 참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런데 대체 타라트라바 군은 왜 전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지?”
그렇다. 이 정도까지 몰리고, 억지로 방어선을 구축한 병력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적에게 항복하는 정도라면···.
이건 진작에 포기하고 병력을 전장에서 내보냈어야 한다. 전투 중에도 그렇지만, 전투 후에 연대급 부대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특히 패배하는 상황에서 연대급 편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건 잘못하면 연대가 통째로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게 와해된 부대를 재건하는 건 완전히 새로 편성하는 것 보다도 어려울 수 있고.
“네에, 콘도티에레! 제 생각에는 아마도··· 으음, 라솔 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타라트라바가 라솔에 의리를 지킨다고?”
“네에, 헤헤, 그런 일은 없을까요?”
“으음··· 아냐, 첼레스티나.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게 통상적인 의미의 진정한 의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나름의 ‘국익을 위한 제한된 의리’라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다 떠나서 동맹군을 전장에 내버려두고 먼저 도망치는 것은 사령관은 물론 기사로서도 도저히 변명하지 못할 치욕이니까.
“라솔 군도 같이 도망치면 좋을 텐데! 지금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무척 고생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 걱정이야, 첼레스티나. 아직 별다른 보고는 없지?”
“네에! 마지막으로 왔던 보고는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의 로베르 연대장님이 제10 연대 구원에 나선다는 것이었습니다!”
“슈토르히가 서둘러 줘야 할 텐데.”
현재 타라트라바 군이 붕괴되고 있지만, 여전히 만 명 단위의 대병력이, 계속 밀리고는 있지만 적진에 버티고 있다는 것은 부담이다.
여전히 이들과 대치하고 있는 길고 긴 전선의 병력은 함부로 빼낼 수 없다. 트랑카벨 파견대도, 드 레뮤즈 본군도.
그나마 외곽의 슈토르히 연대를 간신히 빼내서 최고 속도로 급행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타라트라바 군이 완전히 붕괴되었거나, 휘하 병력만 챙긴 채로 서둘러서 전장을 떠났다면 라솔 군의 후방이 완전히 드러나 여유가 생긴 병력에게 포위당했겠지.
전단이란, 풀기는 쉬워도 수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적이 붕괴되는 장면을 보면서, 다 이겼다고 방심해서 밀집 대형을 풀고 덮어놓고 추격하다가 승패가 뒤집혀 버리는 경우는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첼레스티나, 드 레뮤즈 본진으로 돌아가 봐야겠어.”
“네에, 콘도티에레!”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다. 라솔 군은 지금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완전히 힘을 잃은 것도 아니고, 타라트라바 군 처럼 지속적인 전투가 어려울 정도로 한계에 몰린 것도 아니다.
라솔 보병의 강함은 정평이 나 있고, 실제로 전투 초반 서부군이 전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지 않았던가.
이걸 그냥 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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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전하! 퇴각해야 합니다! 전방 병력의 통제가 전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대한 타라트라바 공국이 이렇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살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엔지 경의 부대가 와해되기 직전입니다··· 병사들의 피로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빗발치는 절망적인 보고에도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미 원래의 전선 따위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밀려버린 상황, 보병도 기병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포병도 간신히 살아남기 위해 몸을 사리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도 대답은 한결같다.
“조금만, 아주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시오. 여기서 이대로 전장을 비웠다가는 다른 의미로 타라트라바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르오···.”
“크윽···.”
“절망적인 상황임은 알고 있소. 하지만 여기서 라솔 군을 버리고 떠나면, 향후 우리의 입지가 어떻게 되겠소?”
“하지만 병력을 다 잃어서는···.”
“어려운 부탁인 것은 알고 있소!”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비참한 감정을 짜내듯 말하는 자신들의 주군을 보며, 타라트라바의 중견 지휘관들은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크루사다 공작의 말이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론상 상전이고 동맹군인 라솔 군을 팽개치고 물러서는 것은 안된다.
하지만 대체 라솔 군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승패가 이미 정해진 이 시점에서.
그런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크루사다 공작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전장에서 허무하게 죽어가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이들은 그의 가신이며 신민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라트라바 공국 자체가 약체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솔 군의 퀸토 변경백이 마지막으로 보낸 전갈을 생각하면 이대로 퇴각할 수는 없었다.
‘아군, 마지막 공격 준비 중. 그때까지만 측방 지원을 부탁’
사령관이 동격의 사령관에게 보낸다기에는 너무도 간결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언제까지 버티면 되는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뒤늦게 보낸 전령에 의하면, 퀸토 변경백은 이미 사령부를 비우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게 뭐가 되었건,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타라트라바 군이 끝장나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크루사다 공작은 이 지옥과도 같은 전투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한 명이라도 휘하 병력을 더 살려서 이스키비르 강을 다시 건널 수 있기를 주신에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