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4. 생뢰르반 전투
###
슈토르히 연대가 우회하여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적의 후방을 돌아 어디론가 가버린 후, 적을 몰아붙이는 대열의 가장 좌측, 끄트머리는 다시 네그라타 연대이다.
반격이 시작되면서 계속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네그라타 연대이지만, 그 기세는 도저히 멈출 수 없어 보인다.
최소한 몇 번이나 깨지고 뭉개져 엉망진창이 된 타라트라바의 보병 연대들 가지고는 말이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슈토르히 연대가 팽팽해질 뻔한 전황을 갑자기 확 하고 무너뜨리는 장면도 보았다.
아무리 트랑카벨 영지군 내외에서 강병으로 소문난 슈토르히 연대라 할지라도, 네그라타 연대 또한 나름 자부심을 가진 용병단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가슴 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며 호승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겠다.
“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살려주세요! 으흐흐흑, 제발 살려주세요!”
시작은 어느 어려보이는 타라트라바 장교의 목숨 구걸이었다.
알론소 요페로 페레데즈, 네그라타 연대의 선봉을 이끌고 있던 중대장은 무심코 땀에 젖어 떡진 머리카락으로 덮인 적의 머리통을 후려치려던 검을 내렸다.
오늘 얼마나 무기를 휘둘렀는지 팔이 뻐근하다. 하지만 적의 머리통을 쪼개기 위한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더 휘두를 수 있다. 하루 종일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소년 티를 겨우 벗어난 적 장교의 애걸복걸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이··· 시발!”
“중대장님, 이거 어떡하죠?”
“콱 시발! 무기 버리고 대가리 숙여! 안 숙여? 뒤질래!”
“흐이이익!”
문제는 그 어린 장교 혼자 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타라트라바 보병들도 무기를 버리고 목숨 구걸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 전투 와중에, 단 한 명이 목숨을 구걸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큰 부상을 입거나 절대적 열세에 처하면 공포에 질려 자비를 애걸하기 마련이니까.
정정당당하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결투가 아니라면 그걸 일일이 신경 써 가면서 전투를 할 수 있을리 없다.
“중대장! 중대장, 이거 어떡합니까?”
“움직이지마 시팔! 움직이면 죽여버린다!”
“히익, 흐흐흑, 살려주세요!”
알론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지금 무기를 마저 휘둘러 적 장교의 머리에 칼날을 박아 넣는 것은 쉬운 일이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만, 알론소의 폭이 제법 넓고 중심이 손잡이 쪽에 잡힌, 실전적인 검은 타라트라바 강철로 만든 명품이다.
단단하고 날카롭기로 유명한 타라트라바 산 강철 칼날은 피해자의 국적 따위에는 관심이 없겠지.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그저 힘을 줘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적의 머리뼈를 부수고 피와 뇌수가 튀는 순간, 잠시 멈추었던 전투가 재시작되리라.
아니, 어쩌면 재개되는 건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일지도 모른다.
고민은 상대에 대한 불쌍한 마음 따위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알론소는 네그라타의 중대장, 그것도 선봉대의 지휘를 맡은 중대장이다. 상대가 불쌍하다고 살려주는 머저리 짓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적을 치워버리고 빠르게 진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적의 전의를 빠르게 상실시키고 전열 붕괴를 가속할 수 있을까.
일방적인 학살의 잔혹한 쾌감을 위해서 죽여도 안 되고, 구원자라도 된 듯한 알량한 양심의 만족감을 위해서 살려서도 안된다.
모든 판단을 연대장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자신이 판단해야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알론소는 곧 판단을 내렸다.
“살고 싶은 놈은 투구 벗고 머리에 손 올려라! 모두에게 전해라!”
“살고 싶은 놈은 투구 벗고 머리에 손 올려!”
“손 올리라고 시발! 뒈지고 싶어 이 자식아!”
항복을 원하는 자는 포로를 잡기로 한다.
최대한 한꺼번에 많이, 요란하고 시끌벅적하게.
“항복하면 살려준다 이 자식들아!”
“무기 버리고 머리에 손 얹어!”
전투에서 포로를 잡는 행동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못된 마음을 숨긴 ‘위장 항복’이다. 항복하는 것처럼 꾸며, 상대가 경계를 풀면 그제서야 다시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것.
항복을 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이니 그로 인해 상황이 크게 반전될 일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다 이긴 전투에서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할 수 있으니 꺼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네그라타 연대는 항복 수락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트랑카벨 가문과 계약하여 합류한 이후의 일이었다.
알론소 자신도 콘도티에레의 간부 교육에서 관련 내용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포로를 잡는다면, 최대한 대규모로 한꺼번에 잡는 게 중요합니다. 방금 죽음을 각오했던 가장 용맹한 병사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몸도 마음도 무너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으니까요.’
사선을 몇 번이나 넘었던 용병이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이다.
죽는게 두렵지는 않다··· 정확히는 겁쟁이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또 다른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왕 죽는다면 의미 있게 죽고 싶다. 아무 의미 없이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미 아군이나 적군이나 분명하게 승패가 갈렸다 인지한 시점에서, 적이 악착같이 저항하게 만드느니 어떤 형태로든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게 나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 포박하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보니, ‘혹시 다음 기회가 있다면···’ 이라 생각한다면 결사의 각오가 무뎌지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리고 원래 전쟁이란 사람이 많이 죽는 불길한 일입니다. 사람이 적게 죽고 끝낼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알론소로서는 처음에는 콘도티에레가 마음이 약하거나 자비로운 사람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콘도티에레는 이미 네그라타 연대 전체를 저런 식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서 휘하 병력으로 삼은 전례가 있지 않은가!
패배하고도 살아남아, 몇 번이나 트랑카벨 영지군이 참여한 전투에서 활약했던 알론소 자신이 그 산 증인이나 다름없었다.
브롱보카주 전투, 당시 트랑카벨과 적대하던 네그라타 용병단이 알코자르 남작 휘하에서 블랑독을 침공해서 벌어졌던 전투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당시 현 단장이자, 당시 죽을 각오로 후위를 지키고 있던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 당시 부단장과 함께 싸웠던 알론소는 잘 안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네그라타 연대에게, ‘본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그럼 너희가 죽을 때까지 싸워서 벌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 그 후에 항복해라’라는 제안을 했고.
네그라타의 잔존 병력은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가 됐지만 당시로서는 모골이 송연한 제안이었다.
콘도티에레의 그 태도는 단순히 마음이 여리고 동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어차피 압도적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좀 더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질 수 있다는 철저하고도 철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계산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아프게 경험해봤기 때문에, 알론소는 좀 더 냉정하고 신속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중대장! 항복하겠다는 놈들이 많습니다! 우리 중대보다 배는 더 많은데요?”
전방 장교들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찾아온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통제 제대로 해야 한다. 자칫 다툼이라도 생기면 연대 전체가 휘말릴 수 있으니까!”
“물론입니다, 중대장. 이거 잘 하면 적 연대가 통째로 넘어올 분위깁니다!”
“그래, 예전에 교육 받았지 않나? 후속 부대에 인계하고, 우리는 적의 빈 자리에 새롭게 전선을 형성하고 공세를 늦추지 않도록 한다!”
“옛, 알겠습니다!”
네그라타 연대 지휘부로도 전령을 보내, 포로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린다.
적 숫자가 꽤 많아서 전부 포박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지만 포로 관리부대라도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통제 되지 않는 포로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임무를 맡을지도 모르지만.
이후 네그라타 연대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타라트라바 출신 포로들을 관리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 때의 중대장 알론소는 포로가 많이 잡혀야 200명에서 300명 정도일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리스마라 연대의 기병들은 어디 갔지? 혹시 감시를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군.”
“슈토르히 연대가 앞질러 갈 때, 함께 따라간 게 아닐까요?”
“그렇겠군,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우리가 좌측 끝이다!”
“옙!”
###
타앙! 타탕!
타타타탕! 타다당!
꽈앙!
“허으윽!”
“죽어! 죽으라고!”
“크억!”
“트랑카벨! 으으읏, 트랑카베엘!”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좁은 정면,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접전에서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이 얽혀 싸우고 있었다.
격전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처참한 상황은 각오한 것이었으나, 가까이에서 보니 질릴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아니, 너무 늦게 왔다. 제10 연대의 동료들이 이런 꼴을 당하기 전에 진작 왔어야 했다.
방금 좌익 지휘를 위해 자리를 비운 콘도티에레와,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은 기즈 드 콜롬브 연대장으로부터 거의 동시에 연락을 받았다.
콘도티에레는 ‘제10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위험할 것 같으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연락.
기즈 연대장은 ‘자신이 부상을 입었으니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다’는 연락.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는 빠르게 행동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졌다.
지금 그는 휘하의 총기병들을 이끌고 이 격전장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르다. 연대장인 로베르 드 나뵈프와 그를 따르는 2개 중대의 총기병들은 말에서 내린 상태이다.
제31 연대의 용기병들은 이미 말에서 내려 이 대혼전속에 투입된 지 오래였다. 다음 차례로 말에서 내린 총기병들이 나섰다.
주변에서 더 이상 지원 병력을 차출할 수 없었기에, 기동 전력을 희생해가며 나선 것이다.
이제 로베르가 지휘하는 연대에서 ‘기병’은 3개 중대의 추격기병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연대장이 자리를 비웠다 해도 그들은 알아서 기병이 필요한 전장에서 활약해주리라.
“도보 전투는 제군이 바라던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구원이 필요한 아군이 있으니 가지 않을 수 없다.”
“예엣!”
“모두 준비 되었나?”
“물론입니다!”
“나를 따르라!”
결정을 내린 이상, 망설일 이유도, 여유도 없다. 연대장 로베르는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단호한 걸음으로 혼전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타앙!
첫 표적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트랑카벨 창병의 얼굴을 짓밟고 있던 라솔 군 부사관이었다.
갑자기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싼 총기병들이 나타나자 적병의 눈이 커졌지만, 그가 무기를 겨누기도 전에 로베르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끄윽···.”
생각보다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적의 몸이 무너졌다. 그가 공격하고 있던 트랑카벨 창병은 이미 목숨이 끊어진 모양이다.
역시 너무 늦었다.
로베르 드 나뵈프는 분노로 어금니를 꽉 물면서 장전된 새 권총을 뽑아 들었다.
아넥시 부근에서 화기로 무장한 적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이후 이렇게 분한 것은 처음이다.
적군은 이미 제10 연대의 방어선을 거의 다 잠식해 들어왔으며, 돌파하기 직전이었다. 방금 전투에 참여한 자신이 바로 적을 만났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아직 정말로 늦지는 않았다.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
탕! 타탕!
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탕!
2개 중대의 총기병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1인당 2정이라는 권총의 압도적 화력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전선 상황은 다시 일변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