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19화 (319/556)

35-42.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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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트랑카벨이 보내준 병력이 버티고는 있습니다만···.”

전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키가 작은 노인, 드 레뮤즈 가문의 집사장 드레피니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말하고 있었다.

“언제 적이 여기까지 몰려들지 모릅니다.”

늙은 집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작은 개울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주군의 안녕만을 생각하는 충신의 눈물이다.

“부디 이번에는 후방으로 물러나시어 고귀하신 몸을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드 레뮤즈 가문은···.”

집사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그의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얌전한 회색 말의 등에 올라타서는, 평소의 찌푸린 얼굴로 정면의 전장을 바라볼 뿐.

지금 정면에서는, 생전 처음 전장에 나선 신생 드 레뮤즈 영지군의 보병 연대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어딘가 어설프고 빈약해보이는 드 레뮤즈의 보병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최근 전쟁을 앞두고 훈련을 받기는 했으나, 이들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농부나 상인, 하급 관리와 사무관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드 레뮤즈 영지를 지키기 위해, 주군의 소집령에 응해 묵묵히 모여들어 무리를 이룬 신병들은 서툴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미 트랑카벨 파견대에 두들겨 맞을 대로 맞아 힘이 빠진 타라트라바 군은 완전히 밀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주력을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에 들이 부어 부실해진 라솔 군의 대열 역시 팽팽하긴 하지만,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라몽 백작의 찌푸린 눈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다.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이 소유한 벼락치기 군대의 의외의 선전을 지켜보고 있을 뿐.

“백작님··· 백작님···.”

드레피니 집사장이 다시 거듭하여 주군을 설득하려는 듯,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싫소.”

“배, 백작님?”

“여기서 더 도망치지는 않겠소, 드레피니.”

“하오나 적이 지척에 있습니다··· 이대로 적이 넘어오기라도 한다면···.”

충신의 간곡한 건의에도, 라몽 백작은 천천히 고개만 저을 뿐이다.

“어차피 나는 이 전장에서 하는 일이 없소. 참모장인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자리를 비운 동안 대신 자리를 지키는 허수아비일 뿐이지. 참새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얼간이긴 하지만.”

“백작님···.”

“그리고 내 가신들, 내 백성들이 바로 저기서 피를 흘리고 있소. 저들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게 낫지.”

라몽 백작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진다. 거의 으르렁대듯이 말을 이어간다.

“...내 병사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영주를 잃었다며 싸움을 포기할 정도의 멍청이들이라면 내가 자리를 떠날 때 무너질 것이오. 반대로 내가 자리를 떠나도 자신의 의무를 다할 정도로 강하다면? 머저리 영주의 목숨 따위 아무래도 좋은 것이겠지.”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백작님!”

“싸움은 저들이 하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않소!”

“....”

주군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자, 결국 드레피니는 입을 다문다. 자신의 주군의 성격이나 버릇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보통 드레피니의 주군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경우는, 드레피니나 다른 가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은 아니다.

지금 라몽 백작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병약한 소년 시절부터 라몽 백작을 모셔온 드레피니로서는 짐작가는 것이 없지는 않다. 온갖 병마에 시달리던 어릴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터뜨리고는 했기 때문이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를 힘이 없는 저주받은 몸뚱아리를 가진 자신이.

오랫동안 지속된 대륙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는 무리를 제압할 힘이 없어 무력한 자신이.

언제 죽거나 크게 다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신하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이다.

대혼란의 엘랑키아 남부를 평정하고 왕국에 인정받아 건국 8대영주가 되었던 영웅들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사 비슷한 흉내조차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운 것이다.

라몽 백작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오른편을 바라본다.

명백하게 저곳이 현재 가장 격렬한 전투이다.

드 레뮤즈 보병대의 측면을 지키는 듯하게 배치된 트랑카벨 파견군의 2개 연대.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혈투를 벌이고 있는 방향이다.

드 레뮤즈 영지군에서도 예비대를 모아 보냈고, 후방에 배치된 트랑카벨 가문의 기병대에서도 용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증원하였으나, 여전히 위태롭고 빈약해 보이는 방어선.

그렇지만 그 위태로운 상태로 연거푸 라솔 군의 주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라몽 백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으나, 드레피니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군 대신 피를 흘리고 있는 저 트랑카벨의 보병들에게 부끄럽지 않겠소···.”

“...말씀 받들겠습니다, 백작님.”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짜낸다는 듯한 주군의 마지막 말에, 드레피니는 승복했다. 그리고 품 속의 단검을 만져본다.

어차피 주군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면, 마지막까지 함께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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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카르카냐악! 앞으로오오!”

“으우아아아!”

“밀어! 밀어버려!”

계속되는 혈전에, 좁은 전장은 시체를 밟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고, 얼마나 많은 피가 흩뿌려졌는지 들풀이 붉게 물들 정도이다.

중앙을 지키고 있던 트랑카벨 군의 창벽이 다시 한번 라솔의 공격을 밀어낸다. 격렬한 창벽의 반격에 버티지 못한 라솔 보병들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지겨운 새끼들!”

“또 올 거다, 장전해! 모두 장전!”

“장창 쓸 줄 아는 사람 없나? 여기 사람이 부족하다!”

이미,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창병 밀집 대형의 절반은 제10 연대 소속 병사들이 아니다. 아니, 다시 그 중의 태반은 트랑카벨 군 소속 조차 아니었다.

얀 고티에, 사격 실력을 인정받아 보다 강력한 중화승총을 사용하는 소대를 이끌던 그는 이제 자신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중화승총은 백병전에 숱하게 휘말리는 와중에 진작에 잃어버렸다. 지금 쓰고 있는 총은 전장에서 네 번째로 줏은 버려진 총이다.

십중팔구 원래 주인이었던 트랑카벨 총병은 목숨을 잃었으리라. 쉴 틈 없이 꽂을대로 총구를 쑤셔 재장전하며 그렇게 생각한다.

더 이상 소대장도 아니다. 주변에 그의 중화승총 소대원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쩌다 모이게 되었는지 모를 여기저기서 파견된 혼성 부대 수십 명 정도가 왠지 그의 지휘에 따라 싸우고 있었다.

그 중에는 트랑카벨 영지군 출신도, 드 레뮤즈 출신도, 용병인 지빌링엔 출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말에서 내린 용기병도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허나 자랑스러움도 불만도 없다.

그저 함께 힘을 합치고 있다는 현 상황만이 고마울 뿐이다.

“크헉, 큭! 쿨럭!”

“무, 무슨 상처가! 당신 괜찮소?”

요란한 소리가 나서 옆을 돌아보니 초로의 트랑카벨 장교 하나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마침 옆에서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 있던 지빌링엔 용병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의 어깨를 부축한다.

피를 토하는 장교의 흉갑에는 깨끗하게 뚫린 총알 자국이 두 개나 있었다. 때문에 외부에서 보기에는 큰 상처가 없으나, 납탄에 휘말린 내장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잠깐 이것 좀··· 군기···.”

“어? 어어? 어··· 이봐!”

“부··· 탁···.”

철커덩.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것을 넘겨준 장교는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다.

“이, 이게 무슨···.”

얼떨결에 긴 장대를 넘겨 받은 지빌링엔 용병은 당황한 모습이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단순히 길고 단단한 막대기가 아니다.

그 끝에는, 다름아닌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연대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선명하고 아름답지만 튼튼한 천으로 만들어진 연대의 깃발. 분명 트랑카벨 가문의 장녀이자 영지군의 후원자인 아쥬흐 트랑카벨이 만들어 선사한 물건이다.

연대 깃발이 어쩌다가 부대 중앙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방금 전까지 깃발을 지키던 장교 역시, 전투 초기부터 연대기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두 번째 연대기수도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기수가 죽거나 부상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니 저기 나는 그··· 옆에 지빌링엔 연대에서 도와주러 온 사람인데···.”

방금까지 무수히 많은 적의 피를 받아내며 맹활약하던 용병은 갑자기 연대기를 받아들자 덜컥 겁이 났는지 식은땀을 흘린다.

“어어, 출세했구만!”

“잘 어울리시네요.”

“빈더갈렌의 자랑이다! 자네가 언제 연대 깃발을 들어 보겠어?”

“아니, 이 사람들이?”

하지만 주변 반응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본래 트랑카벨 영지군에서 연대기수는 해당 부대의 최후임 장교, 혹은 최선임 부사관이 하는 역할이다. 그만큼 상징적이고 중요한 역할이다.

명예로운 역할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당연히 연대기는 전투가 가장 격렬한 장소에서 펄럭이게 마련이며, 적에게 노려지기도 쉽기 때문이다.

몇 개나 총알 구멍이 뚫린 채 펄럭이는 연대기를 고정한 깃대에는 몇 명의 흔적일지 모를 핏자국이 가득하다.

연대기는 단순히 알록달록한 천조각이 아니다. 연대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용기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바닥에 쓰러져서는 안 된다.

기수들은 아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다 하기 전에, 주변의 동료를 찾아 깃발을 맡긴다.

깃발을 인계받은 임시 기수의 경우, 모든 임무에서 면제받으며 대신 연대기를 목숨 바쳐 사수하는 새로운 임무가 생기게 된다.

장교나 부사관이 아닌 일개 보병일지라도 그렇다. 연대기가 그의 손에서 펄럭이는 한, 그는 연대기수인 것이다.

다만 지금 연대기를 인계받은 병사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이 아닐 뿐더러, 트랑카벨 정규 연대 소속조차 아니다.

“지빌링엔 연대도 트랑카벨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분들이니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지빌링엔 용병에게, 얀이 말했다. 어차피 뒤섞여 싸우는 혼성부대인 이상 세세한 출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이 방어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여기서 함께 쓰러져 죽을 전우들인 것이다.

“트랑카벨의 총병 소대장이신가? 그럼 부디 귀관이 이 깃발을 가져가 주게! 그게 맞지 않겠나?”

“보시다시피 저희 총병은 두 손을 다 써야 해서 곤란합니다”

“으으으··· 뭐 그렇다면 좋다!”

지빌링엔 용병은 마음을 굳혔는지 들고있던 검의 자루로 자신의 흉갑을 때려 탕 하고 울린다.

“이 빈더갈렌의 단란트! 비록 카르카냑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살아있는 한, 카르카냑의 깃발을 지키겠다 맹세한다!”

“오오, 멋지다 역시 빈더갈렌의 자랑!”

“부탁합니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 작은 혼성부대는 다음 전투를 준비한다. 서로가 도와 무기를 장전하고, 대열을 보강한다.

소대장 얀 고티에는 한 가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치열한 총격전의 와중에,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전장에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화승총의 맑은 소리나, 자신과 같은 중화승총 사수의 다소 탁한 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막과 뼈를 함께 울리는 듯한, 화약을 잔뜩 채운 야포의 포격음도 아니다. 자신도 전장에서 포격음을 수백 발은 들어봣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로 착각할 리는 없었다.

허나 거기서 들리는 소리는 뭔가 특이한, 진흙으로 총구를 틀어 막고 방아쇠를 당긴 듯한 기묘한 소리였다. 파칵, 혹은 빠칵이라고 들리는 듯한 소리.

그것은 어딘가··· 과거에 사격술을 가르쳤던 교관 중 한 명이 쓰던 무기의 사격음을 기억나게 했다.

창설된지 얼마 안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연대장 대리로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했던, 그리고 총병들을 강도 높게 훈련시켰던 슈토르히 출신 거한의 용병.

‘...결국 무한정으로 총열을 크게 만들어 화력을 높이는 건 한계에 부딪치게 되지. 여기서 더 커지면 그게 대포지, 총이겠나?’

모리츠 디트마르 폰 뮌타우젠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남들과 같은 구경의 총으로 좀 더 멀리까지 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지. 그래서 몇가지 꼼수를 부리게 된다.’

그런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다. 자신이 그런 독특하고 위험한, 자폭의 위험성을 지닌 사격술을 쓸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막 화승총 사격술에 재미를 붙이던 시기의 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잘 들어보면 발사시의 소리로 구분할 수 있어. 자네들, 내 총 소리는 들어봤지? 빠캉! 하고 터지는 것 말이야.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탁한 소리라고나 할까.’

···설마 적군 중에 이 기술을 써서 사격하는 자가 있다는 것인지?

얀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런 자가 있다면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리츠는 그것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었으니까.

얀의 상념을 또다른 적습을 알리는 외침이 부순다. 짧은 휴식은 끝나고 또다시 전투가 시작된다.

무의식적으로 탄약포의 개수를 센다. 모두 여덟 개. 쓰러진 적병에게서 회수해서 숫자를 다시 채웠다.

원래 지급받았던 중화승총이 아닌, 평범한 화승총을 써서 다행이다. 중화승총을 썼다면 노획한 탄약포를 쓰지 못할 뻔 했다. 구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온다!”

“아 지겹네 개자식들. 좀 쉬면서 하지?”

“그래도 이제 좀 할만해진 것 같은데?”

···마지막 말에는 얀 역시 동감한다. 적은 확실히 이전처럼 무섭지는 않다.

아마도 거듭해서 공격해오는 적들도 지쳤기 때문이겠지.

혹은 아군이 강해졌던가.

“전군 장전! 첫 사격 낭비하지 마!”

“예엣!”

겹겹이 쌓인 시체 위에서, 얀과 그의 기묘한 혼성 부대는 다시 한번 투지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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