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1. 생뢰르반 전투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잠깐 눈을 감았다. 깊은 생각이라도 하겠다는 듯.
하지만 겨우 3초가 지나기 전에 눈을 뜬다.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에게 이는 사치이기 때문일지.
지금 그의 군대 전체는 격렬한 전투에 휘말려 있었으며, 전투 초반이면 몰라도 현재는 결코 유리한 상황이라 하기 어려웠다.
동맹군인 타라트라바 군은 대열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잔존 병력 또한 전투를 포기하기 직전인 상황이다.
이미 격퇴하여 붕괴시켰다 생각했던 적의 측익은 아직 살아서 아군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금방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던 정면의 적은 두려울 정도로 잘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초가 됐든 3초가 됐든 깊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령관에게는 아주 큰 사치이다.
그가 고민하는 1초가, 결코 적지 않은 최전선의 병사들에게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전장을 지켜보는 사령관이란 무척 고독한 존재이다.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하며···.
항상 옳은 판단만을 내리기를 강요 받는다.
어떤 도움을 받고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로 전장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전장에서의 정보 전달 속도는 평소보다 훨씬 느린데다가 상황 변화의 속도를 절대로 따라갈 수 없으니까.
게다가 보고가 들어오는 순서가 실제로 일이 벌어진 순서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때로는 보고가 들어온 시점에 이미 그 정보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이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전령을 보냈던 부대는 이미 소멸했을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 이를 바탕으로 결정을 했다고 해도, 사령관이 내린 명령이 사령부를 벗어나 전방 부대에 도달하는데 또 무시하지 못할 시간이 흘러 버린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약간의 미래를 내다 보도록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도 퀸토 변경백은 몽상가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과는 다른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는 가슴 속에 작은 희망이 움트는 것을 느끼며 사령관의 말을 기다렸다.
“참모장, 귀관의 의견은 분명 이 전투에서 아군이 패배하더라도, 핵심 전력만은 살려서 퇴각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사령관 각하.”
“내 생각은 반대일세. 설령 우리가 여기서 심각한 피해를 입더라도, 엘랑키아에는 그만한 피해를 피해를 입혀 두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 그렇습니까···.”
뜻 밖의 말에, 참모장 아드리아니는 조금 당황했다.
용맹과 의기, 울분으로 받쳐서 전원 옥쇄를 주장하는 치기 어린 모습은 아니다. 누가 보아도 사령관은 이성적인 모습이리라.
그런데 나오는 말의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것도 퀸토 변경백만의 특별한 시야로 본 전장의 상황에서 나온 결론이라는 것인가? 아드리아니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이스키비르 강을 건널 때, 건너편에 이만한 규모의 전력이 존재할 거라 예상한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습니다.”
“그렇네. 엘랑키아 군이, 드 레뮤즈 백작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단시간에 우리 예상보다 훨씬 큰 전력을 모았지. 그리고··· 생각보다 강하기도 하고. 거기, 신규 예비대는 보다 남쪽에 배치해서 이 각도로 이동하도록 한다.”
“옛, 알겠습니다!”
퀸토 변경백은 참모장 아드리아니에게 설명하면서도 전투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중대급 지원군의 투입 방향을 지시하면서, 다시 아드리아니와의 대화로 돌아온다.
“여기서 퇴각한다고 우리가 무사히 이스키비르를 건너 라솔 영토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있나?”
“힘든 싸움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 돌아간다고 해도, 여기 집결한 엘랑키아 전력이 역으로 침공해온다면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전력을 빼내서 어떻게든 새로운 전선을 여는 방향이 나을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참모장의 의견에 퀸토 변경백은 다소 슬픈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퇴각하면 타라트라바 군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강 건너에 머물며 함께 싸워 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지 않겠나.”
“아···.”
그제야 사령관의 생각이 이해가 간다.
아직 완전히 포위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면 곧 포위당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그래도 전선을 유지하고 어떻게든 싸울 수 있는 건 타라트라바 군이 측면에서 아직은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형편없이 깨지고 퇴각하고, 전력은 절반으로 줄고, 대열도 쪼그라들어 간신히 버티고는 있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 타라트라바 군이 지탱하고 있는 적군의 압력이 모조리 라솔 군에 쏟아졌다면, 정말 잠시도 버티지 못햇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하류 주둔군의 송곳니는 적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이고. 저 반토막나다 못해 얇아질 대로 얇아진 방어선 너머에는 적의 사령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있는 모양이니까 말일세.”
“예, 사령관 각하.”
타타탕! 타당! 타아앙!
탕, 탕, 탕! 타타타탕!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화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전쟁이란, 반상 위에서 하는 장기 놀이가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적의 ‘왕’을 잡는다고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으면서도 전투는 승리로 이끈 명장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전장에서 적의 ‘왕’을 잡는다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전술적인 행위이다. 죽여도 좋고, 포로로 잡는다면 그 이상의 큰 전공은 없을 정도니까.
설령 적장이 도망쳐 전장을 이탈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전술적 이점이다.
적의 머리를 부대로부터 끊어내 지휘를 마비시키는 것은 물론,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령관이 쓰러졌다는 것은 더 이상 후방이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모두에게 심어주게 된다.
게다가,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군의 상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이 된다.
이 상황에서 평소와 똑같이 힘을 낼 수 있는 병사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마치 장기처럼 결정적으로 불리하던 전투를 그것 한 방에 역전하는 경우도 없지 않기도 하고.
참모장 아드리아니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알고 있던 정보를 복기한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분명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엘랑키아 남부의 영주들 중, 드 레뮤즈 가문과 금전 관계가 없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사전에 아드리아니가 조사한 바로는 라몽 백작은 ‘관대한 채권자’였다.
큰 돈을 빌려줄 만큼 재력은 있으면서도 상대가 갚을 의지가 있다면 굳이 채무를 이유로 압박하지는 않는다던가.
아마도 이번에 단기간에 라솔 군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백작의 그런 평판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전장을 지휘하는 것이 라몽 백작 자신일지도 모른다. 비록 아무리 조사해도 과거에 군인이나 전략가로서 재능을 드러낸 기록은 없었지만 말이다.
훌륭한 행정가와 조직가가 훌륭한 군인이기도 했던 경우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라몽 백작의 목을 치거나, 하다못해 전장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불리한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사령관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령관의 말이 분명히 맞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사령관 각하. 몹시 찬탄했습니다.”
“하핫,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군.”
“아닙니다. 저에게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지휘나 조직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아닐세 참모장.”
“...옛?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득당해서 열성을 보이는 아드리아니에게, 퀸토 변경백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참모장은 다른 임무를 맡아주게. 방금 말해준대로, 어떻게든 아군을 살려서 전장을 빠져나갈 대책을 말일세.”
“설마 퇴각 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으음. 우리 하류 주둔군의 송곳니가 적장의 목에 닿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뭐, 그 과정에서 적의 핵심 전력을 충분히 깎아낸다면 의미 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갑자기 퀸토 변경백이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만약 이 마지막 공세가 적의 목덜미에 닿지 못한다면, 그때는 신속히 퇴각해야하네. 라솔의 가장 용감한 청년들을 여기서 개죽음 시킬 수는 없으니까. 아, 타라트라바의 청년들도.”
“네···.”
“그러니 참모장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주게. 시간도 병력도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사령관 각하!”
“하하핫,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 그거 참모장이 잘 하는 일이 아닌가. 연대장들은 싫어했지만 그거야 말로 참모장이 할 일이지.”
참모장 아드리아니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퀸토 변경백은 이성을 잃거나 시야가 좁아진 것이 아니었다.
마냥 눈 앞의 일이 아닌, 뜬 구름만 바라보는 몽상가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철저할 정도로 유능하고 현실적인, 라솔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군사령관이었을 뿐이다.
이성을 잃고 시야가 좁아지고, 선입견에 휘둘려 현실을 보지 못한 것은 아드리아니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명령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마지막 공격에 무운을!”
“하류 주둔군을 잘 부탁하네!”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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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라!”
퍼엉, 콰앙!
“끄아아악!”
“커헉!”
보병대의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2문의 경야포가 화력을 뿜어낸다.
말이나 소 등 짐승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방렬하거나 언덕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야포지만, 그 포신이 뿜어내는 포탄의 위력은 화승총 등 개인화기의 탄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목측이 불가능한 속도로 허공을 가른 철제 포탄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타라트라바 군 보병대에 파고들어 그 야만적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인간의 육체, 뼈, 강철, 나무.
뭐가 됐든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뚫고 지나간다.
주먹보다 작은 쇠구슬은 몇 명이나 되는 인간의 육체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고서야 그 파멸적인 움직임을 멈춘다.
“2열 발사!”
타타타타타타타타탕!
타당, 타타탕!
“큭, 끄억!”
“대열을 유지해! 무너지면··· 윽!”
“크아아악!”
“사, 살려줘어!”
포탄이 비스듬히 뚫고 지나가 엉망진창이 된 타라트라바 보병대열을 간발의 차이로 일제사격이 훑어버린다.
운 없는 자들이 무력하게 총에 맞아 쓰러지고, 보다 운 좋은 자들이 슬금 슬금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한다.
겁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하고 막아야 할 장교들은 선두에서 이미 쓰러졌거나, 병사들과 똑같이 공포에 질린 상태이다.
패닉 직전의 상태.
이미 전투 부대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오늘 거듭 거듭 겪었던 패배와 이어지는 패주가 이들의 마음을 꺾어 놓았던 것이다.
결국 슬슬 허물어져가던 대열이 천천히 퇴각을 시작한다. 분명 지휘관이 대열을 붕괴하도록 방치하는 대신 수세에 몰리더라도 질서를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리라.
그 뒤를 추격하듯 천천히 다가서는 보병 부대의 머리 위에서는 하얀 황새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루트비히 중대장! 포신이 한계입니다. 충분히 식히기 전에 사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지금까지 무리를 해왔으니··· 어쩔 수 없지.”
슈토르히의 포수들은 베테랑들이다. 그들이 한계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통상적인 한계는 진작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근접 화력 지원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포병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워 자폭하게 만드는 것은 부대의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거듭거듭 말했던 콘도티에레가 생각났다.
슈토르히 연대를 지휘하고 있던 연대장 대리이자 선임 중대장인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는 슬슬 부하들이 피로를 느껴가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과 같은 고속 행군과 돌파는 이번까지가 한계일까. 아마 콘도티에레도 비슷한 상황은 인지하고 있겠지.
슈토르히 연대는 마지막으로 콘도티에레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타라트라바의 잔존병력을 측면에서 깎아내듯 움직이며 행군하고 있었다.
‘라솔 군의 주력을 후방에서 타격하라’는 명령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