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0.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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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는 서둘러서 자신의 사령관을 찾아갔다.
전장의 좌측 절반을 통제하고 있던 사령부를 떠나, 최전방에서 네 검천사의 공격을 직접 지휘하고 있는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을 말이다.
퍼엉! 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타당, 타앙!
전장에 가까워지며 요란한 전장소음이 들려온다. 저 소리 하나 하나당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있을까.
다행히 목표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적은 겨우 1개 연대다! 그리고 난도질당해서 병력도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 어째서 무너지지 않는가?”
“적의 지원 병력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대열이 유지되는 이유일 것으로···.”
“어디서 오는 병력이란 말인가!”
“그, 그것은 저도 잘···.”
“병력이 다소 늘어난다 쳐도 결국은 1개 연대 아닌가!”
사령관 퀸토 변경백의 고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참모장 아드리아니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가 아는 주군이자 사령관, 퀸토 변경백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전통적인 라솔의 신분체계를 포함한 틀에 묶이지 않으며 일개 보병의 눈높이에서 많은 걸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부하들에게도 많은 감내, 높은 강도의 훈련과 많은 희생을 감수한 전략 등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검천사 연대의 수준이 상승했다.
물론 강도 높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반복하고, 병사는 병사대로 장교는 장교대로 많은 역량을 요구받으면 부담이 커진다.
그렇지만 부대가 강해진다는 것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원래 라솔 왕국군 전체에서도 강병으로 평가 받았던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퀸토 변경백이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이는 단순히 변경백이 자신의 가산을 털어 주둔군 장병들에 대한 대우를 좋게 해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4개의 검천사 연대를 이끄는 퀸토 변경백의 지휘와 관리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참모장으로서, 아드리아니가 생각하는 사령관의 가장 곤란한 점은 가끔 자기 머리속에서 결론을 내리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령관이 내리는 어떤 명령이든 망설임 없이 수행할 것이다. 성공시의 영광도 실패시의 절망도 함께 할 각오는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령관이 내린 명령을 실행하는 전방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명령의 ‘맥락’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설계자와 실무자 사이에서 명확한 ‘의도’가 공유되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전장에서는 한 번 발령된 명령을 되묻는 행위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하다.
똑같은 이동 명령이라도 이것이 돌격으로 이어질 공세적 이동인지, 혹은 퇴각으로 이어질 수세적 이동인지에 따라 부대가 취하는 행동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퀸토 변경백은 종종 이 맥락을 빼먹고 명령을 내리곤 한다. 이는 명령을 해석해 전방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참모장에게도 가끔 곤혹스러움을 안긴다.
그럴 때, 아드리아니는 자신의 경애하는 사령관이 이미 머리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확신한다.
배경이 되는 전장, 주어진 병력, 주고받은 전술 등 모든 요소를 머리속에서 돌려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퀸토 사령관이 그렇게 맥락 없는 단편적 명령만을 내리는 시점의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무적이었다.
역시, 아드리아니가 모시는 상관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몽상가였다.
그가 머리속에서 보는 광경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젠가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거기서 멈출 뿐 아니라, 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했다.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본질적으로 국경수비군이다.
평균적인 라솔 보병에 비해 좋은 배급을 받고, 무기나 갑주도 괜찮은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국왕 근위대나 왕실 친위대와 같은 ‘특별함’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라솔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엘랑키아와의 국경을 지키는 최정예부대, 가장 강력한 1만 명의 강병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정예라고는 해도 평균적인 라솔 왕국군 소속의 다른 보병 연대와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 수준이었던 하류 주둔군은, 퀸토 변경백이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크게 변하게 된다.
우선, 유명무실하게 서류상으로만 남아있던 4개 연대를 부르는 명칭, 즉 우노스, 도레, 테라얀, 코루냐라는 네 검천사의 이름을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기존에 평범하게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으로 묶여 편의상으로만 나뉘어 있던 4개 연대의 편제를 고정했고 각각에게 특별함을 주었다.
‘하류 주둔군 4개 연대 중 하나’가 라솔 북방을 수호하는 최강의 검천사 우노스가 된 것이다.
단순히 간판을 바꾼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배급의 질을 높이고, 망가지거나 잃어버린 장비를 수리하고 보충하는 루트가 다양해졌으며, 장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에도 힘썼으니까.
하지만 역시 하류 주둔군의 당사자들이나 주변인들에게 가장 강하게 느껴진 것은 이름의 변경이었다.
그 날 이후, 비로소 라솔과 엘랑키아 국경에서는 최강의 네 검천사가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아마 그 변화가 없었다면,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그냥 평범한 국경 수비대에서 끝났을 것이다.
평소에 국경을 관리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동원되어 이동하고, 적과 교전하며 ‘전장의 주인공’인 중앙의 정예군이 도착해 전쟁을 끝낼 무대를 만들어 주는 전장의 조역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그렇지 않다. 병사들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라솔 전체에서 유일무이하게, 천사의 이름을 가진 연대이다.
그것도 주신의 신성을 가진 ‘검의 대리인’을 보좌하며 자신들도 검을 다루는 천사 네 명의 이름을.
그 후로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은, 단순히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가 아니다. 자신의 무기와 기량을 갈고 닦으며 언젠가 엘랑키아 왕국 영토로 진격할 정예 선봉군이 되었다.
병사 개개인이 그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고, 또한 간절하게 바란다.
어느새 그들은 자신들의 경애하는 사령관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으니까.
그것이 사령관이자 훈육자로서,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지원 포병은 아직인가! 근거리 포대의 숫자를 늘려라! 적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방어선을 유지조차 못할 정도로 완전히 밀어 버리는 거다!”
“저희 포대는 대부분 진격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서 후방에 낙오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전방에 나섰던 포대는 적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은 상황입니다···.”
“이런! 이런 일이! 으으으··· 엘랑키아의 변경 놈들을 상대로 이런 고전이라니!”
퀸토 변경백이 개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처음 보는 모습이다. 다소 당황한 참모장 아드리아니는 자신의 사령관에게 가기 위해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사령관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몽상가이다.
설명이 부족하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과도한 부담은 안길지언정, 언제나 전장 전체를 관조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인간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금처럼 최전방에서 연대급 부대에 직접 명령을 내리며,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몽상가가 아니다.
애초에 네 검천사의 연대장들은 가리고 가려 뽑은 유능한 인재들이다. 사령관이 나서 직접 명령하는 게 그만큼 득이 된다고도 볼 수 없었다.
굳은 마음을 먹고 다가서는 아드리아니에게 다시 퀸토 변경백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병! 아군 기병은 어디있나? 할콘 남작은?”
“그게··· 전령은 보냈지만 아직 언덕 너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제길! 배신할 생각인가!”
아드리아니는 처음부터 이 남작을 자칭하는 수상한 기마 용병대장을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령관 각하! 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경례를 마친 아드리아니가 보고를 시작한다.
“오오, 아드리아니 왔군! 여기가 문제네, 저 엘랑키아 보병대, 저 망할 놈들이 무너지지 않아 모두가 고생하고 있다네.”
“사령관 각하, 현재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물론, 나도 이 눈으로 보고 있네. 하지만 이 길목만 돌파한다면, 우리 라솔 군은 적의 후방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저 뒤편으로 드 레뮤즈 백작의 본진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네!”
“사령관 각하, 지금은···.”
“도와주게, 아드리아니! 여기서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 증오스러운 엘랑키아 군을 깨버릴 수 있네! 적의 정면은 너무 좁고, 아군의 화력은 부족해. 우리 검천사들의 의지만으로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야!”
아드리아니는 경애해 마지 않는 사령관의 핏발 선 눈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명백히 광인의 눈이다. 도무지 그가 존경하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꿈꾸는 소년과도 같은 눈이 아니었다.
평범한 남자가 광증을 부리면 그냥 놔두면 된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도, 물건을 부수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퀸토 변경백은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전투를 거치면서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1만에 가까울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과 그 부속 병력들을 죽이고 살리는 책임을 지고 있는 남자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쩌면 하류 주둔군 소속이 아닌 라솔의 파견군들, 더 나아가 동맹국인 타라트라바의 잔존 병력의 목숨까지도 걸려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퀸토 변경백 각하, 지금 테라얀 연대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알고있네, 이쪽도 보고를 받았으니. 허나 그 테라얀이니까, 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다소 흥분한 아드리아니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퀸토 변경백은 전혀 반응이 없다. 그의 눈은 애초에 아드리아니를 보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의 충혈된 눈은, 몇 번째일지 모를 돌격을 준비하는 우노스 연대와 코루냐 연대의 보병들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설득해야했다. 사령관이 이 손바닥만한 좁은 방어선에서 연대급의 전투에나 신경쓰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퀸토 변경백 각하, 타라트라바 군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엘랑키아의 추격에 병력의 태반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알고 있네. 그래도 잔존 병력이 아군의 측후방을 보호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제 검천사 연대의 측후방을 지켜주는 ‘아군’이 없습니다! 타라트라바 군은 붕괴 직전이고, 지금 무너져가는 테라얀 연대가 아군의 마지막 방어선일지 모릅니다.”
“으음···.”
참모장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커지자, 퀸토 변경백은 그제서야 눈썹을 찌푸리며 아드리아니를 바라본다.
마치 설명을 해보라는 듯.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참모장으로서,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한다 의견을 드립니다.”
“물러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인가?”
“예, 하류 주둔군 검천사 연대들을 어떻게든 살려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록 여기서 패배하더라도 전멸해서는 안됩니다.”
“...이스키비르 강변으로 돌아가 방어해야 한다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비록 침공에 실패했더라도, 라솔의 영토까지 엘랑키아 군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게 하류 주둔군의 역할이지 않습니까?”
“음···.”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것처럼 침착해진 퀸토 변경백은, 벗어놓은 장갑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드리아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지금 혹시 참모장은 내가 이성을 잃어서 이런다 생각하나?”
“그렇지 않··· 그··· 음··· 죄송합니다. 다소 평소와 다르시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거야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니까.”
퀸토 변경백은 그럴 수 있다는 듯, 특별히 나무라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나 역시,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사령관으로서, 리오고 국왕 폐하께 엘랑키아 정벌을 명령받은 신하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세.”
꽤 오랫동안 함께해온 상대이건만, 참모장 아드리아니는 눈 앞의 사령관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