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16화 (316/556)

35-39.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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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성공했다!

드 레뮤즈 백작가의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문득 출전하기 전,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명령으로 드 레뮤즈 영지군과 서부군을 포함해 전군의 참모장이 된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면담을 요청했던 것은 소베트르 본인이었다. 항상 피하기만 하다가 아마도 처음으로 자의에 따라 콘도티에레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면담의 초반은 침묵이었다. 소베트르는 자신의 아들 뻘인 청년 참모장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실패자인 자신은 도무지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기병 지휘는 다른 이에게 맡기라고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다른아닌 콘도티에레였다.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말투로 기병 지휘의 일반론을 말했었다.

왠지, 그는 오늘 여기서 일어날 일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한번 사령부를 떠난 기병대는 본진과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됩니다. 사령부의 훈령을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뭐라 대답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보나마나 힘 다 빠진 목소리로 자신이 할 수 있겠냐 따위의 시시한 대답이었겠지.

‘아니, 그래서입니다. 어느 순간, 소베트르 경은 제가 보지 못하는 적의 약점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모른다는 것은, 분명 적장 또한 보지 못한 약점일 가능성이 높지요.’

소름이 돋았다.

정말 콘도티에레와의 그 짧은 대화는 어느 상황에나 적용할 수 있는 단순한 일반론이었을까?

하지만 그 짧은 대화는 소베트르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 그리고 친자식만큼이나 사랑하는 휘하 기병대를 걸고 행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 텅 빈 적의 후방을 봤을 때는 망설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맞나?

사실 함정이 아닐까?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좀 더 자신만만했던 젊은 시절의 실패 경험이 마치 쇠사슬처럼 온 몸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콘도티에레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제가 모른다는 것은, 분명 적장 또한 보지 못한 약점일 가능성이 높지요’

소베트르는 어렵게 힘을 짜내, 휘하 병력 전체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했다.

자신이 무능하고 실패만 해온 인간이기는 하지만, 이 빛나는 드 레뮤즈의 청년들도 실패자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성공했다.

“돌격! 멈추지 마라!”

“막아! 막아! 중대 단위 연락이 끊기지 않게 막아라”

“막히면 측면을 노린다! 드 레뮤즈에 승리르을!”

“엘랑키아 돼지들을 막아라! 우리는 이스키비르의 검천사다!”

“몰아내! 몰아내 버려!”

이제 소베트르가 몰고 온 드 레뮤즈의 기병 2천 명과, 정확히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호각으로 보이는 라솔의 보병들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양군의 경계선에서 서로 마구 무기를 휘두르며 서로를 쓰러뜨리고, 밀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구분을 할 수 있는 독특한 억양의 명령소리와 화난 외침, 비명이 마구 뒤섞인다.

아까 서부군의 기병대를 구했을 때 적에게 쫓겨 퇴각했던 치욕은 기억하지만, 그만큼 무력감을 느껴 분노에 치를 떨고 있던 드 레뮤즈의 청년 기사들이다.

그만큼 과감하게,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적진 깊숙하게 꽂혀 들어간 덕에 서로의 대열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졌으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에 불필요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때린 쪽과 맞은 쪽이 정해진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맞은 쪽이 불리하다.

때린 쪽은 기세라도 있지, 맞은 쪽은 계획도 준비도 없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까.

그리고 마구 뒤섞였던 양측은 마치 마구 휘저은 후에도 알아서 층이 분리되는 물과 기름처럼, 서서히 자신들의 확고한 영역이 생기고 여기저기 고정된 전선이 발생한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상황은 마찬가지이지만, 중앙을 돌파하듯 깊게 박힌 드 레뮤즈 기병대는 최소한 ‘하나로 뭉쳐는 있다’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서 후방에 기병 충격을 허용해버린 라솔의 테라얀 연대는 병사 개개인의 높은 전투력과 숙련도 덕에 버티고는 있으나 지휘 체계가 산산조각난 상태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대와 소대가 마구 뒤섞여 버리고, 창병과 총병이 서로의 대열에서 밀려난 엉망진창의 상황이다.

워낙 함께 전투에서 싸웠던 적이 많고, 훈련도 경험도 무장도 부족하지 않은 라솔의 정예군이라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혼란은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불러온다.

창병이 이룬 철저한 사각 대형이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한쪽 모서리가 무너지면, 평소보다 25퍼센트의 사상자가 더 발생한다고 한다.

촘촘하게 대열을 이룬 창벽은 말하자면 수백년에 걸쳐 끝없이 전쟁을 하면서 찾아낸 ‘가장 효율적인 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가 무너졌을 때, 여전히 해당 전투 부대가 본래와 같은 ‘효율’을 내려면 대가로 그만큼 병사의 목숨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강요된 비효율이, 엉망진창이 된 진형에서 드 레뮤즈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난전을 벌이는 테라얀 연대 보병들의 피를 받아내는 결과가 되었다.

비효율이야 라솔 보병을 상대하는 드 레뮤즈의 보병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허나 부대 단위로 유기적인 행동을 못하고, 장교와 병사 개인 개인이 흩어져 활동할 때.

개인의 실력과 운, 그리고 바로 근처에 우연히 함께 있었던 동료들과의 협력에만 의지해서 싸워야 할 때는 당연히 기병이 유리하다.

결국 창병이든 총병이든, 보병은 단독으로 잘 무장된 기병을 이기기 어렵다. 특히나 온 몸을 철제 갑주로 감싸고 무기를 휘두르는 숙련된 기병이라면 버거운 게 당연하다.

타탕! 탕! 타다당!

타타타탕, 퉁! 타앙!

“무리하지 마라! 적의 영역을 빼앗고 대열을 짓뭉개 버려!”

“엘랑키아 돼지 새끼들을 몰아내!”

“쏴! 장전되는 대로 쏴버리라고!”

전투가 극심한 혼전으로 치닫는다.

기세 좋게 달려들어, 라솔의 테라얀 연대를 절반 쯤 관통한 드 레뮤즈 기병대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돌격이 멈추었다.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오는 말에 치이고, 말 발굽에 짓밟혀 가면서도 집요하게 말의 몸통을 찌르고 총을 쏴댄 테라얀 연대의 처절한 저항이 효과를 드러냈다.

이미 ‘포기된’ 영역의 생존자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은 전장에서 가장 값진 화폐인 ‘시간’이 되어 테라얀 본대에 전해졌다.

그리고 테라얀 본대는 완전히 어그러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병력을 연결, 전투 초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지휘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대의 베테랑들이 원래 맡은 임무 이외에도 훌륭하게 소화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이스키비르의 검천사, 테라얀 연대는 느슨하지만 확실한 그물이 되어 드 레뮤즈의 기병대를 옭아메려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운 균열은 전혀 반대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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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져라 두드리는 북소리가 지빌링엔 연대의 후방에 울려퍼진다.

집합을, 신규 대열 형성을 알리는 반복되는 북소리.

“정렬해 정렬! 어라 너 뭐냐, 아까 옆구리에 총알 박히지 않았냐?”

“그거 그냥 겨드랑이 좀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겨드랑이? 아니 시팔 지금 여기 축축한건 오줌 싼 거냐? 오줌을 빨간 물감으로 싸? 개소리 말고 나와!”

“어차피 지금 인원도 없잖습니까?”

“사람 없어도 옆구리에 빵꾸난 놈을 데리고 갈 정도로 없지는 않아!”

“아까 의사 양반이 빵꾸 메웠으니까 가겠다고요!”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그 위로 흉갑을 입은 병사가 자기는 죽어도 전장에 나가야겠다며 중대장과 옥신각신하고 있다.

“이래서 총이나 들겠어?”

“예, 잘만 듭니다요. 이거 제가 장전한 겁니다!”

지빌링엔 연대 휘하, 휘어브루넨 중대를 지휘하는 마로크 보르칼테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고집부리는 병사를 바라본다.

지금이야 피가 멎었다지만 아까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창백해진 지빌링엔 병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딴청 피우는 척을 한다.

“...그렇다면 좋다. 앞에서 설치지 말고 뒤에서 지원 사격만 해라. 지금부터 힘든 전투가 될 테니까.”

“암요, 대장. 걱정하지 마십쇼.”

“...알겠다.”

마로크 중대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마지막 보고를 위해 연대 지휘부로 향한다. 그의 손에는 남들보다 반 사이즈 정도는 커 보이는 도끼창이 들려있었다.

“돌격 준비가 1분 후에 완료될 것 같소, 에르만 연대장!”

“수고했네.”

연대장인 에르만 슈피리와, 그 휘하 중대장인 마로크의 눈이 마주친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빌링엔 연대에는 중대가 3개 있다. 뮈다켄, 휘어브루넨, 빈더갈렌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빌링엔 본토에 있는 지명 이름으로, 해당 중대를 구성하는 병사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빌링엔이라는 하나의 국가, 혹은 지역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원래 경쟁자이다. 오랫동안 내전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트랑카벨 영지군 내부에서, ‘피 흘리는 흑곰’의 깃발 아래에 뭉쳐있지만···.

“...연대장, 우리 이대로 가도 되겠소이까? 아까 빈더갈렌은 이웃 연대 도우러 갔으니, 연대 예비대가 바닥난 것 아닌지?”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보겠네. 걱정말고 휘어브루넨의 힘을 보여주시게.”

“하핫, 오늘만은 휘어브루넨이 아니라 지빌링엔을 위해 피를 흘리겠소!”

“오늘 뿐 아니라, 내일도, 그 이후로도 지빌링엔을 위해 흘려 주시게.”

“그리고 트랑카벨도 말이오!”

“그거야 물론이지.”

연대장과 중대장, 고향 지인, 수틀리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경쟁자, 두 사람은 잠시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럼 가보겠소이다, 연대장. 오늘 뮈다켄이 흘리는 피가 가치가 있기를.”

“지빌링엔이 언제 흘리는 피의 가치를 따져가며 흘렸소? 그냥 오늘은 여기가 피를 흘릴 장소일 뿐이지.”

“하핫, 그것도 그렇지.”

전장에서 쓰러지면 동료가 전사자의 용병료까지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처참한 용병의 역사를 수백 년 넘게 이어온 민족이다.

상징조차도 피를 흘리면서도 주군의 문장을 지키는 흑곰의 모습이다. 그 전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주군을 지키다 전멸한 용사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지빌링엔의 대화는 다른 용병들과는 조금 다른 감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서두르자, 기사님들이 길을 중간까지 뚫어 주셨으니 나머지는 우리 차례다.”

중대장 마로크가 부대의 선두로 향하자, 말 없이 병사들이 길을 터 자리를 양보한다.

중대장과 병사이기에 앞서, 고향의 지주와 지인들이다. 애초에 대부분이 입대하기 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이기도 하다.

마로크는 굳이 부하의 숫자를 세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200명이 조금 넘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맨 처음, 블랑독까지 찾아와 연대에 합류했을 때는 300명이 넘었었다.

그리고 확실하게도, 오늘 전투가 끝나면 200명 아래로 떨어지겠지.

“가자, 휘어브루넨··· 아니, 피 흘리는 흑곰!”

중대장의 외침에, 병사들이 호응한다. 좁고 긴 대형, 창병과 총병, 여타 잡다한 무기를 든 병사들이 뒤섞인 모습은 전형적인 일점 집중을 노리는 돌격대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는, 아군을 만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예엣!”

“모두 무기를 들어라!”

“무기를 들어라!”

“간다! 트랑카벨을 위해 피를 흘려라!”

“트랑카벨을 위해 피를 흘려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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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 전령! 테라얀 연대로부터의 전령입니다!”

“무슨 내용이지?”

라솔 군, 이스키비르 하류주둔군 사령부는 빗발치는 정보로 혼란스럽다.

하류주둔군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는 사령관인 퀸토 변경백을 대신해 서둘러 내용을 확인한다.

“적의 기병과 보병의 협공에 의해 분단, 마지막 보고가 될지 모르나, 최후까지 임무를 다 하겠음! 지원군은 필요 없음! 이상입니다!”

“....”

숨이 턱 막히는 보고이다.

이스키비르 네 검천사의 셋째, 테라얀 연대는 방금 사령부로 자신의 부고 소식을 보낸 것이나 다름 없다.

지원군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마도 이미 늦었다는 것이리라.

그 뿐 아니라 테라얀 연대는, 나란히 배치되어 적을 공격하고 있는 네 검천사 연대 중 가장 좌측이다. 이대로 두면 아군의 활동범위 자체가 쪼그라 들 것이다.

아드리아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전투는 패배했다. 이래서는 검천사가 아니라, 검의 대리인 본인이 와도 전황을 뒤집지는 못하리라.

검천사의 일익이 창설 이후 처음으로 찢겨 나갔다.

타라트라바 군은 아까부터 죽는 소리를 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패주하는 부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류주둔군의 참모장으로서 ‘더 나은 패배’를 건의하는 수 밖에 없다.

“퀸토 변경백 각하는? 사령관 각하는 어디 계신가?”

“그게··· 돌파를 지휘하신다면서 전방으로 가셨습니다.”

“뭐? 직접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원래 사령관이 하나에 완전히 집중하면 다른 업무를 신경쓰지 못하는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령관이 일개 연대장의 역할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사령관은 전장 전체를 살펴야 하는 사람이다.

“즉시 모셔오··· 후, 아니다. 내가 직접 다녀오겠다.”

“아, 알겠습니다 참모장님.”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최전방에 있다면 테라얀 연대의 위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점이겠지.

그의 상관 퀸토 변경백은 결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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