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15화 (315/556)

35-38. 생뢰르반 전투

###

‘전 남작’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스스로를 무능한 인간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평생 실패만 해 온 인간이다, 라고 생각한다.

드 레뮤즈 백작령의 동쪽 끄트머리, 블랑독 지방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손바닥만한 남작령의 계승자로 태어났다.

평생 뭔가 대단한 목표를 가지거나 노력을 해본 적 없다.

주어진 의무는 어떻게든 했고, 주어진 권리는 되는대로 누렸지만, 어느 쪽이나 정해진 일 이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상황이니 특별히 뭔가 얻겠다,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촌구석 남작 나부랭이인 가문을 확장시켜 승작하겠다는 욕심도, 엘랑키아 국왕이나 드 레뮤즈 백작을 섬기며 이름을 떨치겠다는 욕심도 없었으니까.

평생이 복지부동, 몇 안되는 가솔을 챙기고, 영지와 영민들 사이에 큰 재난이 없기를 바라며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매 해 여름과 겨울을 살았고, 그렇게 늙어갔다. 오십 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정순파 이단 토벌은 이 늙은 시골 남작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는 대체 무슨 연유였을지.

자신은 딱히 영민들에게 잘 대해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착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통법에 따른 액수를 징수했고, 정해진 만큼만 역을 부과했다.

정순파 이단 탄압 당시에도 특별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주신교의 총본산인 법황청에서 이단 토벌을 명령했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은 각별하지는 않아도 주신교 신도였기에 당연히 따랐을 뿐이다.

자신의 영민이 정순파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딘가, 외부에서 들어온 떠돌이나 호리꾼 따위 겉으로만 봐도 ‘나 이단이오’ 하고 써붙이고 다닐 놈들이나 몇 잡아서 처벌하고 교단에 넘기면 될 일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군을 소집했다.

허나 현실은 달랐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가문의 재무관, 막생 노타름의 아내가 정순파였다.

그 외에도 가문에는 여기저기 정순파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영주인 자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시기에 말이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드 랑두제 영지의 신하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고···.

종국에는 주변의 혈기왕성한 귀족들까지 모여드는 바람에, 여태껏 한번도 엘랑키아 역사서의 구석에조차 등장한 적이 없었던 드 랑두제 영지는 큰 전투에 휘말리게 되었다.

머저리 젊은 귀족들을 모은 기사도 연합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소베트르 본인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사도 연합은 그룬발트의 뭔 시커먼 옷을 입은 기사단인지 뭔지와 함께 블랑독 토벌에 나섰고.

트랑카벨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영지군에게 철저하게 박살났다.

연합군 사이에 지휘권을 통일하지 못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귀족들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지형에 무지했다.

이 따위 변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연합군 사이에 지휘권이 통일되었어도.

혈기왕성한 젊은 귀족들이 철저하게 명령을 따랐어도.

그리고 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도.

이길 수 있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자신들이 시도하는 모든 것은 의도하는 시점에서 이미 간파당하고, 분쇄되었으니까.

젊은 시절, 일개 기병으로 차출되어 몇 차례 보잘것 없는 전장에 나갔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넘을 수 없는, 병력과 무기를 맞대는 순간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거대한 벽과도 같은 적장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와 같은 무대에는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상대하는 순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패배일 뿐이며, 끝은 죽음 뿐이리라.

무능하고 멍청한 자신이라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도망치듯 자식에게 남작위를 물려주고 은퇴한 것은 그런 무대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이유가 없지 않았으리라. 실패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크긴 했지만.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떤 연유인지···.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불려나와 ‘그 상대’와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다행히도, 하늘의 주신과 조상님께 감사하게도, 그 뭘 해도 이길 수 없다 여겼던 적장은 이번에는 ‘아군’ 이었다.

세상에, 주신이시여, 국왕이시여, 이 늙은이를 보호하소서.

같은 지휘부에서 일했고, 주군은 늙은 소베트르에게 왜인지 기병대장이라는 중임을 맡겼기에 자주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저히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멀리서 보면 평범하게 생긴, 어딘가 지쳐 보이는 차분한 청년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마주치면 여울목 전투에서의 절망적이었던 기억이 떠오르며 숨이 차고 시선이 흔들려 도저히 마주볼 수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데, 엘랑키아 국왕의 군대와 법황의 침략군을 한 번씩 무찔렀다고 한다. 척박한 블랑독에서 모은 군대로 말이다.

애초에 자신을 포함한, 입만 산 떠벌이 귀족 나부랭이가 덤벼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노력했으면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어차피 노력 따위 하지도 않았고, 되는 대로 살며 큰 불만도 없었던 인생이다.

그래도 평생을 걸고 목표로 노력했어도 결코 그러한 존재는 될 수 없었으리라. 하늘과도 같은 빛나는 존재는 말이다.

이 존재,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와 한 무대에 다시 서게 된 것이 하늘에 고맙지는 않았다.

허나, 그와 같은 편이 된 것에 기뻐하면서.

그리고 무력한 자신을 불러 올려 중요한 임무를 맡겨주신 주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감사하면서.

오로지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가 주군을 대신해서 명령한, 자신의 임무를 다 하기 위해 전장을 달린다.

비록 자신은 미천하고 무력한, 이제 작위조차 자식에게 넘겨주고 없는 무능한 늙은이지만···.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는 드 레뮤즈 영지의 가장 용맹한 젊은이들 2천 명과 함께하고 있었다.

능력도 의지도, 심지어 자격조차도 없는 퇴물 노인네인 자신과는 달리, 능력도 의지도 충만한 빛나는 청년들이다.

“드 레뮤즈에 영광을! 드 레뮤즈에 영광으으을!”

“돌격! 돌겨억! 물러서지 마!”

“대열을 유지해! 우리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후예다!”

그 드 레뮤즈의 원석들이 고함을 지르고 악을 쓰며, 창과 권총, 장검을 겨누어 하늘에서 내린 벼락처럼 쏘아져 가고 있었다.

목표는 물론 기세등등한 라솔 보병대였다.

“라솔 놈들은···.”

준마를 타고 갑주를 두르고, 전통적인 길고 무거운 기병창을 꼬나 쥔 드 레뮤즈의 기병이 뒤늦게 기병의 기습을 깨달은 라솔 장교를 노린다.

“엘랑키아에서 나가라!”

퍼걱!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나더니, 피와 함께 부서진 창대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쪽 구석에 창날 끝이 절반 정도 박힌 투구가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

···안에는 원래 보호하고 있었던 ‘알맹이’가 들어있는 상태로.

기마 돌격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잘려나간 목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반격을 지휘해야 했을 라솔군 후방 지휘 장교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첫 전공을 취한 기사는 부러진 창을 그대로 던져 버리고 허리춤에서 철퇴를 뽑아 든다. 그대로 우왕좌왕하는 라솔 군 사이로 파고 든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바로 뒤를 이어서, 그리고 옆에서 수 많은 드 레뮤즈 기병대가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용맹하고 의기에 가득했다고는 하나, 기병대로서의 활동은 이번이 거의 처음인 드 레뮤즈의 기병대.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하였고 무수히 많은 패배자들을 매장했으며, 그 중에는 분명 돌격해오는 적 기병에 대한 방어전도 포함되어 있을 라솔의 네 검천사 연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라솔 보병 연대의 창벽과 구름처럼 자욱하게 터져 나오는 총병의 일제사격이 드 레뮤즈의 기병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드 레뮤즈 기병대는 이를 뚫지 못했을 것이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는 적의 창벽 앞에 무수히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퇴각했겠지.

비슷하게 무장한 서부군 기병대가 실행했던 무리한 돌격의 패퇴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소베트르 드 랑두제가 이끄는 기병대는 전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창이 되어 라솔 보병대의 심장을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답은 하나.

이 돌격이 후방에서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마술처럼.

“끄아악! 뭐야?”

“두로네이 분견대! 두로네이 분견대! 반전, 반전하라!”

“혼란 통에 두로네이 경이 어디 계신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럴 리가 없다! 테라얀이 이렇게 무너질 리가 없어!”

“일단 사각 대형을 갖춰! 사각 대형이다!”

“늦었습니다, 크으읏!”

극심한 혼란.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네 검천사 연대는 강하다.

병력도 충실한데, 비슷한 숫자의 적은 물론 좀 더 많은 적과의 싸움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강함을 가진다.

약해 빠진 엘랑키아의 보병은 물론이고, 라솔 왕국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강력한 기병조차도 정면에서 싸워 얼마든지 패배시킬 수 있다.

언제나 모든 방향의 공격에 대비하며, 각 방면의 부대들은 적의 움직임에 따라 유기적으로 협력한다. 어디를 공격하던 적은 예상 이상의 반격을 받으리라.

이는 하류 주둔군 모두에게 자부심이며, 또한 ‘상식’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옥에서 왔나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적군. 트랑카벨 파견군 소속의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해 초조해졌기 때문일까.

네 검천사 중 테라얀 연대의 연대장은 후위에 배치된 병력, 당장은 싸울 상대가 없는 병력을 적 방어선을 우회해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판단을 한 것은 분명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하류 주둔군에서 멍청이가 연대장이 되는 일도 없다.

현재는 적을 돌파해 전선의 방향이 바뀐 상황, 아직 후방에는 완전히 궤멸하지 않은 엘랑키아 군 우익의 잔당이 남았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당연히 후위를 지키는 네 검천사의 막내, 코루냐 연대가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기에, 다소 무리한 병력 전용을 판단한 것이다.

허나 코루냐 연대는 테라얀의 연대장이 짐작한 장소에 없다.

하류 주둔군의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이 선두에서 큰 피해가 누적된 우노스 연대의 후속 병력으로 코루냐 연대를 파견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공백은 일시적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검천사를 제외한 라솔 군 예비대가 방어선을 확장할 것이며, 경계를 강화할 예정이었다.

분명 그리 되었으리라. 몇 분만 무사히 흘러갔다면.

‘무능한 기병대장’ 소베트르의 눈에 그 빈 틈이 보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퇴각하여 지리멸렬한 엘랑키아 서부군의 기병대를 수습했으며, 압박하는 라솔의 추격대와 싸워가며 간신히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소베트르는 간신히 여유가 생겼다.

이미 반쯤 무너져, 이대로면 완전히 붕괴되어 전장에서 이탈하는 게 아닐까, 전멸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던 서부군 보병대가 갑자기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크나큰 짐을 덜고, 정신을 못 차리고 지리멸렬해 있던 서부군 기병대를 간신히 예비대로 배치한 소베트르가 드 레뮤즈의 기병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돌아온 것은 이 무렵.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적진 한 가운데의 거대한 구멍을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다.

라솔 군 지휘관, 퀸토 변경백은 결코 무능한 인간이 아니며, 성마른 인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조금 성급하게 움직였다.

조금만 더 하면 뚫릴 것 같은, 정면의 정체불명의 엘랑키아 보병대가 시체를 산처럼 쌓아가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쌓여가는 시체의 절반 이상이 라솔 군이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그 최정예, 이스키비르의 네 검천사 말이다.

이들은 여기서 이렇게 헛되게 죽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다.

향후 북쪽으로 진격해, ‘이 따위 변경 수비군’이 아닌 제대로 된 엘랑키아 국왕군을 섬멸하고 승전보를 울려야 할 부대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엘랑키아의 왕도 베르마유를 함락하고 입성하는 라솔 군이 되어야 할 부대였다는 말이다.

그 자식같은 병력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퀸토 변경백이 자신이 가진 최강의 카드를 모두 털어넣은 것 자체는 비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후방’이라고 인지한 영역에서 병력을 불러 올린 것도 비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아직 전투를 포기하지 않은 부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 실책이다.

바로 소베트르의 드 레뮤즈 기병대 말이다.

“엘랑키아를 위하여!”

드 레뮤즈 기병대가 적으로 가득한 초원을 질주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