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7.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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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방아쇠를 당겼으나 격발되지 않는다.
기대했던 화염도, 반동도, 탄환의 발사도 없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총병 소대장··· 지금은 어쩐지 보충병력이 많아진 독립 부대를 이끌게 된 얀 고티에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실수했나? 왜 탄환이 나가지 않지?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원인을 깨닫는다.
지금 총은 원래 사용하던 중화승총이 아니다. 백병전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원래 무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져있던 아무 화승총이나 집어 들었다.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트랑카벨 정규 연대의 총병에게 지급되는 최신형 화승총이다.
첫 출전 때는 얀 자신도 사용했던 물건이기에 익숙하다.
부디 원래 주인이 살아있다면 무사하기를, 혹은 안식을 얻었기를.
얀의 소대가 사격 실력을 인정 받아 차출되면서 중화승총을 대신 지급받았기에,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지금 들고있는 것과 같은 트랑카벨 총병의 화승총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격철을 뒤로 당겨야 격발이 된다.
그 이후 오랫동안 사용해온 지발식 중화승총은 그 단계가 생략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격철 내리는 단계를 생략했다.
엄지손가락을 뻗어 격철에 얹는다. 신병 시절 불 붙은 화승을 맨 손으로 잡아 생겼던 흉터가 갑자기 당겨온다.
찰칵, 하고 잊고 있었으나 여전히 익숙한 감각이 돌아온다.
조준할 틈도 없이, 눈 앞의 거무튀튀한 흉갑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이번에는 어김없이 발사되었다. 평소 쓰던 중화승총의 발사 반동보다는 훨씬 적지만, 여전히 어깨가 아려오는 충격.
진흙과 화약 찌꺼기, 핏방울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라솔 보병의 몸이 무너진다.
“이··· 시펄··· 엘랑키아 돼지새끼···.”
적병은 휘청대며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러면서도 양 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을 놓치지 않으며, 상체를 세우고 자신을 쏜 얀을 노려본다.
“개자··· 식!”
“돼지인지 개인지 하나만 해.”
옆에서 다른 트랑카벨 보병이 무심한 듯, 익숙한 모습으로 뒤통수를 후리자 악착같이 버티던 적병이 그제서야 쓰러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얀은 다음 탄환을 장전하던 중이었다. 이미 탄약포를 뜯어 화약은 넣었고, 꽂을대로 쑤시는 단계.
어차피 저렇듯 악을 쓰고 난리를 펴도, 상체 맞아서 다리 풀리면 더는 못 움직인다. 의식은 멀쩡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1분 내로 의식을 잃고 5분 내로 죽는다.
그런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굳이 마지막으로 목숨을 끊겠다고 다가가지 않는다. 괜히 휘적거리는 눈 먼 칼에 다치는 경우도 있고.
그 보다는 빨리, 한 발이라도 더 장전해서 쏘는 게 중요했다. 적은 많고, 장전된 총은 적으니까.
타탕! 타다당!
탕! 타탕!
얀과 그의 소대가 있던 장소는 지금 혈전의 현장이 되어 있다.
처음에는 겨우 반 개 중대 정도가 지키고 있던 나지막한 고갯길에 적은 끊임 없이 연대급 병력을 계속 투입해오고 있었다.
보다 적은 숫자지만, 어떻게든 사방에서 지원군을 보내왔기에 간신히 적의 공세에 버티고는 있었다.
서로 너무 많은 병력이 투입됐기에 병력 밀도가 높고, 양측 모두 느슨한 대열로 마구 뒤섞인 잡다한 병력으로 밀고 당기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평범한 총병 소대장이었던 얀은 어쩌다보니 그 선두에서 작은 혼성 보병 부대의 구심점이 되어버린 상태였고.
그렇다는 것은, 주변에서 끊임 없이 죽음이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여기를 뚫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듯, 적군은 무서운 기세로 반복해서 몰려왔다.
어디서 저런 병력이 나오지? 전장의 다른 곳은 괜찮은가? 라는 생각이 날 정도의 상황이고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주변에 보이는 소대원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머리가 번민하는 사이, 머리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잘도 움직이던 손은 장전을 마친다.
찰칵!
이번에는 격철 당기기도 잊지 않았고.
타앙!
대충 적을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정확한 표적 지정이나 사격 구령, 통제 따위는 진작부터 없다. 그저 한 발이라도 적진으로 더 날려 보내는 것이 절대선인 복마전일 뿐.
“으아아아아아!”
“왕국에 주신의 가호를!”
저 지겨운 자식들이 또 우르르 몰려온다.
저 라솔 군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 강한 자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백병전에 휘말려 죽을 뻔한 게 두 번이나 된다.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터엉, 퍼억!
카가각!
“크으윽!”
“막아! 개새끼들 막아!”
얇을대로 얇아진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창벽은 이제 유지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전사자들의 창을 대신 쥐고 대열에 합류한 지빌링엔이나 드 레뮤즈 출신 지원병들이 아니라면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전선 전체를 방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니, 그 빈 자리를 지탱하는 것은 얀과 같은 총병이나 혼성 백병전 부대들이다.
과도한 밀집도에 과도한 화력이 집중되니 양측에서 무의미하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빠르게 백병전이 시작된다.
얀 역시도 미처 장전도 다 못한 상태로 새로운 백병전에 휘말리고 만다.
“죽어 돼지새끼!”
“크윽!”
간신히 도끼의 옆면으로 적의 찌르기를 튕겨낸다. 날카로운 칼날에 긁혀나간 도끼 자루의 측면이 흩날린다.
“뒈지긴 뭘 뒈져!”
일 대 일 상황이라면 전혀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옆에서 도끼창을 짧게 잡은 누군가가 옆구리를 찌르며 대신 가로 막는다.
“엘랑키아의 쓰레기 놈들이!”
“나는 엘랑키아가 아니라 지빌링엔 쓰레기다!”
검과 도끼창이 격돌한다. 양쪽 모두, 검으로 도끼창을, 도끼창으로 검을 상대하는 법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모습이다.
자신은 상상도 못할 수준의 공방이 이어지는 장면을 보며, 얀은 다시 꽂을대를 잡는다. 어차피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거친 사격으로 한 번 걸러지고도, 이상하게 숫자가 많다. 지금의 공격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공격은 견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
이제서야 주공이 몰려왔구나 라는 생각.
이를 꽉 물고 총을 장전하는 손을 빠르게 한다.
다만, 눈 앞의 적에게 긴장한 때문인지, 그 뒤로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깃발과 모래먼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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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갔던 탕아가 돌아왔다!”
“안 불렀는데요? 누가 불렀죠?”
“이제 돌아와도 자리 없어, 돌아가!”
“시끄러!”
왁자지껄하는 분위기 속에 크레시미르 두브람이 이끄는 돌격대가 원대인 슈토르히 연대로 복귀한다.
탕탕탕탕!
“어우 방패 두드리지 마, 안쪽에서는 대포 소리가 난다고 이 양반들아!”
“그래야 대포알도 튕겨 낼 것 아냐?”
원대 복귀하는 측이나, 돌아온 탕아를 환영하는 측이나 유쾌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복귀하는 돌격대의 몰골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은 양쪽이 모두 알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붕대와 지우지도 가리지도 못한 핏자국.
총탄에 맞아 부분 부분 구멍이 뚫리거나 망가진 방패.
자신만만해 보이기는 하나, 명백하게 지친 얼굴들.
무엇보다도, 숫자가 적다.
본대가 우회하는 동안, 자칫 흔들릴 수 있었던 중앙을 지탱하기 위해 파견되었었다.
연대급 병력들이 전력을 다해 충돌하는 전장에서, 1개 강화 중대 수준의 병력으로는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손에 꼽히는 정예병들이라 해도 초인은 아니며, 백전연마의 전사도 총 든 농부의 럭키샷에 죽음을 당하는 화약의 시대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자칫 뒤집힐 수도 있었던 전장의 무게추를 유지했고, 최종적으로 수가 훨씬 많은 알시라스 해군육전대의 투입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만한 전술적 성취에··· 합당한 희생이 따르는 것도 너무도 당연하다.
“복귀했습니다, 연대장 대리!”
“수고하셨습니다, 돌격대 선임 중대장!”
슈토르히를 이끌고 있던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와 돌격대의 크레시미르 두브람은 격식을 갖춘 보고와 경례를 주고 받는다.
허나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오른 팔이 엮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체를 끌어 당겨 끌어 안는다.
서로의 흉갑이 부딪쳐 둔탁한 소리가 나지만 상관하지 않고 포옹을 푼 후에는 격식을 갖추지 않은 평소의 두 사람으로 돌아온다.
“돌격대가··· 상처가 적지 않아 보이는군.”
“하핫, 열 배가 넘는 녀석들을 격퇴했으니까. 포로 말로는 라솔이 아니라 알라시스? 알사라스? 그런 쪽 놈들이더라.”
“알시라스겠지. 라솔 서부 해안지역에 위치한 소국이야. 타라트라바 뿐 아니라 알시라스도 함께 있었나보군.”
“아 그래, 그거. 이상한 놈들이었지만.”
크레시미르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친다.
“다음 공격에서는 돌격대를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좀 더 휴식이 필요한가?”
“우리 애들이 뭐라 대답할 것 같아? 그냥 무기 바꿀 시간만 줘.”
“그래. 조만간 또 어려운 임무를 맡을지도 모르니 잠시 쉬면서 준비해줘.”
“아직 다음이 정해지지 않았어?”
“우린 여기까지 전진하고 대기하는 게 임무였어. 조만간 콘도티에레의 새로운 명령이 내려오겠지.”
연대장 대리 루트비히는 그 동안 본진을 떠나 있었던 크레시미르에게 간략하게 그 사이의 전황을 설명한다.
슈토르히 연대는 전군의 가장 외곽에서, 물러서는 적을 안쪽 방향으로 몰거나, 저항을 깨부수면서 눈부신 진격을 해 왔다.
콘도티에레에게 거의 처음으로 받은, 완벽한 전술적 자유.
루트비히는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철저하게 이길 수 있는 루트로만 이동했으며, 우세한 적과 대치하여 진격이 끊기거나 희생이 발생할 상황은 절대적으로 피했다.
그럼에도 슈토르히의 진격은 다른 아군이 따라오기는 커녕, 적군의 후퇴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실제 전투는 바둑이 아니다. 적의 후방을 끊고, 고립시킨다고 해서 적이 딱 하고 사망하는 룰 따위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금부터 퇴각해야 하는 후방에서 적이, 그것도 연대급의 적군이 갑자기 나타나면 그 부대가
측면 엄호와 지원을 맡은 프리스마라 기병대도 그 속도에 놀라워하며 따라올 정도였다.
물론 이는 단순히 슈토르히 연대의 비범함을 증명해주는 지표는 아니다.
먼저 오랜 밀고 당기는 전투로 지쳐버린데다가, 어느 정도 기세가 고착화 되어버린 전장에 지금까지 예비대로 온존하고 있던 최정예 용병 연대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다.
이미 서로가 한계까지 짜내고 있던 전장에 갑자기 사신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가 현 연대장 대리로 실질적 지휘관인 루트비히는, 실질적으로 콘도티에레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기 전까지 좌익의 트랑카벨 파견군을 ‘지휘’하고 있던 와중이다.
현재 좌측 전장의 상황이나, 피아간의 유불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어디를 때리면 적이 아파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타라트라바의 보병 연대들은 결코 약한 군대는 아니다.
전군의 태반이 어떤 루트로건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강한 군대이며, 의지와 사명감을 포함해 사기도 높다.
허나 바로 분석당한 것처럼, 부대의 중추가 되는 중견 장교들의 질과 양이 부족한 까닭으로 부대의 움직임이 기민하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이 있었다.
이처럼 적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한 연대장 대리가 지휘하는, 원래 강한 슈토르히가 남들보다 약할 리 없었으니까.
“콘도티에레가 정말 ‘슈토르히는 마음대로 해라!’라고 했다고?”
“그래. 쉽진 않았지만, 보람있는 여정이었지.”
결코 표정이 다양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루트비히가 아니건만, 이번에만은 자랑하듯 말하며 활짝 웃는다.
“하··· 자유로운 슈토르히라니, 내가 제일 맛있는 부분을 놓치고 있었네.”
“...돌격대가 어떤 생지옥에서 싸우고 왔는지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 콘도티에레께서 어떤 임무를 맡기실지는 모르겠으나 돌격대에게 쉬운 길은 아니겠지.”
“돌격대가 쉬운 길 가는 거 봤어, 연대장 대리님?”
“하··· 일부러 자기 인생 꼬는 녀석 다운 대답이네.”
“푸하하하하하!”
누가 뭐라해도, 트랑카벨 영지군 최강의 카드인 슈토르히를 지휘하는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고는 두 손을 맞잡는다.
다른 두 명의 선임 중대장들은, 한명은 아실 트랑카벨의 참모였고, 다른 한 명은 콘도티에레의 부관이었으니까.
크레시미르는 몸을 돌려 저 멀리에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트랑카벨 사령부를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콘도티에레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지만, 키가 크고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첼레스티나의 모습만은 잘 보인다.
길 못 찾는 것 빼면 모든 게 완벽한 홍일점 선임 중대장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것은 분명해보인다.
“콘도티에레는 어떤 생각이실까?”
“지금 우리가 좀 빨리 왔고, 섣부르게 덤벼오는 적 후위대를 격파했어. 그래서 적 일부의 퇴로를 틀어 막는 형국이니까, 적을 포위 하시려는 게 아닐까?”
“오, 그거구만. 아직 다른 부대들이 제 위치로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두 선임 중대장은 부대를 추스르기 위해 헤어진다.
콘도티에레가 지휘하여, 승리한다.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명제였기에 두 선임 중대장은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