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3. 생뢰르반 전투
타앙!
얀 고티에는 적이 돌진해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중화승총을 겨드랑이에 어정쩡하게 끼운 자세로 방아쇠를 당겼다.
훈련병 시절이었다면, 신병 시절이었다면 교관이나 장교가 기겁하며 막았을 법한 불량한 자세이다.
당연히 시선과 총열이 일직선이 되지 않으니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고, 견착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총구가 멋대로 흔들린다.
게다가 옆구리가 아프고 겨드랑이가 쓰라린다. 마치 누가 몽둥이로 때린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상관 없다.
총구가 화염을 뿜어낸 것은, 바로 근처까지 달려온 적의 가슴 앞이었기 때문이다.
탕!
“으윽!”
거의 동시에, 적병도 달리던 기세 그대로 권총을 발사했다.
갑자기 얼굴 오른쪽, 뺨에 뜨겁움이 화악 하고 느껴졌다.
방금 발사시에 옆구리가 몽둥이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라면, 이번에는 뺨을 뜨겁게 달구어진 꼬챙이로 얻어 맞은 느낌이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지만, 다시 크게 뜬다. 보아야 한다. 보아야 했으니까.
비스듬히 위쪽으로 발사된 총탄은 앞장서서 달려오던, 장교로 보이는 적병의 가슴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리고 흉골을 파고 든 총탄은 그대로 적의 몸을 관통, 반대편으로 터져 나오면서 적의 살점과 끈적거리는 피를 뒤편으로 흩뿌렸다.
얀 역시 교육을 받은 적은 있다. 주로 총탄으로 사용하는 납의 경우 상당히 무른 금속이기에, 철제 갑옷과 같은 단단한 것과 부딪치는 경우 조각나기 쉽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흩어진 탄환 조각들은 그대로 피부에 박혀서 얕지만 넓은 상처를 입혀 군의관을 곤란하게 한다.
다만 이번에는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됐기 때문인지, 흉갑을 뚫으면서 조각난 탄환 조각들이 그대로 적의 흉곽 내부를 꿰뚫고 반대편으로 비산한 모양이다.
재수없게도, 바로 뒤에 서 있다가 선봉에 섰던 장교의 피와 고기를 얼굴로 뒤집어 쓴 라솔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게 그들이 생전에 하는 마지막 행동이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컥! 커거걱!”
옆에서 이웃 중대의 동료 소대장이 휘두른 곡괭이가 적의 쇄골을 부수고 박혔다.
베였거나 찔렸다기보다는, 뜯겨나간 것 처럼 보이는 상처에서는 혈관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엄청난 양의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왔다.
이를 본 또 다른 적병이 뒤이어 달려든다. 폭이 좁고 찌르는 데 특화된 것처럼 보이는 짤막한 단검으로 아직 적에게 꽂힌 곡괭이를 뽑아내지 못한 소대장을 공격한다.
“조심해!”
얀이 돕기위해 움직이지만 적이 훨씬 가까웠다.
소대장이 움찔하며 힘을 줘 곡괭이를 뽑아내자 시뻘건 피가 호선을 그린다. 반동 때문에 즉각 방어를 취하지 못한다.
대신 곡괭이를 뽑아낸 반동을 이용해 적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다.
카가각!
칼 끝이 둥그스름하게 굴곡진 트랑카벨 총병 표준 흉갑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분명 살을 파고드는 소리보다는 나으리라.
“이 자식!”
다음으로 얀이 한 행동은 허리띠에서 뽑아낸 도끼를 휘두른 것이었다.
푸콱!
덮어 놓고 휘두른 도끼는 첫 공격 기회를 놓친 적병의 얼굴을 후려쳤다.
달려오던 기세가 있기 때문인지, 적은 그대로 발이 땅에서 떠오르며 상체부터 바닥에 처박힌다.
타탕! 타다당!
탕탕!
장전을 마친 후열이 산발적으로 사격을 가하자, 돌격해오던 적의 기세가 급격히 수그러든다.
“허억! 허억!”
사람에게 도끼를 휘두르는 것은 처음이다.
정말 뜬금없게도, 처음 아버지에게 도끼질을 배울 때, 절대 날을 사람 방향으로 향하지 말라고 엄하게 교육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신다 하실지라도 아버지는 얀을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왠지 도끼를 휘두르면 잘린 부분이 깨끗하게 쪼개지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휘둘러보니 조금 다르다.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경련하는 적병은 도끼에 맞은 지점 중심으로 얼굴이 온통 주저앉아 있다.
세로로 길게 벌어진 상처는 오른쪽 눈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 소름끼치게 벌어진 상처 안쪽으로는 시뻘건 무언가가 보인다.
가해진 얀이 무심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끔찍한 상처였다.
아니,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는다. 느끼지 말아야 한다.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 지금까지 얀이 납탄을 쏘아 쓰러뜨린 적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자는 멀리 있었으면 어차피 납탄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저, 여기까지 힘들여 뛰어왔기에 불필요하게 끔찍한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얀에게 구원받은 동료 소대장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고맙네! 창병 예비대가 지원 왔어!”
“그, 그렇습니까?”
“그리고 아까 멋졌어! 아직 전투가 끝나지는 않았으니 제10 카르카냑의 힘을 보여주자고!”
“그래야죠! 그러겠습니다.”
다행히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지휘부는 전장을 확실하게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적에게 돌격당한 총병 대열을 지키기 위해 창병들을 보내왔다.
물론 제대로 된 창벽을 짜서 적을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총병들이 지키며 싸울 수 있는 ‘움직이는 요새’를 만들 수 있다. 적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그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아아아아아!”
“엘랑키아의 돼지 새끼들이!”
적의 선두가 잠시 주춤한 듯 했으나, 후속 병력이 도착하자 다시 기세를 되찾아 달려온다.
이를 창병과 총병이 뒤섞인 트랑카벨 보병들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친다.
얀은 자신의 도끼가 아직 할 일이 남았음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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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전을 거듭하고 있는 트랑카벨 영지군의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나란히 배치된, 지빌링엔 ‘피 흘리는 흑곰’ 연대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드 레뮤즈 보병대의 횡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꺾이는 ‘모서리’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현실적으로 삼면의 적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현재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는 적의 십자포화를 견디고 있는 형국이다.
지빌링엔 연대는 거기서 우측으로 연장된 보조 전열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다음 두 가지 점이 지빌링엔 연대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선은 지빌링엔 연대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연대장인 에르만 슈피리를 비롯한 연대 소속 전원이 고향이나 외국에 나가있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모병에 열을 올리고는 있었다.
고향의 가족들이 수령할 수 있도록 보내주는 트랑카벨 가문의 봉급 역시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지빌링엔 연대 소속의 병사는 지빌링엔 출신이어야 했다.
지빌링엔은 너무 멀었고, 너무 작고 가난한 나라였으며 인구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모병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정원이 1천 명도 넘은 적이 없다. 현재도 900명 남짓.
아무리 자부심을 가진 정예들이라 해도 평원에서 힘과 힘이 부딪치는 싸움에서는 숫자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다음으로, 적장은 본능적으로 지빌링엔을 뚫으면 적의 후방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그래서인지, 다소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강공을 취해왔다.
방어측 지휘관인 연대장 에르만이 보기에, 이는 병사들의 목숨을 무의미하게 던지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전선은 지빌링엔 연대의 대열 쪽으로 바짝 당겨졌다. 숫자가 거의 두 배나 되는 라솔 연대가 그런 전술을 취한 것이니까.
처음부터 깔끔하게 승리해서, 전술적으로 적을 몰아내고 우세한 포지션을 점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서로 한 명씩 맞찔러서 천 명씩 죽더라도, 적은 전멸하고 아군은 천 명이 남는다는 식의 무자비한 전술.
대체 적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가.
보나마나 시간이었다. 적군은 아무렇게나 양성할 수 있는 징집병이 아니다. 분명 적장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워온 정예군이다.
그걸 이렇게 많은 피해를 감수하며 소모전을 강요한다는 것은 적장에게도 달가운 일은 아니리라.
그런데도 이러는 것은 오로지 시간,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핫!”
초조하게 보급품의 잔량을 보고받은 에르만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중대장 알골이 깜짝 놀라 연대장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거, 아무래도 아군이 이기고 있는 모양이군.”
“네에? 저희 지금 불리한 것 아닙니까?”
“적이 이렇게 악착같이 우리를 뚫으려 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나? 전장의 다른 쪽에서 콘도티에레가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아··· 생각해보니 그게···.”
대충 상황은 알았다. 자신이 초조한 만큼, 적장도 초조한 것이다. 이렇듯 무모하게 공격해오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안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선은 위기이고,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적이 공세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빌링엔 연대는 매우 잘 싸우며 적의 공세를 차근 차근 격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계까지 방어선을 연장시킨 지빌링엔 연대의 한계는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차례 교전에서 사상지 비율은 적이 훨씬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적의 사망자는 새로운 예비 병력으로 채워지나, 지빌링엔 연대의 결원은 이제 채워지지 않고 있다.
훨씬 얕고 빠듯한 창벽으로 적의 창벽을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총병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트랑카벨 파견대 소속 연대들 중 총병의비율이 적은 편인 지빌링엔 연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공격해오는 편이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버티고 있고, 충분히 더 버틸 수 있다. 이것은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다.
“버틴다. 버티다 보면 어느새 콘도티에레가 전투를 이겨 놓을 테니까. 피 흘리는 건 우리 장기잖아.”
슬픈 말이고, 자조적인 말이지만 지빌링엔의 이름은 그렇게 높아져왔다.
절체절명의 불리한 상황,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아군의 시체 옆에 적군의 시체를 더욱 높여 쌓는 방식의 전투.
이것이야말로 지빌링엔의 장기이며, ‘피 흘리는 흑곰’이라는 이명을 가지게 된 이유가 아니던가.
미안하지만 적장은 최악의 수를 뽑았다. 가능하다면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대로 싸우다 보면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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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슈토르히를 멈춘다. 루트비히에게 전령을 보내줘.”
“네에, 콘도티에레!”
나는 전황을 보고 판단했다. 지금은 잠시 활짝 폈던 날개를 접을 차례라고.
단시간에 적을 너무 많이 무너뜨리고, 너무 많이 밀어냈다.
엄청난 명중률의 포격을 퍼부었고, 그만큼 많은 피해를 입히며 적 대열의 절반을 꺾어버렸다. 전의를 상실한 적도 포로로 잔뜩 잡았다.
하지만 이는 분명, 전장에 선 아군 연대들에게 큰 부담을 준 행위이다.
어쩌면 무난하게 소모전으로 들어가버리면 전력면에서 열세인지라 무난히 밀려버릴 수 있어서 선택한 극약처방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최전방에서 계속 싸워온 아군의 3개 연대, 즉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 드 누아 북부 연대, 네그라타 연대는 모두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반격의 축이 되었던 네그라타 연대는 특히나 피로가 심할 것이다.
분명히, 방금 슈토르히가 측면을 받쳐준다는 것을 전달하자마자 뿜어낸 저력은 놀라웠다.
전선이 안정된 줄 알았더니, 어디서 힘을 아끼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전진하며 적을 밀어냈던 것이다.
적이 아직 혼란스럽고 산개 대형으로 싸우는 근접 병력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착안, 밀도 높은 창벽들을 일시히 진출시키는 전술이다.
실질적으로 전진한 거리는 몇 미터 되지 않는다. 짧으면 다섯 걸음, 멀면 열 걸음이나 될까.
하지만 서로 대열을 짜서 마주보며 힘싸움을 하는 전장에서, 이 정도는 물러날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부대가 궤멸할 정도의 치명적인 거리이다.
그 효과로 간신히 버티던 적의 전방 중대가 몇개나 붕괴해버리고, 잠시 아군을 타격하는 듯 하던 적의 근접 병력이 퇴각해버렸다.
뭐 여기는 따로 파견한 크레시미르의 돌격대가 엄청난 활약을 한 모양이지만.
뒤이어 이를 비스듬히 밀고 들어온 슈토르히 연대까지.
이대로 적진을 찌부러트려 반포위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분명 지금 슈토르히 연대는 한참 쉬어서 그런지 힘이 남았고, 가까이 오는 적을 모조리 찢어발겨 버리는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쭉 진격시켜도 될 테고, 지쳐버린 적의 예비대 한 두개 연대 정도는 얼마든지 격파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적을 섬멸하고 완전히 이기는 것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1개 연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음··· 어쩌면 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지쳐버린 주 방어선을 지탱하는 3개 연대를 위해서라도 슈토르히는 측면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적 기병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프리스마라는 아까처럼 마음대로 적의 후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이대로 이기는가 싶었는데··· 조금 아쉽네요 콘도티에레. 슈토르히도 불만이 많을거예요.”
“지금은 확실하게 이겨야 하니까.”
첼레스티나가 아쉬운듯 말한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슈토르히의 목소리일 것이다. 모처럼 전장에 풀어놨나 싶더니, 날뛰어보지도 못하고 묶인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아직 자신의 힘을 인지하지 못했던 어린 거인이 깨어나리라 기도하고 있다.
분명 다음 이변은 그들이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아마, 슈토르히는 그 때 다시 한 번 마음대로 날뛸 기회가 오겠지.
조금만 참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