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8.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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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크르륵!”
적이 휘두르는 성가신 폭이 넓은 외날검을 피해 흉갑 위로 드러난 목에 검을 꽂아 넣는데 성공했다. 적이 피거품을 뿜으며 주저앉는다.
적의 무기는 정말로 성가시다. 잘못 부딪치면 이쪽의 칼이 휘고, 그 힘을 잘 빗겨내지 못하면 기세 그대로 머리나 어깨를 다친다.
제대로 흉갑을 갖추었으면 모를까, 가벼운 가죽 코트만 걸친 드 누아 엽병들에게는 버거운 공격이다.
드 누아 연대의 엽병 중대장, 사페리 드 네르툴루는 깊은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핀다.
“흐아압!”
“죽어라 개자식!”
“크흑, 악!”
그의 부대, 드 누아 영지군 특유의 엽병 중대는 연대의 좌측면을 호위하고 있었으며, 지금 치열한 백병전의 와중이다.
난감한 일이다. 엽병들은 대부분 드 누아의 산지기 출신이다. 일년의 대부분을 숲에서 보내는 거칠고 자존심 강한 남자들이다.
이러니 왠지 자신들과 비슷한 무장, 비교적 가벼운 갑주에 화기 및 백병전 무기로 무장한 경보병 집단의 공격에 악에 받힌 듯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소 미숙할지라도, 사페리 또한 전장에서 뼈가 굵은 중대장이다.
이게 연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호하게 적을 몰아내고, 방어선을 새로 그어야 할 텐데, 워낙 격렬하게 백병전으로 맞서다보니 그게 되지 않는다.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백병전이 거듭될수록 연대 전체가 가지는 공격의 기세는 둔화되는 것이다.
마침 기회를 잡고 적을 몰아붙이려 하는데, 그 중앙부라고 할 수 있는 드 누아 연대가 이렇게 둔해져 버리면···.
모처럼 좌측 끝에서 공세를 이끌고 있는 네그라타 연대의 용병들에게도 면목이 없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병력을 분리시키고 다시 대열을 정돈할 수 있을까?
지휘관으로서의 미숙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부하들을 이끌고 적의 화선에 서라거나,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라는 명령이라면 망설임없이 할 수 있다.
드 누아의 아들들 중에 그 따위 걸 두려워 할 놈은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 중대 구석구석 자신의 명령을 전하고 무너진 대열을 새로이 만드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원래부터 산개 대형으로 싸우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엽병이고, 지금처럼 대열의 일부로 싸우는 것도 훈련은 받았지만 결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니까.
“우선 적을 몰아낸다!”
“옛!”
당연하게도 쳐들어온 적은 우선 격퇴해야지. 적어도 여기서 밀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중대장! 사페리 중대장님!”
“뭔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연대에서 가장 젊은 장교중 하나가 헉헉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악을 쓰면서.
“무슨 일인가? 전령이 도착했나? 새로운 명령?”
“헉헉, 그게 아니고···.”
그렇게 숨을 헉헉대고 땀을 흘리면서도, 얼굴은 대단히 놀란듯 창백하게 질려있다.
“...작전 지시를 하신다고 잠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누가··· 왜 전령을 보내지 않··· 앗!”
전투중인지라, 다소 얹잖은 감정을 보이던 중대장 사페리는 뒤를 돌아보고 그제야 알았다.
후방에 통상적인 연대 예비대 외에, 또 다른 병력이 다수 보인다.
분명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사령부에 있어야 할 텐데···.
“코, 콘도티에레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다.”
“네, 넷! 중대장님.”
사페리는 전투 지휘를 잠시 소대장들에게 맡기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전투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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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
최전방에 조금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화약 냄새가 이렇게나 심하게 난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후방이다. 어지간해서는 적방에서 튄 눈 먼 총탄이 날아오는 위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전장 전체를 컨트롤하기 위한 드 레뮤즈 지휘부에 있었던 것과, 아군 보병 부대의 후방에 딱 붙어있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헤헤헤···.”
“정신 차려 첼레스티나, 이제 시작이야.”
“헤헤헤! 네에, 콘도티에레.”
포병 관련으로 오늘따라 바쁘게 움직였던 첼레스티나는 곁에 바짝 붙어있다.
프리스마라 기병대가 스크린을 쳐 주는 동안, 아무것도 없던 좌익에 엄청난 속도로 포대를 끌고 가 방렬한 것은 전부 첼레스티나의 솜씨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길치와 바꿔 얻게 된 엄청난 공간감 덕분인지, 첼레스티나의 완벽한 위치 선정은 단일 포대 하나하나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한다.
거기에 평소에는 은근히 잘 해 주면서도 몰아붙이는 것을 잘 한다.
정확히는 병사 개개인에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놀랍도록 뛰어나다고 해야 하려나.
말하자면 행정보급관 느낌의 지휘 스타일인데, 덕분에 포대 방열은 평소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첫 포격부터가 중구난방이 아니라 확실히 통제된 관측 포격이었다.
물론 급박한 상황이라 포 별로 순서대로 한 발씩 쏘는 탄착 관측 수정은 할 수 없었지만. 심지어 적도 계속 움직이는 상황이고.
그래도 같은 구경을 가진 포대 단위로 쏘며 확률적으로 명중탄을 기대하는, 나름 효율적인 통제였다.
이게 진정한 첼레스티나의 포병 지휘관으로서의 기량을 보여주는 엄청난 점이겠다. 엘랑키아 전체를 뒤져봐도 이런 포병 지휘관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특히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포대의 지휘권을 놓지 않는다.
큰 전투에서 전장에 화승총은 수천 자루, 많으면 일만 자루 이상이 동원되지만, 그래도 화포는 수십문 정도가 고작이다.
그만큼 한 발 한 발이 가지는 무게를, 그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뭐 알고는 있어도 역량이 부족하면 통제를 할 수가 없지.
포대 규모가 다소 커서 일부 위임을 맡기더라도, 큰 맥락 안에서는 결국 첼레스티나의 손바닥 위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 1분 남짓한 초반 포격이 적의 측면을 완전히 찢어 발겨 구멍 투성이로 만들었으니···. 대열을 갖춘 연대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버린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시작된 공세,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콘도티에레··· 그런데 라몽 백작님 괜찮을까요오···.”
“음 그러게 말이야.”
사실 나도 걱정이다.
‘나는 허수아비니까, 허수아비 이상의 역할을 맡아야 할 때가 되면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군사적으로는 유능한 참모인 아인멜츠를 곁에 남기기는 했으니, 내가 측면을 잘 통제하는 한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라몽 드 레뮤즈 백작 본인의 건강이다.
평소처럼 창백하고, 평소처럼 땀을 뻘뻘 흘리는 윤기 없는 얼굴.
아니다, 평소보다 더 창백하고, 평소보다 더 땀을 뻘뻘 흘리며 표정도 더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라몽 백작을 괴롭히는 병마란 어떤 것일까. 나는 현생이나 전생이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 안타깝지만 공감을 할 수 없다.
라몽 백작은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자존심도 강하고 책임감도 강한 인간이다.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말에 의하면 마음과 몸 모두에 병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일부러 전장까지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 때문이다. 자신의 치부를 나에게 일부 공개하면서까지 지휘를 맡긴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또 그런 사람이 여기까지 와 놓고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평소보다도 극심한, 상상도 못할 고통 때문이겠지.
허수아비처럼 서있을 뿐이지만, 그것 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인가.
“콘도티에레! 네그라타와 드 누아 연대가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어요.”
“그렇네. 크레시미르에게 전령! 타이밍은 맡긴다, 이상!”
“네에, 크레시미르에게, 타이밍은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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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에 가뜩이나 덩치가 큰 남자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오늘 고프릭은 후위인가?”
“예, 예예, 크레시미르 중대장님.”
“방패에 곰돌이가 거의 지워졌네. 새로 그려줘야겠어.”
“어휴, 또 지워질텐데요···.”
남달리 산처럼 커다란 덩치임에도 우물쭈물하는 고프릭의 모습에 슈토르히 돌격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아군이 길을 내주면, 길게 뚫고 나가 비스듬히 적 구원군의 핵심부를 타격한다. 이번에는 다른 슈토르히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까 좀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몰라.”
크레시미르는 바닥에 끄적끄적 칼집 끝으로 그림을 그려 부하들에게 설명한다.
“저 놈들은 라솔도 타라트라바도 아닌 놈들이라고 한다. 용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의 총기와 무거운 검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검보다 무겁습니까?”
“글쎄, 상식적으로 그런 놈들이 있진 않겠지. 그래도 한 대 맞아보고 감상을 말해주면 좋겠군.”
다시 돌격대 사이에서 웃음이 퍼진다.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날이 선 폭풍전야의 휴식.
지금까지는 어떤 점에서는 돌격대는 안전한 임무만 받아왔다. 물론 최선두에서 적진을 뚫고 나가고, 똘똘뭉쳐서 버티는 등 힘든 싸움이긴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돌격 전까지는 슈토르히 본대에 의해 보호받았고, 적 입장에서는 주력이 아닌 ‘성가신 이물’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집중공격을 당하진 않았다.
“적 숫자가 천명이 훌쩍 넘는 것 같은데··· 우리만 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네그라타나 드 누아 보병들이 싸우고 있으니 우리가 죄다 맡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나머지 슈토르히 본대는···.”
크레시미르의 칼집이 크게 원을 그리며, 바닥에 살짝 일그러진 타원을 그려낸다.
“우리보다 더한 피의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무거운 이야기. 부하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느끼며, 크레시미르는 혀를 찼다. 전투 직전에는 유쾌해야 하는 법인데.
“뭐, 오늘 전투가 얼마나 격렬할지는 모르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적이 바로 무너질수도 있고, 반대로 아군이 무너져 우리만 죽어라 고생할수도 있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다.
“하지만 이거 알고 있어라. 지금 우리 바로 뒤에는 콘도티에레가 있다고. 여기를 우리 투입지로 찍은 것도 콘도티에레가 직접 한 거야!”
“오오···.”
역시, 콘도티에레의 이름은 효과가 있다.
“나도 불안한 건 아니지만, 내 판단과 콘도티에레의 판단을 비교하면 누구를 믿을래?”
“콘도티에레!”
“이 자식들,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라! 아무튼 뭐 나도 그러니까.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나는 이번에도 좀 버티다 보면 어느새 이겨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희도 그렇지?”
이번에는 대답이 중구난방이었지만,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느낀다. 아니, 잠시 후부터 방패를 앞세워 적진으로 뛰어들 전사들에게 부드럽다는 표현은 조금 그렇지만.
어쨌든, 전투 준비는 된 것 같다. 때마침 전령이 오는 모습도 보인다.
“전령! 콘도티에레께서 보내셨습니다.”
“내용은?”
“타이밍은 맡긴다, 이상!”
“오오오오오!”
전령의 말을 들은 돌격대 병사들이 함성을 울린다. 모두가 기다리던 그 명령이다.
“딱 마음에 드는 명령이군. 시행하겠다 전하게.”
“옛, 중대장님!”
“우리는 가자. 후위도 잘 따라오라고?”
모두가 잠시 기대두었던 방패를 들어올려 손목에 고정하는 요란한 소리가 일제히 울린다.
유난히 두껍고 단단하며, 쇠를 발라 거리와 각도에 따라서는 총탄마저도 튕겨낼 수 있는 원형 방패.
거기에 힘을 실어 갑옷도 부술 수 있는 검이 돌격대의 장비이다.
각종 화기를 사용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비전투 기간에 콘도티에레와 상담하며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해봤으니까.
권총과 소총은 물론, 실험적인 수류탄 따위의 무기도 사용해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화기는 동료 부대를 믿는다.
엄호를 받아 가장 신속하게 목표로 돌진할 수 있다면, 심플한게 가장 낫다.
적진 안에 파고든 상태라면 검과 방패, 그리고 압도적인 백병전 숙련도라는 강점이 빛을 발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터엉!
크레시미르가 방패와 검날을 두들겨 소리를 낸다.
터엉! 터엉! 터엉!
돌격대 부하들도 같은 행동을 한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이웃 연대 예비대가 깜짝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가 울린다.
“간다! 우리 위치로!”
“가자아!”
“돌격! 나를 따르라!”
“돌겨어억!”
언제나처럼, 크레시미르가 선두, 적진을 향해 뻗어가는 창의 끝이 된다.
드 누아 연대의 엽병들이 슬쩍 열어준 출구를 향해 돌격대가 쏟아져 나간다.
“뭐, 뭐야 이 자식들?”
“우아아악!”
터어엉!
무기를 휘두를 필요조차 없이, 준비되지 않은 적에게는 온 힘을 다한 몸통 박치기로 충분했다. 이걸로 날아간 적은 한동안은 일어서지 못하고, 어쩌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우리 애들 괴롭히지 마라!”
크레시미르가 그대로 검을 찌르며 외친다.
돌격대의 첫 임무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