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7.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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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이야압!”
끝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폭이 넓은 외날검을 든 알시라스 해군 육전병이 함성을 지르며 아직 하얀 화약 연기로 자욱한 전장을 가로지른다.
타앙!
“크읏!”
황급히 장전을 마친 드 누아 총병이 견착할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진다.
“크아아아앗!”
곧바로 바로 뒤에서 또 다른 해군 육전병이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동료의 시체가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한 손에는 외날검을, 반대편 손에는 권총을 든 육전병이 그대로 도약하며 허공을 날아 오른다.
“흐이익!”
겁에 질린 드 누아 총병이 총을 들어 막으려 하지만, 무서운 기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나동그라진다.
이 광경을 보고 검을 뽑아 든 드 누아 군 장교가 다가서자, 육전병은 망설임 없이 권총을 뽑아 배를 향해 발사한다.
삽시간에 총병 한 명이 전투불능에, 장교까지 사망한 드 누아 군의 일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본래 드 누아는 격렬한 기질을 가진 거친 땅의 영지이다.
최근 훈련을 통해 창병과 총병을 동원한 질서정연한 전투 방식을 익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한 세대 전의 전투 기술을 가진 기사와 그 종사 출신들이다.
때문에 알시라스 군이 이처럼 무질서하고 야만적인 공격을 가해오자, 무질서함으로 맞서게 되는 것도 어느정도는 당연했다.
거기다 이들을 지휘해야 할 장교마저 사망하자, 많은 수가 백병전에 맞지 않은 무기를 버리고 검과 도끼, 철퇴 등 손에 익은 무기를 뽑아든다.
“죽여! 저새끼 죽여!”
“으으윽, 크아악!”
“살려 보내지 마라!”
창과 총 대신, 보다 짧고 치명적인 무기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나뒹구는 백병전이 크게 번지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알시라스 측의 계획대로 되어 가는 것은 분명하다.
“잘 하고 있구나! 좀 더 밀어붙여라!”
“옛, 대장!”
“육지 놈들 정신을 못 차리겠지?”
알시라스 왕국의 왕제, 즉 국왕의 동생인 타론 미아고 라살은 직속 병력으로 독특한 보병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해군 육전대이다.
알시라스는 바다와 인접한 소국이다. 아마 많은 섬과 만, 그리고 배후의 복잡한 산악지대가 없었다면 진작에 라솔에 병합되었으리라.
같은 왕작을 가진 국가이면서도 군신관계. 알시라스 국왕이 라솔 국왕의 봉신이라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복잡한 역사 관계를 알려준다.
이는 라솔이 알시라스 왕국을 병합하려고 했으며, 결국 패배하고 굴복한 알시라스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
한편으로는 반대로, 완전히 병합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으며, 반독립국의 지위는 물론 왕위까지 유지한 투쟁의 역사 또한 말해준다.
그런 투쟁의 와중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알시라스가 보유한 수많은 함대였다.
왕실의 명령으로 건조된 거대한 전함은 물론, 평범한 무역선이나 재빠른 밀수선까지.
지상에서 이길 수 없기에, 바다로 나가 싸움을 계속한 알시라스의 전통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타론 미아고 라살은 선대 국왕의 사생아이다. 그럼에도 형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었으며,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배를 가질 수 있었다.
드넓은 해원의 전장에서 군인이자 모험가로 성공한 타론은 자신만의 함대를 가질 수 있었고, 독특한 방식으로 훈련한 육전대를 이끌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타라트라바의 요청을 받았을 때, 지원해서 부하들과 함께 육지에 올랐던 것이다.
탕! 타탕!
“큭!”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대열을 유지하고 장전을 계속해! 우리가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어차피 적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 알겠습니다!”
창과 총으로 이루어진 밀집 대형이 결국 적을 몰아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적이 무슨 짓을 하건, 화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창병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방향에서 적이 백병전을 걸어온다면, 적과 접촉한 총병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나머지는 장전을 계속한다.
그리고 대신 싸워주는 아군 어깨 너머로라도 사격을 계속한다. 명중률은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높아지니까.
너무도 당연한 전술이고 충분히 훈련도 받는다.
아무리 기세가 좋은 적이라고 해도, 근거리 일제사격 앞에서는 평등하게 지옥행이다.
아무리 총구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해도, 진짜로 총구에서 튀어나오는 납탄에 면역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어지러운 백병전에 접어든 병력이 꽤 많다는 것은 나쁜 신호였다.
수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전장에서 보병 연대, 혹은 보병 중대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니까.
해군 육전대는 독특한 병력이었다.
일단 그들에게는 창병이 없다. 배 위에서 쓰는 단창은 몰라도,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지상전용 장창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좁은 공간에서 상대의 방어를 갑옷 채로 무너뜨리기 좋은 폭이 넓고 튼튼한 외날검과, 다수의 총기로 무장했다.
그리고 수십 명에서 수천 명까지 협력해서 싸우는 것을 중시하는 지상군과 다른 전술을 사용한다.
적게는 2명에서 많아도 10명 이하, 주로 4명에서 7명 정도가 짝을 이루어 싸우는 작은 국면의 협력전에 능하다.
열 명이 안되는 숫자의 보병일지라도 그 이상의 화력을 보유한 것이다.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총기, 평범한 화승총은 물론, 권총이나 사거리는 짧지만 산탄총까지 일제히 사격하면 그 충격력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화력 지속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극단적인 전술이지만, 해군 육전대에게는 딱 그 한 순간의 화력 우세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 후, 사격으로 적진에 틈을 만들고 공포를 유발시키면, 그 이후는 백병전으로 어떻게든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 위와 해안가에서의 수많은 실전 경험은 해군 육전대를 빛나게 하는 또 한 가지였다.
“하아앗!”
“어억!”
묵직한 외날검에 내려쳐진 드 누아 군 기사 출신 장교가 휘청인다. 당연히 빗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의 공격이 너무나 묵직하다.
철갑옷 덕분에 괜찮았으나, 맨 몸이었다면 아마 왼팔이 잘려 나갔으리라. 그래도 철판 너머로 얻어 맞은 팔뚝이 시큰거렸다.
오랫동안 검을 비롯한 각종 무기를 다루어왔고, 이번 블랑독 성전에 참여하기 전부터도 라솔 군과 싸운 경험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쓰는 검술은 뭔가 특이했다.
묵직한 한 방에 집착하려는 듯한 모습은 제대로 된 공방을 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자신이 싸움에 익숙했거나, 혹은 제대로 갑주를 갖추고 있지 않았었더라면 큰 위기에 처했을 상황이 몇 번이나 왔을 것이다.
일 대 일 결투가 아니니까, 전장에서 협력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들의 공격에는 기분나쁜 점이 많았다.
직접 백병전에서 무기를 부딪쳐 보면 바로 느껴질 정도로, 알시라스 해군 육전대의 강점은 바로 ‘기사’를 상대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말을 탔건, 말에서 타지 않았건 상관 없었다.
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가장 표준적이고 강한 전사 계급.
단독으로 싸울 수도 있고 집단으로 싸울 수도 있으며, 검과 같은 전통적인 무기는 물론 장창을 들고 대형의 일원으로서도 잘 싸운다.
그렇기에 어디에서나 평가 받고, 어떤 군대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해군 육전대는 해전은 물론, 물자 수급으로 표현되는 약탈전에서도 이런 잘 무장된 세습 전사들을 무너뜨리는 전문이었다.
칼 끝에 무게가 쏠려있고, 상대에게 베인 상처를 주지 못하더라도 방어를 무너뜨리는 이들의 외날검 부터가 평범한 기사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난관이다.
물론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혼란에 빠진 드 누아 군 역시 대응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라트라바군이 그 시간을 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창병! 적 창병이 온다!”
“대열 정돈해! 지금 칼싸움 할 때가 아니야!”
한번 백병전으로 무너져버린 대열이, 잠시 쉬다 왔다는 듯 질서정연하고 접근하는 타라트라바의 창벽에 맞서 휘청인다.
“물러서지 마! 죽어도 버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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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이자 실질적인 연대장, 그리고 현재 엘랑키아 군의 좌측 지휘관 대리를 맡고 있는 청년이 탄식했다.
방금까지 쭉쭉 적을 밀어 붙이던 아군 대열이 반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갑자기 대열에 섞여든 괴상한 무리였다.
멀리서 보기에 단순히 라솔 특유의 경보병인가 했더니, 생각보다 규모가 꽤 많았다.
게다가 적의 일제사격을 유발하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우르르 무너져 도망치는 통상적인 경보병과는 달랐다.
오히려 상당한 양의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쪽의 사격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총탄을 퍼부은 후 돌입해온다.
그 기세는 상당했으며, 이런 독특한 싸움 방식에도 익숙해 보인다. 무엇보다 부대 끼리의 연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정도로 숙련도가 높고 연계가 잘 된다면, 밀집 대형을 하고 기다리는 밀집 사각 대형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놈들 싸움 꾼이구만.”
“크레시미르···.”
“어쩔까, 루트비히. 우리가 갈까?”
때마침 참모로서 옆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 선임 중대장, 크레시미르 두브람이 묻는다.
단칼에 거절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루트비히도 잠시 망설인다.
‘슈토르히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쓸거야. 분명 위험한 임무도 있을 테니 너무 서두르지 말아 줘.’
전투 전, 측방 지휘관을 맡기며 슬쩍 전했던 콘도티에레의 지시가 생각난다.
가급적이면 슈토르히는 움직이기 싫었다. 아깝다거나, 위험에 노출시키기 싫다는 논리는 아니다.
현재 좌측방의 유일한 예비대가 슈토르히이기 때문이다.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빠진 자리를 채우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각 연대는 평소보다 넓은 영역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기병인 제31 정찰 연대는 빠져버린 드 레뮤즈 기병대를 대체하기 위해 중앙에 나가있다.
프리스마라 기병 연대도 물론 현재 적의 측후방을 노리며 맹활약하고 있었고.
심지어 포병까지 박박 긁어내 전장에 세운 상황이다. 덕택에 일시적으로 적을 반포위라도 한 듯,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 우세가 끊기는 시점에서 슈토르히가 전장에 있어야 할지, 아니면 후방에 있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역시 대기야. 슈토르히가 나간다면 전체가 나가야 해.”
“그래? 뭐 나야 네 판단을 따르겠지만···.”
크레시미르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루트비히의 판단에 수긍했다.
동격이라면 동격인 선임 중대장. 하지만 이런 걸로 직책 찾고 싸웠다면 연대장이 한참 공석인 슈토르히 연대가 여지껏 유지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선임 중대장끼리는 서로가 신뢰하는 것도 있었고.
“루트비히이이이!”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때린다.
“어? 뭐야?”
“크레시미르으으으!”
“첼레스티나? 첼리스티나가 어디서?”
저 멀리서 첼레스티나가 포가가 딸린 수레 두 개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첼레스티나가 여기는 왜?”
“슈토르히 전투 준비야!”
“뭐?”
말에서 날듯이 뛰어 내린 첼레스티나가, 헐떡대며 말했다.
“콘도티에레가 오실 거야! 슈토르히 선두로 2차 반격 개시라고 하셨어어!”
루트비히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고, 크레시미르가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듯 함박 웃음을 짓는다.
"중대장 크레시미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