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6.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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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누아를 위해서!”
“우와아아아아아!”
드 누아 백작가의 가신 대표이며, 트랑카벨 파견군에 합류해 드 레뮤즈 가문을 돕고 있는 모콜리 드 디망투완 남작은 부하들이 타라트라바 군을 밀어내는 광경을 벅찬 가슴으로 지켜본다.
변경의 백작 가문을 섬기는 시골 남작으로서는, 라솔이 뭔지 타라트라바가 뭔지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굳이 말하자면 구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라솔은 드 누아 가문의 원수라는 것이다.
정작 최근 수 차례나 피터지게 싸웠던 네그라타 용병단은 현재는 트랑카벨 가문 소속으로서 동료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주군인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이스키비르 강 건너의 소영주들과 가깝게 지내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라솔이 싫었다.
라솔 왕국은 선대 드 누아 백작과도 철천지 원수였으며, 결국 현재에 이르러 영지의 절반을 침탈해 변경의 무력한 가문으로 추락시킨 장본인이다.
타라트라바건 라솔이건 상관 없었다.
전장에서 맞서 복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것도 이 전쟁의 배후에는 라솔 국왕이 있다지 않는가!
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탕!
타다당! 퍼버엉! 펑!
“정말 엄청난 기세군!”
“벌써 적 연대를 두 개 째 구겨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질 수 없지! 라솔 놈들은 싫지만, 네그라타 녀석들은 예외다!”
“하핫, 그렇습니다, 남작님.”
한편으로, 드 누아 연대와 방어선을 나란히 하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라솔 계통의 연대, 네그라타이다.
이번에, 콘도티에레로부터 반격의 선봉을 명령받은 그들은 말 그대로 눈부시게 진격하며 적을 연달아 격파하고 있었다.
물론 기습적으로 측면 배치된 포병의 화력 지원을 몰빵 받고, 프리스마라 기병대의 지원 역시 충분히 받으며 흔들릴 대로 흔들린 적을 기습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네그라타 연대의 전격적인 공세가 저평가 받을 것은 하나도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앞장서서 적을 몰아내고, 적의 선형 방어선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드 누아의 공세가 수월해진 면도 있었다.
연대장이자, 가문의 원로인 모콜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드 누아 영지군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지가 반토막 난, 이름만 남은 백작.
언젠가 주군인 가스텔 백작이 자조하며 했던 말이다. 모콜리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심 어쩔 수 없다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군수 보급은 동맹인 트랑카벨 자작가의 지원이 없으면 전혀 충당할 수 없었다.
식료와 전통적인 갑주 등 무장은 어떻게든 한다 해도, 일단 화약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드 누아 가문 자체적으로 화약 수급을 하기 위해 화약 제조를 배우고, 영지 내의 동굴에서 긁어 모은 양질의 초석으로 조금씩 생산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는 영지군 전체가 필요한 화약의 절반은 커녕, 삼 분의 일을 수급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남부와 북부 두 개로 나뉜 영지군 내 정규 연대의 경우에도, 인력 수급이 힘들어 정원인 1천 명을 채우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당장 이번에도 오랜 혈맹인 드 레뮤즈를 돕기 위해 1개 연대를 파견하긴 했으나, 1천 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부 연대에서 병력 일부를 보강해야 했을 정도이고.
게다가 가문이 보유한 총기의 숫자도 너무 적었고, 장창 중에서도 오래된 것들은 표준에 비해 조금 짧았다.
트랑카벨 정규 연대와 동등한 역할을 한다··· 고 주장하고 싶지만 객관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병사들은 훌륭하다.
섬기는 가문을 위해 죽고 사는 낡아 빠진 사나이들.
어떤 열세의 전장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움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들.
아무리 백전연마의 용사일지라도, 총을 쥔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신병의 초탄 사격에 죽어 넘어질 수 있는 전장이다.
규격화 된 밀집 사각 대형을 갖추지 않고서는, 조금도 버틸 수 없는 빌어먹을 전장이다.
때문에 뛰어난 개인의 용기나 무용이 승패를 가르는 시대는 아니다. 그리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이리라.
하지만 일천 명의 용기, 일천 명의 무용이라면 어떨까.
“앞으로! 앞으로오!”
“드 누아! 드누아아아아!”
“큭, 커헉!”
과도하게 적 창벽에 가까이 다가섰던 전방 장교는 기어이 적병의 얼굴에 창을 박았다.
창날이 단단한 얼굴 뼈를 뚫지는 못했으나, 미끄러지며 길게 뜯겨나간 듯한 상처를 낸다.
광대뼈 아래쪽에 큰 상처를 입은 타라트라바 보병이 비명을 지르며 창대를 놓치고 울부짖는다.
허나 동등한 상황에서 무리해서 나아갔다는 것은, 이쪽도 비슷한 수준의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공훈을 세운 장교의 목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왼손으로 상처를 누르던 장교의 몸이 천천히 주저앉는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실수했다··· 멈추지 마 이 놈들아!”
“예엣!”
장교의 얼굴에는 이미 과도하게 적의 창벽에 근접하는 과정에서 입은 작게 베인 상처가 수도 없이 많다. 용맹한 전열 창병의 상징과도 같은, 창 끝이 스친 상처들.
먼 거리에서 적의 얼굴을 정확하게 찌를 정도의 실력과, 과감하게 한 발 더 나아갈 정도의 용기를 가진, 그것도 장교가 무리해서 나서다 중상을 입는 것은 명백한 손해이다.
허나 그 무모한 일격은 공포에 질린 타라트라바 연대라는, 물이 가득 찬 잔에 떨어진 마지막 물 한 방울이었다.
전방 장교란 대열의 모서리를 책임지는 역할이다. 말 그대로 항상 최전방 붙박이라는 소리다.
그런 만큼 위험한 것은 당연하고 동료나 부하들의 신임이 각별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이가 앞장서서 목숨을 던지듯 공격하고, 중상을 입고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분기탱천한 후열의 창병이 곧바로 그 자리를 채워넣었으며, 주변에서는 한층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적을 몰아 붙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반대편인 타라트라바 측에서는, 얼굴을 찔려 오열하는 병사의 빈 자리가 한동안 채워지지 않았다.
당연히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 떠밀려서 최전방에 서게 된다는 두려움.
그게 후열 병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겠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보통 그 병사 한 명 만이 겁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주변의 다른 동료들도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미 패배하기 시작한 전투, 여기서 끝까지 목숨을 버린다고 한들 바뀌는 것이 있을까?
그 잠깐의 망설임이 균열의 시작이 되었으며, 드 누아의 반 걸음 전진이 타라트라바의 한 걸음 후퇴가 되었다.
“대, 대열을 유지해! 도망치지 말라고!”
“멈춰! 겁쟁이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야!”
타라트라바 측 장교들의 외침도 무색하게, 지금까지 완강하게 유지되던 밀집 대형이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푸석푸석해진 흙더미처럼. 서서히.
허나 창병 밀집 대형이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촘촘하고 철저하게 버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느 순간, 후욱 하고 드 누아의 창 끝이 두 개, 세 개씩 몰려들고, 공포에 질린 타라트라바 창병은 고개를 돌리고 뒷걸음을 치고 만다.
“서두를 필요 없다! 한 걸음 더 가자!”
“하앗, 하압!”
“드 누아아아아!”
한편, 자리에 주저 앉은채로 병사들의 분전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처음으로 적병의 얼굴에 창을 찔러 넣은 전방 장교이다.
일단 손바닥으로 상처를 막았으나, 목에 난 상처이다. 끊임 없이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흉갑 위로 작은 물줄기를 이룰 정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장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하는 모습은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니 자신도 분명 그리 되겠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전진하는 부하들을 보고 싶었다.
자신도 저 맨 앞에 설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바보같이 마음만 앞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때 조금만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면, 아니면 아예 투구 채로 고개를 숙였으면.
소용 없는 후회를 하며,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는다.
지긋지긋했던 초라한 고향 마을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해도 할아버지가 고집스럽게 일구던 우중충한 텃밭도, 다시는 볼 수 없겠지.
하지만 무의미한 삶은 아니었다. 최소한, 백작님과 조상님들에게 부끄러운 죽음은 아니라 생각된다.
“손 떼지 마라. 뒈진다.”
“...네?”
“가만 있어.”
부상한 전방 장교의 옆에서 갑자기 하얀 의무대 복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피곤해보이는 얼굴, 눈가에 깊게 새겨진 기미, 까칠한 턱수염.
옆에는 수염만 없다 뿐이지, 비슷한 얼굴 상태를 가진 여자 간호사가 피투성이 앞치마를 하고 깨끗한 붕대 다발을 들고 있었다.
“지금 손 떼··· 허, 너 운빨 좋구나.”
“무슨···.”
“내일부터 주신이든 조상이든 매일 기도 열 번 씩 해라. 뭔가 빌어먹을 게 지켜주지 않았다면 상처가 여기서 멈췄을 리가 없어. 따가워도 참아.”
“어··· 엇? 윽! 앗!”
“움직이지 마. 모가지로 바늘 들어간다.”
군의관은 엄청난 속도로 목에 난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부상자를 치료한 건지, 그 손에는 기술만 있을뿐 감정은 없다.
“다 됐다. 봉합은 잘 됐어. 이걸 뒈지면 그건 주신 탓이지. 전투 끝나면 피 빼내고 필요하면 재봉합 한다.”
“예, 옛···.”
“붕대 받아서 꾹 누르고 있어. 전방 나갈 생각 말고 알아서들 잘 하고 있잖아.”
“예···.”
“전투 끝나고 의무대 찾아와라. 우선순위가 좀 밀릴 수는 있는데, 그래도 뒷처리 해야지. 내 이름은 알체스테 델 나르코다.”
군의관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걷기 시작한다.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붙는다.
“군의관님, 병원으로 돌아가시는 게···.”
“죄다 오다가 죽어나가는데 병원은 무슨 병원! 거긴 다른 양반들이 잘 하고 있으니 괜찮아. 방금 저 친구도 가만 뒀으면 죽었다고.”
“그래도···.”
“위험한 게 싫으면 자네나 돌아가게, 가방 이리 주고.”
“누가 혼자 돌아간대요? 하, 어이가 없네.”
은근히 서로 잘 맞는 군의관과 간호사는 다른 부상병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알체스테 군의관이 방금 전의 공훈자를 간발의 차이로 되살린 순간, 또 하나의 타라트라바 대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드 누아 연대와 교전하던 타라트라바 연대는 이제 거의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병력이 전멸한 것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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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누아 연대에게 쾌승의 진격을 허용한 순간, 이를 마주하고 있던 타라트라바 연대의 지휘관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병력은 이 지역만 따져도 자신들이 1.5배 이상 많다.
그런데도 밀리고 말았다. 그것도 최전방 여기저기에서 창병들이 적에게 밀려 넘어지는 처참한 꼴을 보이면서까지 말이다.
창병이 적에게 밀려 넘어지는 것은 당연히 치욕이다.
단순히 병사 개개인의 치욕일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 처하도록 병력 보충이든 후퇴든 지시하지 않은 지휘관의 치욕이기도 하다.
이건 자신의 탓이 아니다.
분명 이웃 연대가 먼저 무너져 빈 공간을 만드는 바람에, 두 방향에서 압박 받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한 적 연대는, 숫자는 적었지만 맹렬한 기세로 덤벼왔다. 정상의 범위를 벗어난 미친 놈들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적은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창 끝도 장전된 총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전방에서 이 따위 보고가 올라왔었다.
그러니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원인 분석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의 연대가 풍전등화에 이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는 타라트라바 군의 절반 쯤 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못 막았다가는 밀리다 못한 날개가 완전히 뚝 하고 끊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연대장 양반, 우리가 왔다!”
“엇?”
“엇이 아니지, 다음은 우리 알시라스 해군육전대에게 맡겨라.”
연대장은 경악한 눈으로 뒤에서 들린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간소한 흉갑과 투구만 걸친 모습에 옷 위로 보아도 근육질이다. 건강해보이는 구릿빛 얼굴에는 오만방자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아, 알시라스 왕제 전하?”
“잘 알고 계시군. 뭐 공인받지 못한 천출이니까, 너무 예의 차리진 말고.”
여유있는 태도로 빙긋 웃은 남자는 부하들에게 몸을 돌린다.
특이하게도, 보병 부대인데 창병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화승총과 권총이 무척 많이 보이고, 폭이 넓은 구시대적인 곡검을 든 모습.
“지금 이 부대 뒤에는, 적 마지막 예비대가 있지. 저 부대까지 마저 깨부수면 완벽한 아군의 승리다! 알시라스의 칼 끝에 승리가 있다!”
“알시라스의 칼 끝에 승리가 있다!”
알시라스 해군 육전대라 칭한 자들이 타라트라바 보병들이 밀려난 전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