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5.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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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앙!
“크윽!”
양군 합쳐서 2만 정이 넘는 막대한 양의 총기가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앞을 다투어 발사되는 전장,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적지 않은 수는 자신이 들은 총소리를 뿜어낸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고.
하지만 이 총소리와 신음 소리는 조금 특이하다.
총소리는 유난히 탁하고 길다. 때문에 주변에서 나는 총소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음으로, 이 신음소리는 총을 맞은 쪽이 아닌, 총을 쏜 사수 쪽에서 낸 소리이다. 발사 직후, 몸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총의 반동을 받아내며 앙 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 나오는 소리.
“...어이 자네 괜찮나?”
“나는 괜찮소.”
“안 괜찮아 보이는 데? 어휴 붕대가 피에 젖었잖아! 붕대라도 새로 감아! 이봐, 여기 좀 봐줘!”
“괜찮다지 않소!”
“거 고집 시발! 형씨 덕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라도 그냥은 못 보겠어. 제 발로 갈 거요, 억지로 끌려 갈 거요?”
“...알겠소.”
방금 총을 발사한 남자는 투덜대면서 총을 세우고 일어선다. 그가 가진 총은 남들보다 훨씬 길어 보인다.
총구에 개머리판에 새겨진 문양만 보아도 일개 졸병이 쓸 법한 평범한 무기는 아니다.
남자가 비틀거리자 옆에서 종자가 얼른 총을 받아 들고 남자의 몸을 옆에서 받친다. 누가 보아도, 양 팔에 붕대를 둘둘 감은 남자의 몰골은 정상이 아니다.
“나으리, 진물이 흘러 나와서 총에 묻을 지경입니다요···.”
“...새 붕대 있나, 그롬콜리?”
“예, 나으리.”
이 두 사람은 잠시 후방으로 이동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라솔 군 우노스 연대의 병사들이다.
찬탄하는 눈빛이 절반, 안됐다는 듯한 눈빛이 절반. 실로 부상한 전쟁 영웅을 보는 눈빛이다.
병사들에게 전쟁 영웅이란 실로 각별한 존재이다. 자신들의 역할을 상당 부분 덜어주며, 죽을지도 몰랐을 목숨을 건져주는 존재.
그건 라솔 군 전체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인 우노스 연대의 병사들일지라도 그렇다.
“끄으으윽···.”
“어휴, 나으리··· 이러다가 팔을 못 쓰게 되겠는데요···.”
“오늘 하루만 버틸 수 있으면 상관 없어.”
찌이익, 붕대를 벗겨내자 화상으로 엉망진창으로 짓무른 피부가 드러난다. 피부에서 흘러나온 진물로 붕대는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한 뼘 한 뼘 벗겨낼 때마다 피부 조직이 붙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다름아닌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와 그의 종자 그롬콜리이다. 마르사코르 언덕 전투에서 살아남은, 성전군의 잔당.
전 병력의 대부분이 퇴로를 차단한 불에 타 죽거나, 쫓아온 적에게 잡혀 죽은 처참한 패전에서, 다행히 두 사람은 살아남기는 했다.
하지만 나브리치오는 양 팔을 비롯한 상체 대부분이 큰 화상을 입었으며, 그롬콜리 역시 그보다는 덜 해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어휴··· 어휴 이걸 어째··· 어휴···.”
소름끼치게 질척질척해진 붕대를 버리고 깨끗한 새 붕대를 꺼낸다.
퀭하니 큰 눈과 불성실해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그롬콜리의 손은 세심하게 움직인다.
“나으리, 할 만큼 했는데 이제 오늘은 그만 하시면 안됩니까? 아까 엘랑키아 장교들 머리통을 몇 개나 날려 버리시지 않았나요?”
“보면 알잖나. 그 자들은 제대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라솔 군 기세가 대단합니다. 그냥 둬도 이겨주지 않겠습니까요.”
“블랑독 놈들이 막판에 얼마나 무서운 모습을 보이는지 잘 알잖아. 분명 예상대로 되어가지는 않을 거다.”
“에휴···.”
붕대가 짓무른 피부를 덮을 때마다 움찔거리면서도 신음소리하나 내지 않는 나브리치오의 눈에는, 대단한 열정과 분노, 지성과 광기가 동시에 빛나고 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롬콜리가 현재 이 남자를 따르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주는 고용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사선을 넘어가며 이 기묘한 남자에게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위 성직자, 그것도 추기경의 보좌 주교를 친형으로 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몸이면서도 전장을 돌며 저격에 집착하는 남자.
대충 어깨너머로 배운 사격술로 밥벌이나 하던 그롬콜리에게 계속 보고싶은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잘 설명은 못하지만.
“다 됐습니다, 나으리. 이번에는 좀 조심해서 쓰시죠.”
“고맙다, 그롬콜리. 그럼 가자.”
“네, 나으리.”
붕대를 교체한 두 사람은 다시 총을 들고 전방으로 향한다.
현재 두 사람에게는 유난히 긴 저격용 화승총 한 자루 밖에는 무기가 없다. 나머지는 마르사코르의 불지옥을 탈출하면서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브리치오는 현재 장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팔 상태가 좋지 않다. 어차피 그롬콜리가 장전하고 나브리치오가 조준한다. 총은 한 자루면 충분했다.
“자네들 왔나! 안그래도 우리 부대도 곧 이동할 차례야.”
전방으로 돌아오자, 붕대를 바꿔 오라고 보냈던 라솔 군 총병 지휘관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어찌됐던, 이 주디칼리 출신의 기묘한 콤비는 적장을 몇이나 저격하는 데 성공하여 단기간의 집중 돌파를 성공하게 한 인물들인 것이다.
“이동? 어디로 갑니까요?”
“중앙으로! 자네들이 블랑독인가 하는 지역 놈들을 죽이고 싶어 했었지? 소원 풀게 생겼네.”
“허어, 정말입니까?”
“그래. 앞으로도 그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부탁하네. 그리고 꼭 살아남으라고, 변경백께 포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나.”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블랑독이라는 말을 들은 나브리치오의 눈이 살짝 커지며 갑자기 살기를 떠올린다.
붕대 투성이 손에 들린 총을 내민다.
“그롬콜리, 장전을 부탁한다.”
“넵, 네엡!”
어차피 할 일은 한 가지이다. 남들보다 멀리서, 남들보다 정확하게, 남들보다 중요한 표적을 쏘아 맞춘다.
큰 실패를 겪어서 그런지, 큰 부상을 입어 조작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이상하게 나브리치오의 저격술은 엄청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가 혼자 돌파를 해낸 것은 아니지만, 단기간에 수 명의 전방 장교들을 저격하면서 엘랑키아 군의 붕괴를 유도한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부족했다.
최후의 최후에 그 가늠자에 올라올 표적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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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레뮤즈 보병 연대에서 예비대를 모아 우익 방향으로 보내겠습니다. 트랑카벨 제10 연대가 위험해 보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옛, 에트 참모장!”
“예비 포병도 일부··· 아니 전부 보내주세요. 얼마 안 되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령부가 응원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포병의 지원을 덧붙여 아인멜츠의 제안을 승인했다. 아인멜츠가 부지런히 드 레뮤즈 가문의 장교들을 모아 병력 차출을 지시하고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전황은 두 종류의 극과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내가 보낸 2개 연대,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는 막강한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믿고는 있지만 아인멜츠의 말대로 위험할 지도 모르지.
병력을 더 보냈어야 했나?
···차라리 슈토르히를 보냈어야 했나?
아니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랬다면 좌익의 성공적인 공세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서로 거리가 있는 두 전선 모두를 팽팽하게 유지하는 대신, 하나에 강점을, 하나에 약점을 두는 선택이었다.
양쪽 모두를 간신히 버틸 정도로 유지했다가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패배하고야 만다. 그것도 전군의 1/3을 넘는 서부군이 저 꼴이 되어 패주한 지금에서는 말이다.
반격의 여력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게 저 제10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 병사들이 부당한 불벼락을 뒤집어 쓰는 선택이 되었을 뿐.
그들이 위험을 무릅써 주고 있는 덕분에, 좌측의 아군은 완전히 반격에 성공하고 있었다.
선봉의 네그라타 연대는 적 연대 하나를 완전히 붕괴시킨 후, 두 번째 연대도 밀어 젖히고 있었으며, 다른 연대들도 천천히 계획에 맞춰 적절한 속도로 전진한다.
마치 거대한 빗자루질로 적군을 한쪽 측면에서부터 밀어 버리듯, 대열 전체가 서서히 적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군은 미리 준비된 계획에 의해 적을 밀어내고 있지만, 적은 자신들이 밀리는 것이 계획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으며, 누군가는 너무 빨리 빠져 측면에 드러나고, 또 측면이 드러나 빠지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며 대열 전체가 약화되고 있었다.
그 틈으로 프리스마라 연대가 파고든다. 마치 소부대 하나 하나가 연대장의 지휘라도 받는 것처럼, 작게 쪼개진 이 기마 용병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무리해서 적 대열을 파고 들지는 않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놓치는 법이 없다. 밀려나느라 대열이 마구 뒤섞이거나, 낙오된 소부대들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잡아 먹는 것이다.
숫자가 적이 많고, 위치적 이점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이게 가능하다는 것은 아군의 역량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정말 대단하다, 우리 병사들은.
‘타라트라바 군, 중견 장교급 취약한 것으로 보임’
현재 좌측 방어선을 지휘하고 있는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의 보고였다. 직접 맞붙어 싸우다 보니 그게 보였던 모양이다.
중견 장교급이 취약하다는 것은, 연대들이 창설된 지 얼마 안 됐다거나, 부대가 소집된 지역의 정권이 불안정해 장교를 시킬 만한 재원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위, 아래가 일치 단결한 블랑독 지방에서 훌륭한 신임 장교가 수도 없이 나왔던 것의 정확히 반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라트라바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더니, 그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병력 공출 요청에 불안한 가문들은 핵심 중견 장교들은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어찌됐던, 전선 하나는 위험하고, 전선 하나는 승리를 거두고 있다.
이대로 좌측의 공세를 진전시키면, 분명 우측을 공격하는 적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콘도티에레, 제10 연대의 기즈 드 콜롬브 연대장께서 보내신 전령입니다!”
“기즈 경이? 무슨 내용인가?”
“전방에 새로운 적 연대 출현, 이동 방향으로 보아 서부군을 공격했던 선봉 부대로 보임! 이상입니다!”
“...알겠다. 혹시 지원 요청은 있나?”
“그 외 전언은 없습니다, 콘도티에레!”
“알겠네. 수고했다.”
기즈 경은 트랑카벨 정규 연대의 연대장들 중,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다.
부하들을 헤아리고 각자의 강점을 찾아내는 데 뛰어나 트랑카벨, 드 누아, 드 레뮤즈 세 가문의 군대를 다 훈련시켰던 경험도 있다.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지만, 대단히 견실하고 모범적인 깔끔한 운영이었던 것은 기억에 남는다.
그런 특이한 이력의 사람이니 전장을 보는 눈도 남들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저, 앞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마 강적으로 보인다는 담담한 보고.
위급하다는 비명도, 패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전혀 섞이지 않은 사실 그 자체만이 전령의 입을 통해 도착했다.
자신은 명령받은 지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금부터 온 힘을 다해 이 지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적이 몇 배가 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보고는 담담한 사실만이 올라오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이를 통해 명확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적장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밀리기 시작한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예비대를 퍼붓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텨줄 것을 기대하며, 오히려 전력은 반대편에 꽂아 넣는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본진을 노리며, 자신이 파멸하기 전에 적을 파멸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병력 운용.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포기하고 전선 유지에 집중 할 것인지, 성공한 돌파를 계속해 적의 전술을 똑같이 받아 쳐 줄 것인지.
···이제 와서는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겠지만.
“조금, 아니 많이 늦었소, 에트 참모장.”
순간, 낯익지만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다.
“배, 백작님? 라몽 백작님? 여긴 어쩐··· 아니, 괜찮으십니까?”
“싫은 장소이지만 나와 볼 수 밖에. 어떤 일이든 고용인만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니.”
지난 밤, 혼절했다고 들었던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갑주를 포함한 정장을 걸치고, 말에 올라있었다. 옆에는 늙은 집사, 드레피니가 조심스럽게 고삐를 쥐고 있다.
나는 라몽에게 고개를 숙인 후, 실례를 무릅쓰고 드레피니에게 묻는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러실 겁니다··· 아마도.”
그러나 이 늙은 집사 역시 목소리는 좋지 않다. 내가 보기에도, 여기까지 말을 타고 걸어왔을 뿐인데 허연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다.
“어차피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니, 허수아비 역할로 적격이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라몽 백작이 특유의 비틀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허수아비니까, 세워 놓고 어디를 다녀 오든 하시오. 여기는 이 허수아비와, 아인멜츠 경이 어떻게든 할 테니.”
백작이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