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4.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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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솔 왕국군,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는 공세를 세심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흥분감.
현재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것이었다.
행복감이 치솟아 마치 금지된 약물이라도 복용한 것처럼, 머리속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
자기가 세운 계획이 대부분 진행되고 있었다. 사소한 실패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주 계획은 완벽하게 이어지고 있다.
자기가 생각했던 적의 약점은 실제로도 약점이었다.
자기가 생각했던 성공적인 전술은 실제로도 성공적이었다.
벌써 10년 이상, 언젠가 국경을 넘어 엘랑키아 영토로 진격해 상승장군이 된다는 소설과도 같았던 계획을 차근차근 실제로 진행하고 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네 검천사가, 어설픈 엘랑키아의 방어선을 찍어 누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변경백 가문의 사재를 털어 키우고 있었으니, 문자 그대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게 다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노력은 헛수고가 아니었으며, 자신의 계획은 망상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작은 엘랑키아 마을 주변의 개활지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역사서의 한 장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엘랑키아 본토 내에서 적 야전군을 섬멸하고, 영토 깊이 단검을 꽂아 넣은 라솔의 장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중대 단위의 이동도 세심하게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보를 다루어야 할 참모진 사이에 심한 부하가 걸린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상황이며 이게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효율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라고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힘차게 전진하는 부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흐뭇해 하고 있는 그에게, 전령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변경백 각하! 우측이, 우측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측? 우노스 연대 말인가?”
“아, 아닙니다! 더 우측, 타라트라바 공의 군대 말입니다.”
“으으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본진 후방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은 나지막한 관측소 중하나에 오른다.
망원경을 꺼내 들기도 전에, 이미 확연하게 흉한 몰골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다 이긴 전투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지독하게 감정이 섞인 사령관의 일갈이 참모들과 젊은 전령의 어깨를 움찔거리게 만든다.
명확한 설명을 붙이지는 않더라도, 방금 퀸토 변경백이 말한 ‘멍청한 녀석’이란 다름아닌 타라트라바의 군주, 크루사다 공작이다.
직속관계는 아니고 라솔의 변경백도 결코 낮은 작위는 아니라 할지라도, 전장에서 주장과 부장인 관계인데 분명히 말이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뭐, 이 자리에 있는 소수의 참모들과 전령만 입을 다문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진행이 된 거지? 언제부터 이랬나?”
“2차 공격이 시작된 이후, 적이 타라트라바 군을 끊임없이 공격하기는 했으나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밀리기 시작한 것은 방금 전 부터입니다.”
“흠···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 차근차근 준비를 한 것이 아니겠나.”
“그,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저희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퀸토 변경백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방금 분노하고, ‘망언’을 내뱉은 것에는 크게 후회가 된다. 언급 내용 때문이 아니라, 분노한 이유가 ‘혼자 즐기고 있던 흥이 깨졌다’는 이유로 감정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전 사령관의 핵심은 침착함과 빠른 판단이다. 그게 안 되었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고, 머리는 다음 프로세스를 진행한다.
그의 눈이 빠르게 앞에 보이는 타라트라바 군의 진영, 부정적인 전황을 확인한다.
문외한이 보아도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양측의 병력 규모는 차이가 난다.
그런데 또한 문외한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전선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일단 중앙에서 지루하게 비슷한 힘싸움을 하는 병력을 빼더라도, 적 좌익과 비교해도 원래 타라트라바 군이 더 많았다.
거기에 첫 공격은 후퇴했다지만, 궤멸적인 후퇴는 아니었고 패배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알시라스 출신 병력 상당수가 더 해졌기에 규모는 훨씬 커졌다.
자신이 많은 것을 바랐는가? 그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공으로 합의한 라솔 군, 퀸토 변경백이 자랑하는 네 검천사 연대가 적을 회복 불가능으로 만드는 동안 전선만 유지해달라 한 것 뿐이니까.
심지어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엘랑키아 공작의 군대 등 정규병과 달리, 타라트라바 군의 상대는 출신도 모를 용병대가 아닌가!
무리한 공격을 할 필요도 없이 상황만 유지해주고 있었다면 자신들이 승리를 가져다 바쳤을 것인데···.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뭔가 대응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타라트라바는 자신의 동맹군이고, 크루사다 공작은 명목상 전투의 주장이며, 또한 부족한 기병을 천 명이나 빌려준 고마운 상대이기도 하니까.
현재 타라트라바 군의 상황은, 가장 우측인 전장의 끝, 오른쪽 날개가 부러진 새의 형색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듯하거나, 숫자가 적어 수비적이어야 할 적 쪽으로 굽어 있어야 할 전선이 이쪽으로 쑥 들어와 있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다.
그나마 그 전선이 매끄럽고 효율적인 호선을 이루고 있다면 괜찮다. 아직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전진과 후퇴는 항상 있는 일이고, 과하지 않은 한 어느 쪽도 불리한 신호는 아니니까.
치열한 전투 중 한쪽 날개를 접어 적의 기세를 흘리거나, 힘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일이야 항상 있는 일이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타라트라바 군의 우측은 완전히 어그러져, 상대 힘에 당해 간신히 버티며 밀려나고 있다는 행색이 완연하다.
특히 우측의 연대들은 전멸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산산히 부서져내렸다. 파편들 중 그나마 큰 것들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며 적의 힘에 밀리는 판이다.
그 주변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적 기병대의 모습을 보자면 언제 숨통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적이 굳이 밀려난 타르타르바 보병의 잔당을 집중 공격해서 쓸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 과정에서 발생할 피해나 전력 공백을 걱정하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우측 끝을 제외한 나머지 타라트라바 군은 어떻게든 대열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무너진 우익으로 병력을 내보내고 전선 수평을 맞추기 위해 후퇴하는 판국이라 위험한 상황이다.
궤멸적인 패주는 실제로 궤멸에 직면해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병사들의 머리속에서 상상한 궤멸이 현실을 잡아먹는 일이다.
그건 무슨 짓을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예비대를 쥐어 짜서 지원군을 보낼까?
이쪽도 예비대가 충분하지는 못해서 불균형만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적절한 위치에 이동할 때까지 그 병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기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빌려왔던 타라트라바 기병 1천여 명을 돌려줄까?
이것도 아니다.
현재 ‘이기고 있는’ 라솔 군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기병의 부족이다.
또한 박살나기 일보 직전인 엘랑키아 군 우익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패잔병일지라도 어찌 됐건 아직 수천은 되는 기병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세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이쪽도 한 번 쯤은 적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기병 전력을 쥐고 있고 싶었다.
지금 그들은 마치 장전된 권총처럼, 당장 사용은 하지 않을지라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도와줄 것이라면 당장 표가 날 정도로 충분히, 확실하게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쪽 라솔 군의 유리한 전황을 팽팽하게 바꾸고, 저쪽 타라트라바 군의 불리한 전황은 그대로인 최악의 상황이 될 테니까.
하지만 전력도 그렇지만, 시간도, 거리도 당장 병력을 보내기엔 무리이다.
망원경을 접어 부관에게 넘긴다.
그렇다면 답은 한가지 뿐이다. 짧게 결론을 내린 퀸토 변경백은 서둘러 관측소에서 내려와 사령부로 돌아온다.
“전령! 우노스 연대에 전령을 보낸다!”
“옛, 우노스 연대로 보내겠습니다. 전령!”
“퇴각중인 적에 대한 압박을 그만하고, 반전하여 공격중인 도레와 테라얀을 돕는다. 맏형의 저력을 보여줘라. 이상!”
“퇴각중인 적에 대한 압박을 그만하고, 반전하여 도레와 테라얀 연대를 도울 것, 맏형의 저력을 보여줘라!”
이미 무너뜨린 적을 압박하는데 전군의 최고 에이스를 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선봉에서 얻은 피해와 피로를 회복하라는 이유로 비교적 쉬운 임무를 맡겼던 것이고···.
라솔 군이 만들어낸 돌파구 주변을 지키는 적군은 제법 맹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사기도 높고 훈련이나 장비 수준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전방 지휘관들 역시 비슷한 보고를 해왔다. 상당히 눈이 높고 자신들의 능력과 연대에 자부심이 있는 그들이 한 보고니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이를 통해 확실히 적은 이 국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유한 최정예를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사령관이 해당 전선에 얼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아주 개관적인 수단이니까.
어쩌면 반대편에서 갑자기 공세를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지.
···기습적인 공세라고 해도 수적으로 배 가까이나 우세하면서도 한쪽 날개를 내 줘 버린 타라트라바 군의 무능함에는 치가 떨리지만.
어쨌든 이 머저리 산골 촌놈들을 구하기는 해야 한다.
그렇다면 적과 같은 방법을 쓴다.
“도레와 테라얀 연대에도 전령을 보내라. 곧 우노스 연대가 도착하니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가끔은 우리도 머릿수로 이겨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변경백!”
적이 아군의 오른쪽 날개를 부쉈다면, 우리도 똑같이 갚아주면 될 뿐이다.
사실 이미 몽파르지에 공작이라는 자가 지휘하는 군은 부숴 버렸다. 전멸을 못 시킨 것은 아쉽지만, 전력을 회복하기 전에 승패를 갈라 버리면 될 일이고.
그리고 적이 긴급하게 대응하여, 완전히 잘려 나갈뻔 한 오른쪽 날개를 간신히 붙들고 있을 뿐.
이를 마저 뚫어 버리고 적의 후방으로 보병 연대, 그것도 이스키비르의 네 검천사를 진출시킨다.
그것보다 확실한 승리의 확인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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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부들 떨리던 병사의 다리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굽어진다. 무릎이 땅에 닿고, 상체가 앞으로 굽는다.
장전을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수직으로 세운 중화승총의 개머리판이 바닥에 닿으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커헉, 쿨럭!”
“야 너 뭐 하는 거야? 물러나! 너 시팔, 아까도 한 방 맞았냐? 니가 무슨 불사신이야?”
“콜록, 콜록! 잠깐 쉬면 나으니까요··· 커헉!”
“정신 차려!”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부하를 어깨로 부축했다.
병사의 흉갑에는 총알 자국이 두 개나 나있다.
다행히 멀리서 쐈고 각도도 좋지 않았는지 총알 구멍이 크지는 않고 흉갑 자체가 깨지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작은 파편이라도 깊이 박히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지금 외상이 크지 않지만, 나중에 시커멓게 올라오는 상처를 얼마나 많이 봤던가.
기침을 심하게 하는 부하의 입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복부에 상처를 입어 입으로 피가 나오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자신도 안다.
부하를 후송시키려는데, 갑자기 그의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는다.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다름아닌, 입가에 피를 흘리며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병사의 손이다.
“저, 틀린 것 같습니다.”
“일단 후방으로···.”
얀의 팔을 병사가 뿌리친다. 비록 소대장이지만, 어쨌거나 직속상관, 무례한 행동이긴 하다.
“병원 가 봤자 드러누워 있다가 뒈지는 거겠지요. 쏘던 거라도 마저 쏘고 가보겠습니다.”
“너···.”
“사실 아까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또 잘 보입니다.”
“....”
병사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꽂을대를 집어 들어 장전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왼쪽 뺨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멍청한 인간아, 죽을 때는 꼭 보고하고 죽어라!”
“옛, 소대장님.”
얀 역시 포기하고 다시 총구를 쑤시기 시작한다. 그 동작이 어쩐지 평소보다 거칠게 보이는 것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드 레뮤즈 군의 오른쪽 모서리를 지키는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맹렬한 공세를 받고 있었다.
총병은 1.5배, 창병은 2배의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약간이라도 수비가 유리한 포지션이 아니었다면 바로 밀려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밀리지 않는다. 화망은 맹렬하고 정확하고 신속했으며, 창벽은 균일하고 강인하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