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00화 (300/556)

35-23.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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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네그라타 연대에서 공세에 나선 5개 중대 중 하나를 이끄는 알론소 요페로 페레데즈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적군은 이미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네그라타가 측면을 통해 내보낸 선봉이 적진에 도달하던 시기에 말이다.

“으, 으으! 흐아악!”

한 쪽 발목을 붙들고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떠는 적병의 모습이 보인다. 상체에 걸친 가죽 끈의 버클이 철제 흉갑과 부딪쳐 덜걱덜걱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주변에는 포탄에 맞아 끔찍한 몰골이 된 시체들이 여럿 널려있다.

가장 안 좋은 각도에서 포탄을 얻어 맞은 그 부대는, 보기에도 절망적인 상태였다.

전장에서 아군도 적군도 수 없이 죽는 모습을 보았던 베테랑들도 ‘아··· 이건 좀 너무···’라고 할 수준의 참혹한 시체들이 널린 상태.

간혹 죽지 못해 끙끙대는 중상자들은 그 참상을 더더욱 참혹하게 만들 뿐이다.

각종 무기는 물론, 나름 화려하게 장식된 깃발도 그 시체 더미에 버려져 피로 젖어가는 모습을 보면 부대 전체가 대열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것이나 다름 없다.

“비켜라.”

“흑, 히익!”

그 자리로 찾아온 네그라타 용병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하자 비참한 생존자는 팔꿈치와 허벅지로 기어 간신히 자리를 벗어난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나가는 적병들을 바라본다.

진격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네그라타 용병들은 굳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

발목이 없는 데다가 빈 손, 사실상 제 정신도 아니다. 이미 적이 아닌 것이다.

알론소는 옆을 지나며 비참한 생존자를 흘끗 스쳐본다. 발목을 잃은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단면이 깔끔한지 출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운이 좋다면, 뒤따르는 트랑카벨 의무대의 군의관들의 눈에 띄어 치료받아 목숨을 건질지도 모르지.

부상자가 속출하는 치열한 전투 중이라면 적병을 신경쓰기는 어렵지만, 마침 여기는 그런 상황은 아니니까.

트랑카벨의 장녀인 아쥬흐가 의무대장으로 있어서 그런지, 혹은 외국 출신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트랑카벨 의무대는 적에게도 관대한 편이었다.

물론 자신도 그런 점이 싫지는 않았다. 죽고 죽이는 게 직업인 용병이지만, 유혈이 좋을 리는 없었으니까.

다만 중요한 작전 와중에 죽어가는 적 생각해주는 머저리는 물론 아니었다.

“총병, 총병 앞으로!”

“사격 준비잇!”

더 안쪽, 여전히 혼란스러운 적의 무리가 보인다.

분명히 방금 그들이 지나온 피투성이 벌판을 지키다가, 포격에 시달려 도망온 무리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명확하다. 적은 ‘이쪽’을 향해 대열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무리와, ‘저쪽’을 향해 도망치려 하는 무리가 마구 뒤섞여 있다.

“비켜! 병신들아!”

“엎드려! 엎드리기라도 하라고!”

“으으, 으아아아!”

“사, 살려줘! 살려달라고, 아아아아!”

어서 전방을 정리하고 적을 밀어붙여야 하는 네그라타 입장에서야, 적이 ‘이쪽’을 보든, ‘저쪽’을 보든, 하늘을 보고 있든 전혀 상관 없는 노릇이지만.

“쏴라!”

타타타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탕!

두 차례에 걸친 인정사정없는 일제사격이 적진을 휩쓸고 지나간다.

“헉! 흐억!”

“큭!”

납탄은 도망치려 하던 자도, 싸우려 하던 자도 공평하게 휩쓸고 지나간다. 비명소리와, 뭔가 단단하거나 물렁한 것이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서로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장교와 도망치려던 병사가 납탄 한 방에 나란히 끌어안듯 시체로 변하기도 한다.

“전진! 전열은 백병전에 대비한다!”

“대열을 유지해, 적이 남았을지 모른다.”

“후열은 장전! 후열은 장저언!”

창병과 총병이 뒤섞인 대열에서, 선두를 창병으로 교대하지 않고 그대로 총병 대열이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당연히 진격의 기세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여차하면 총병 대열도 백병전을 불사하겠다는 대담한 전법이다.

반대로 말하면, 직전의 일제사격으로 적의 방어선은 이미 분쇄되었으니 이어지는 전투를 위한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크으으···.”

“사, 살려줘어···.”

예상대로, 적의 대열은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조직적인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겁쟁이들은 등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고, 그나마 용감한 자들도 여기저기 뭉쳐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이들을 이끌어야 할 가장 용감한 전방 장교들은 대부분 자신이 흘려 만들어진 피 웅덩이에 빠져 지휘를 할 상황이 아니었겠지.

한참 포격에 시달린 직후, 네그라타 연대가 급습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창병 대열이 도착해 창 끝을 들이대자, 겨우 대항하는 척이라도 하던 적들도 마저 도망친다. 신호라도 받은 것 처럼.

“다시 대열 정돈해! 다음 명령이 올 때 까지 기다린다!”

“옛, 대장!”

알론소 중대장은 마지막 남은 떨거지를 위협하듯 쫓아낸 직후, 가까운 정면에 더 이상 적의 대열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목표 지점인, 적 연대의 중앙을 돌파해 반대편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타라트라바 군의 연대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고 궤멸 상태로 빠져들었다. 전쟁의 신이 와도 산산히 흩어진 병사들을 복구할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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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합니다··· 이게, 이게 콘도티에레라 불리우시는 이유군요, 에트 참모장!”

“아뇨 콘도티에레는 그냥 주디칼리에서 쓰는 명사···.”

“정말 놀랐습니다. 위축한 적을 포대로 제압하시다니, 적도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본진에서 아인멜츠의 극찬을 듣고 있으니 민망해진다.

오로지 전략전술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유명한 ‘전쟁관’을 가진 자이트리츠 가문 출신인 아인멜츠니까, 이론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화기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창병과 총병이 적절히 섞인 보병 대열은 사실상 무적이다.

적절한 훈련과 지휘를 받았다는 가정 하에, 어떤 방향에서의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으며 어떤 병종을 상대로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상성’이라고 할만한 적이 없는 이 보병 사각 대형의 천적은 같은 전술을 쓰는 적 보병밖에 없다.

그 외의 대안이 없으니까 모든 국가와 군주들은 무식할 정도의 자원을 쏟아 부어 다수의 보병 대열을 양성하고, 전장에서 느릿느릿 지루한 전투를 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까다로운 조건 아래에서는 천적이라 할 존재가 없지는 않다.

바로 포병의 운용이다.

그것도 물리적으로 방어를 벗겨내고, 정신적으로 전군을 패닉에 빠지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숫자를 가진.

거기에 더불어 적으로부터 기병 등 기동 요소를 완전히 빼앗아야 한다. 기동성을 잃고 위축되어, 똘똘 뭉쳐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하는 때에···.

치명적인 각도에 포병을 배치해 끊임 없는 포격을 가한다면 생각보다 밀집 보병을 빨리 무너뜨릴 수도 있다.

1000명의 연대가 있다면 1000명을 다 죽여서 전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1000명 중 500명을 죽여, 물리적으로 대형을 유지할 수 없어 전멸시키는 것도 아니다.

1000명 중 때로는 200명, 때로는 100명 정도의 사상자만 발생해도 때로는 연대가 무너져 버린다.

굳이 좁은 표적에 연대가 가진 최대한의 화력을 쏟아 붓는 슈토르히의 장기가 괜히 장기가 아니고, 개념적으로는 이와 완전히 유사하다.

혹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 담당 장교가 어떻게 메꿔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고, 거기로 이쪽의 보병 공격을 보내는 것도 유효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전의 네그라타 연대의 공격 타이밍은 아주 좋았지.

즉 이런 강한 보병을 상대로 포병을 집중 배치하고, 두 방향 이상에서 격자 형태로 십자 포화를 날려 완벽불침으로 보이던 보병 연대를 부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은 아니란 이야기다.

다만 내가 거기 양념을 친 것은 프리스마라 기병대를 사전에 보내 활발하게 활동하게 하면서 이쪽의 의도를 완전히 가린 것이다.

그리고 후방에서는 실시간으로 포대를 이동, 설치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는 아군에게 두 가지 이점을 주었다.

첫째로는 기병의 활발한 활동이 적에게 자잘한 피해를 준 것도 좋았지만, 이로 인해 적 보병의 밀집도가 올라간 것이다.

같은 장소에 더 많은 숫자의 보병이 모였다?

인간의 몸 따위는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쓸고 지나가 버리는 엄청난 운동 에너지의 철제 포탄을 위한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둘째로는 적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병의 열세 등으로 기동성이 제한 된 보병은 눈 앞에서 적 포대가 방열하고 있어도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저 소수의 결사대를 보내 포대를 습격하거나, 좀 더 포격에 덜 아픈 타격을 입도록 대열을 변경하거나 정도.

이중 후자인 대열 변경은 상황에 따라 아주 큰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대열의 깊이를 줄이거나, 적과 충분한 거리가 있다면 완전히 땅에 엎드리는 방법도 있고.

그런 대열에 아무리 포격을 쏴 봐야 허무할 정도로 형편 없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일반 총탄에 비해 몇십 배나 되는 화약을 태운 결과가 바닥에 점 하나 만든 것이라면 포병들이 얼마나 허무하겠나.

하지만 기병의 활동으로 아군의 의도를 완전히 가리고 기습적으로 포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런 대응을 완전히 막을 수 있었다.

뭐, 아군 포병대가 대부분 비교적 기동성이 좋은 경야포들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상당히 유리한 점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 별동대 포병의 지휘관은 다름 아닌 포격 지휘의 귀재 첼레스티나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는 똘똘 뭉친 보병 대열.

거기에 가장 치명적인 비스듬한 측면에서 송곳처럼 정확하게 뚫고 들어가는 포탄.

지금껏 어지간한 정면 공격에는 끄덕도 하지 않으며 아군 대열을 공격해오던 타라트라바 군의 보병 연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전진! 적이 물러난 만큼 나아가라!”

“흩어진 적에 신경 쓰지 마!”

공격은 네그라타 연대만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최초는 소수의 중대를 측면으로 내보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포격을 맞고 허둥대던 적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보다 쉽게’ 첫 적의 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자, 네그라타 연대 본대 전체가 진출했고.

뒤 이어, 대열을 이루고 있던 아군이 순차적으로, 마치 자동차의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 내듯 서서히 적을 밀어내고 있었다.

양 끝단을 지키는 중요한 측위 부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너지자, 두 방향에서의 공격을 두려워 한 적이 연달아 수세에 처하고 있는 꼴이다.

이동은 필연적으로 낙오를 발생시킨다.

낙오는 필연적으로 대열을 약화시킨다.

멈췄을 때는 무적이지만, 그것도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보병 대열은?

“아라라라라라라라라!”

“카라라라라라라라!”

“아라라랏! 아라라라라라라!”

그게 바로 기병의 주식, 바로 기병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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